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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0화 (10/121)

# 10

#10화

블론디나가 홀로 고민에 젖어 있건 말건, 식인 선포를 한 에이몬은 홀로 착착 걸어왔다.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는 대신 앞발로 블론디나의 뺨을 톡 건드린다.

「그런데 잡아먹기 전에 하나 물어보자.」

“뭔데?”

「네가 살아온 얘기.」

“…….”

블론디나가 입을 합 다물었다. 늘 그랬다. 황궁에 들어오기 전 얘기를 물어보면 블론디나는 늘 같은 반응을 보였다.

활기찬, 아니 활기찬 척하는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냥 일반적인 평민처럼 보냈지, 뭐.”

「그게 도대체 어떻게 지낸 건데.」

블론디나는 시선을 내렸다.

여관 주인에게 뺨을 맞고, 발로 차이고. 그렇게 울면서도 살기 위해 땅에 떨어진 빵을 주워 먹었다.

상처이자 치부였다.

호화로운 황궁 안에 살고 있으나 아직도 그때의 꿈을 꾸다 울며 깬다.

그 일들을 입 밖으로 내기에는 아물고 여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냥 대충 적당히 둘러대기만 했다.

“그냥 돈 없어서 땅에 떨어진 빵 주워 먹고…… 뭐…….”

블론디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마제또가 호들갑스럽게 짹짹거렸다.

“거지! 거지였어요?”

결국 에이몬에게 한 대 맞은 마제또는 루시에게 날아가 시무룩하게 안겼다. 에이몬 님은 나만 미워해…….

에이몬이 블론디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답지 않게 침중한 눈으로 그녀의 표정을 훑는다.

「브리디. 네가 예전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문다는 것 알고 있어?」

“그랬나?”

블론디나는 애써 웃었다.

「네가 몸집 큰 사내만 보면 몸을 굳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지?」

순간 블론디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블론디나 눈동자에 맺힌 미약한 공포를 에이몬은 본능적으로 읽어 냈다.

저건, 절 앞에 둔 들짐승이 보이는 눈빛과 비슷했다. 두려움과 초조함, 그리고 공포. 그 감정을 블론디나가 온몸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에이몬이 슬며시 다가가 블론디나의 뺨을 할짝댔다.

「내게 말해 봐, 브리디. 널 괴롭히는 과거의 잔상들은 모두 죽여 줄 테니.」

마치 마법이라도 깃든 듯 유혹적으로 들리는 속삭임이었다.

블론디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래, 말한다면 에이몬이 모두 해결해 줄 것이다. 에이몬은 강하고 또 강했으니까.

커다란 덩치의 여관 주인에게 복수해 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차후 마음이 좀 더 단단해졌을 때. 그를 떠올려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게 되었을 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웃는 얼굴로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열한 살 여자아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언젠가 준비가 되면 말해 줄게.”

「…….」

“정말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데…… 그냥 나중에.”

에이몬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장 말해 달라며 채근하고 싶기도 했으나.

지금은 블론디나의 심중을 파헤치기보다는 입을 열 수 있을 때까지 착하게 기다려 주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아마 그것이 블론디나를 위한 최선의 길일 것이다.

「언제든 좋으니 괜찮으면 얘기해.」

“응. 알겠어.”

블론디나는 옛 기억의 공포를 억누르며 작게 대답했다.

에이몬은 한숨을 내쉬며 블론디나의 팔뚝에 제 보송한 뺨을 비볐다.

블론디나는 작은 표범의 턱을 문질렀다.

제 팔뚝만 한 작은 체구의 솜뭉치가 과거의 잔상들을 모두 죽여 준다는데, 그게 너무도 믿음직스러워 웃음이 났다.

***

「뭐 해?」

오늘도 여지없이 에이몬이 놀러 왔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바빴다. 공국에서 방문한 이들의 방문 파티 참석 준비 때문이었다.

