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화
아델라이 황녀가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그런 후 인사 대신 블론디나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라이넬. 이번 생일에 새로운 말을 선물받았다며?]
아델라이 황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블론디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둘이 하는 말이 도대체 어느 말인지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제국어는 아닌 것 같은데.’
곧 블론디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네, 황녀님. 저번 승마 대회에서 우승한 말의 종자인데, 반년이나 기다렸다가 받았어요.]
[언제 한번 나도 태워 줄 수 있어?]
[그럼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고대어였다. 고대어는 이미 사라져 버린 언어, 철저히 황족과 고위 귀족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언어로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블론디나를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 우린 너와는 달라, 라고 말하는 듯한 우월감이 그들의 낯에 가득 차 있었다.
블론디나는 어렵지 않게 그들의 의도를 알아챘다. 하지만 수치심이 치밀기보다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유치하기는.’
귀족과 황족이라고 해도 별거 없잖아? 고귀한 핏줄들이라 하여 우아할 줄 알았더니 치졸한 행동은 오히려 평민보다 못하다.
아이들의 대화는 계속됐다.
[전 피넬리에게 그림을 배우기로 했어요.]
[피넬리? 피넬리라면 요새 엄청나게 이름 날리는 화가잖아? 제멋대로에 괴팍해서 그림 한 장 받기 힘들다고 하던데?]
[저희 가문이 이번에 그를 후원하기로 했거든요.]
불론디나는 딴청을 부리며 음료를 마셨다. 적당히 달콤한 것이 취향에 딱 맞았다.
‘그런데 언제까지 할 거지? 날 골려 주기 위한 연극은 저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지루한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데 한참 웃고 떠들던 아델라이 황녀가 그제야 블론디나를 발견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아. 그렇지. 언니에게 와서 너무 우리끼리만 얘기했나 봐요.”
블론디나가 마시던 음료잔을 내려놓고는 미미하게 웃었다.
“응. 그렇긴 했지.”
“…….”
매너가 조금 없기는 했어. 그렇게 답하는 블론디나의 말에 아델라이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악의적인 미소를 입꼬리에 걸었다.
“우리끼리만 아는 얘기를 해서 좀 재미가 없죠? 미안해요. 이제 언니도 같이해요.”
우리끼리만 아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끼리만 쓸 수 있는 언어라고 표현함이 옳았다.
모두가 블론디나의 표정을 주목했다. 블론디나가 상처받기를. 분해하고 치욕을 느끼며 슬퍼하기를. 어린아이들의 악의는 그토록 잔인했다.
고개를 내저은 블론디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아니, 괜찮아. 난 자랑할 거리가 없어. 있다고 해도 그다지 하고 싶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블론디나가, 상대를 유치하게 뻐기는 아이들 취급했다.
순간 아델라이 황녀의 낯에 다시 당황이 찼다.
다 알아들었어? 고대어를 배웠나? 그럴 리가 없는데. 골목에서 굴러먹던 천한 것이 어디서 고대어를 배웠겠는가.
블론디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둠에 싸인 테라스 밖 후원을 응시했다. 그러곤 가볍게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후원에서 바람 좀 쐴까 하는데…… 미안하지만 먼저 가볼게.”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그대로 뒤돌아 자리를 떴다.
아델라이로서는 블론디나의 태도가 퍽 불쾌하게 다가왔다.
누구나 섞이고 싶어 안달하는 귀족 그룹이었다. 황족과, 권력의 정점을 찍은 가문의 자제만이 어울리는 그룹이었다. 나이를 막론하고 상대는 모두 살살 비위를 맞췄다.
블론디나 역시 그래야 했다.
납작 엎드려 꼬리를 흔드는 게 블론디나의 역할이었다. 저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뜨는 건, 천한 황녀가 해야 할 행동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저 천한 것이 도대체 언제 고대어를 배운 거지?’
멀어지는 블론디나의 드레스를 보며 아델라이 황녀는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옆에 서 있던 라르트 황자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델라이! 블론디나도 고대어를 아나 봐!”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멍청아! 아델라이 황녀는 순간 그렇게 외칠 뻔하다가 겨우 참았다.
늘 침착하고 우아한 저인데 블론디나만 관련되면 자꾸 본래 모습을 잃게 된다.
“알…… 리가 없잖아, 라르트.”
애써 곱게 답했다.
“하지만 다 알아들었는걸?”
“…….”
“놀려 주러 왔는데 자랑하기 좋아하는 애 취급이나 당했네. 이게 뭐야. 우리가 유치하게 군 것 같잖아.”
라르트 황자가 자꾸 속을 긁어 댔다. 이건 같은 편인지 뭔지. 눈치도 없는 게!
아델라이 황녀는 애써 짜증을 숨기고 주먹만 꽉 쥐었다.
그리고 그런 아델라이의 곁에 선 한 소년이 블론디나의 뒷모습을 흥미로운 눈길로 좇았다.
황녀 모임 그룹에 섞여 있던 로드슨 공작가의 차남.
그들 그룹에서 유일하게 고대어를 쓰지 않으며 가만히 중립을 지켰던 아이, 필립 로드슨 공자였다.
블론디나는 후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며 실소를 내뱉었다.
그녀는 물론 고대어를 몰랐다.
‘저 어린애들이 하는 말이 뻔하지, 뭐.’
평민일 때도 그랬다.
동네 남자애들은 누가 더 망아지를 잘 타는지 자랑했고 여자애들은 생일에 받은 새 옷을 자랑했다.
그리 생각해서 대충 받아친 거였는데 다행히 맞은 모양이다.
‘날 골탕 먹이려면 차라리 뺨을 때려라. 그게 더 아프지.’