“에이몬, 나 곧 파티에 참석해야 하거든. 오늘은 루시하고 마제또랑 놀아.”

「내가 혼자 놀지도 못하는 어린애 같아?」

에이몬이 불쾌하다는 듯 앞발로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

하지만 에이몬의 불만에도 블론디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치장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고 파티장으로 떠날 시간이 됐다.

“나 다녀 올게, 에이몬.”

블론디나는 에이몬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에이몬은 배웅하듯 꼬리를 흔들다가 블론디나가 탄 마차가 움직이자마자 저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이몬 님! 어디 가세요?”

마제또가 포르르 날아와 활기차게 참견했다. 에이몬이 이를 드러냈다.

「넌 오지 마. 오면-.」

오면 죽어. 에이몬의 협박이 끝나기도 전에 마제또는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에이몬은 다시 몸을 숨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밀한 밤의 잠행. 그건 표범의 자랑스러운 능력 중 하나였다.

파티장은 황궁 안쪽, 블론디나가 기거하는 별궁과 자못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블론디나는, 파티장 입구에 서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파티장에 오는 게 처음도 아닌데 입구에 서 있노라면 늘 긴장됐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아직 파티장 매너에 완벽히 익숙하지 않은 탓이 컸다.

자신이 실수할 때마다 비웃으며 응시하는 아델라이 황녀나 라르트 황자의 멸시 어린 시선 역시 싫었다.

“블론디나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을 끝으로, 열린 문 안으로 입장했다. 파티장의 화려한 불빛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환하고, 화사하고, 빛이 난다. 늘 느끼지만 이곳은 자신이 어울릴 만한 세계가 아닌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블론디나는 사과 주스를 홀짝거리며 홀로 기둥에 등을 댔다.

“오늘도 멍청이 취급이네.”

권세 없는 황녀 따위, 공작가의 딸보다 별 볼 일 없다. 그것도 황제에게 외면당하다시피 하는 허울뿐인 황녀라면 더욱.

오늘도 역시 혼자였다. 그들만의 세계가 견고한 황족과 귀족 그룹에 끼어들 수 있을 리 없다.

저 앞에 아델라이 황녀와 라르트 황자를 위시한 귀족 자제 몇몇과 공국의 왕족이 모여 있었다.

그게 블론디나에겐 꼭 다가설 수 없는 벽같이 느껴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부르지를 말지.’

적선하듯 초대하는 파티 따위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게다가.

블론디나는 물끄러미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푸른색의 아름다운 드레스. 옷깃에 달린 보석은 황홀하게 빛났고 천은 고급스럽다. 훌륭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맞지 않은 것 같았다. 저 앞에 모여 있는 귀족과 왕족 자제들은 모두 노란빛이 도는 의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들끼리 정했던 드레스코드였을까.

물론, 자신은 고귀한 핏줄의 자제들끼리 정한 드레스코드 따위 알지 못했다. 저들과는 간단한 대화조차 나눈 적이 없었기에.

그들은 모여서 속닥거리다가 힐끗힐끗 블론디나를 훔쳐보았다. 그런 후 재미난 이야기를 하듯 다시 자그마하게 소곤거리고는 했다.

이따금 중심에 있는 아델라이 황녀가 크게 웃었는데, 블론디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의 주제가 무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기들끼리 나 비웃고 있나 보네. 이따위 옷차림이 뭐 대수라고.’

홀로 동떨어진 존재라는 게 새삼 옷차림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당당히 들고 핑거푸드를 보란 듯 맛있게 먹었다.

이런 일에 상처받을쏘냐. 차라리 여관 주인에게 뺨을 맞는 게 아프지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

어느새 홀 안에 울리던 음악 소리가 줄어들었다.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제국의 빛나는 태양,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주인공의 늦은 등장이었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들어선 황제는, 블론디나가 보아도 빛이 나고 당당했다.

아름다운 낯 위에 맴도는 여유로운 미소. 살짝 턱을 들어 올린 얼굴에서 느껴지는 황족 특유의 오만.

제 배다른 형제자매인 아델라이 황녀와 라르트 황자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욱 괴리감이 느껴졌다. 제 아비이지만 아비 같지 않은 자.

절 향해 모여드는 이들을 대충 상대하던 황제는, 이내 아델라이 황녀와 라르트를 발견하고는 가만히 웃어 보였다.

“폐하!”

“폐하를 뵙습니다!”

활기차게 인사한 둘이 황제를 향해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섰다. 황제 역시 인파를 물리며 그들을 향해 걸었다.

잠시 후 마주한 그들 사이에 따뜻한 애정이 오갔다.

“요새 내가 바빠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구나. 잘 지냈느냐?”

“일주일 전에 뵈었는데요, 폐하!”

“내 너희를 보고 싶어 일주일이 한 달 같았다.”

당연한 애정, 조건 없는 사랑. 그들 사이에 담긴 감정이 선연하여, 블론디나는 씁쓸히 웃었다.

자신을 혐오스레 바라보던 황후 역시, 지금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폐하. 아이들에게 인사는 그만하시고 공국 방문단과 마주하셔야지요.”

“조금 더 인사를 나누겠소. 최근 근방 영지를 돌고 오느라 자주 보지 못하였으니.”

웃음기 어린 대화가 이어졌다.

단란한 가정이다. 친밀한 사랑으로 단단히 묶인 사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블론디나는 문득 눈시울이 발개졌다.

그들에게 끼어들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저 ‘가족’ 사이에 자신이 포함될 수 있으리라 감히 떠올린 적조차 없다.

하나 마음 한구석이 미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들에게 블론디나 자신은, 불필요한 이물질. 거슬리는 부스러기일 뿐이니.

저들의 행복이 절 괴롭히는 건 아니었으나 이제 절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는 상대가 없다는 생각에 슬프기는 했다.

괜스레 엄마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아니다. 난데없이 펑펑 울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떨리는 입술을 내렸다. 저들이 자신의 ‘가족’이었다. 자신을 늘 외면하고 배척하는 가족.

아까 자신을 비웃던 아델라이의 웃음소리보다, 저들만의 행복한 모습이 더 속을 아프게 찔렀다.

한편, 아이들과 인사를 마친 황제는 문득 시선을 들었다. 그런 후 발견했다. 기둥 뒤에 삐죽 나온 푸른 드레스 자락을.

대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블론디나 황녀에게 선물해 준 것이었다.

그다지 애정이 깃든 선물은 아니었다. 불현듯 별궁에 처박아 놓은 황녀가 생각나 적선하듯 보내 준 것.

그는 홀로 구석에 박혀 있는 블론디나를 향해 손짓했다.

“황자, 황녀. 블론디나 황녀와는 잘 지내고 있는가.”

“예.”

아델라이 황녀와 라르트 황자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겨우 답했다.

황제는 빙긋 웃고는 블론디나를 향해 손짓했다.

“가서 이야기라도 나누어라. 제국의 황녀가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는 않구나.”

블론디나를 새끼 강아지 거두듯 황궁으로 끌고 온 게 자신이었으니 대충 신경 쓰는 척하는 것이었다.

물론, 블론디나로서는 전혀 고맙지 않은 배려였다.

곧 블론디나 앞에 네다섯 명의 아이들이 섰다.

‘가서 이야기라도 나누어라.’라는 황제의 말을 지키기 위하여 온 아델라이 황녀와 라르트 황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고위 귀족 자제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블론디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그냥 오지 말지.’

절 향한 시선에 불쾌함과 경멸이 깔려 있었다.

마치 화목한 친목 모임 안에 억지로 끼어든 불청객이 된 느낌이었다.

‘나도 너네 그리 좋지는 않은데.’

속으로 시시껄렁하게 속삭이며 뺨만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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