잘 정리된 화단 사이로 들어가 아까 자신이 서 있던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그런 후 들고 있던 손수건을 풀어 자그마한 체리타르트를 꺼냈다.
블론디나는 어둑한 후원을 향해 혼자 읊조리듯 말을 꺼냈다.
“이 파이 되게 맛있더라.”
후원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빈 후원이기에 당연했다.
블론디나는 후원을 거닐며 계속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던 맛이었는데. 한입 먹으면 깜짝 놀랄걸?”
남이 보면 미쳤다고 할 법한 행동이었다.
블론디나는 내심 ‘내게 호위 기사가 없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제게 미쳤다고 할 사람이 없어서.
“정말 안 먹을 거야? 내가 다 먹는다? 응?”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풀이 바스락바스락하더니, 작고 까만 솜덩이가 톡 튀어나왔다.
「싫어! 나 줘!」
에이몬이었다.
‘……역시.’
블론디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꼭 눌렀다.
그럼 그렇지. 안 나오면 못 배길 향기지. 에이몬은 달콤한 파이라면 사족을 못 썼으니까.
주위를 둘러보다가 좀 더 으슥한 안쪽으로 들어가 잔디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드레스가 구겨질 테지만 상관없었다.
곧 한 인간과 한 짐승, 둘만의 다과회가 펼쳐졌다.
블론디나의 드레스 자락 위에 몸을 말고 앉은 에이몬이 체리 타르트를 아작거리기 시작했다.
「나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창가에 뭐가 어른거리기에 봤더니 작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있더라고.”
「작고 귀엽다니!」
파이에 얼굴을 묻었던 에이몬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블론디나는 그의 입가 솜털에 묻은 파이 부스러기를 톡톡 털어 주었다. 하는 행동이나 외모를 보면 작고 귀여운 게 맞았다.
“나 걱정되어서 온 거야?”
에이몬은 움찔거리다가 다시 파이에 얼굴을 박았다.
「아니야. 인간 파티는 어떤가 궁금해서 와본 거야.」
변명하듯 웅얼거리며 황급히 파이를 먹어 치운다.
전부터 느끼지만 이 작은 짐승은 무언가를 생색내는 걸 퍽 부끄러워했다. 마구 자랑질하는 파티장 속 아이들과 너무도 다르다.
적막한 후원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 아래 매끄러운 에이몬의 털이 살랑거렸다.
블론디나는 말없이 에이몬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괜히 달을 쳐다봤다.
이 작은 짐승은 작은 일로 사람을 참 감동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에이몬이 있는 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그 ‘고대어 그룹’에게 둘러싸여 압박 아닌 압박을 받고 있을 때 발견했다. 창가에서 불안하게 살랑거리는 에이몬의 꼬리를.
아델라이 황녀에게 ‘우리만 아는 얘기를 해서 재미가 없냐’는 둥 얘기가 나올 때, 에이몬의 귀가 불쑥 나오는 걸 지켜보았고.
아마 자신이 거기서 당하고만 있었다면 그 앞발로 창문을 깨고 그대로 들이닥칠 기세였다.
그래서 애써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이 까칠하고 상냥한 신수님을 만나뵙기 위하여.
“에이몬.”
「왜.」
“그냥.”
에이몬이 꼬리를 느리게 흔들며 답했다.
「뭐야. 실없게.」
사실은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고마운 게 너무 많아서 이제는 표현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실은 파티장에서 조금 힘겨웠다.
화목한 ‘황제 가족’을 보며 마음이 아릿하게 찔렸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뭉친 단단한 관계. 저에겐 없는 그 관계가 부럽고 또 부러웠다.
이젠 제게 없는 것.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아 주는 존재가 없다는 것. 그건 어머니의 작고 후, 아프게 펼쳐진 당연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상처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늘 외롭고도 서글펐다. 시린 어깨 옆에 아무런 온기가 없어 쓸쓸했다. 늘 그 감정을 외면하며 도망쳤다. 하지만…….
‘하지만 에이몬이 있잖아.’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 에이몬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저 작은 표범이 언제부터 이렇게 사랑스러워진 걸까.
「이거 맛있네. 더 가져와서- 꺙!」
블론디나는 더 참지 못하고 작은 표범을 번쩍 들어 껴안아 버렸다.
깜짝 놀란 에이몬이 꽥 소리를 질렀으나 놓지는 않았다.
“예뻐. 귀여워 죽겠어.”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당연히 에이몬은 가만있지 않았다. 앞발로 블론디나의 얼굴을 쭉쭉 밀고 손등을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물론 발톱을 내밀지 않은 채.
사실 블론디나를 밀어내려면 얼마든 밀어낼 수 있었으나 블론디나가 상처받을까 봐 진심으로 밀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에이몬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한껏 귀여움 당하고 예쁨 당하는 것에 이젠 이골이 났다.
신수로서의 위엄이 무어냐. 이 자그마한 여자애 앞에서는 그저 귀여운 새끼 표범일 뿐이다.
블론디나는 억지로 안겨 있는 에이몬의 뺨에 제 뺨을 비비고 보송한 털을 매만졌다. 달콤한 체리타르트 향기가 났다.
에이몬은 반쯤 체념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휘둘릴 따름이었다.
에이몬이 한숨을 푹 내쉬자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콧잔등을 문지르며 다시 웃었다.
“너무 귀여워. 고양이가 한숨도 쉬고.”
에이몬은 고개를 휙 돌렸다. 고양이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젠 포기다.
에이몬이 그러건 말건 블론디나는 작은 표범을 꽉 껴안아 뺨을 비볐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래, 에이몬이 있으니 됐다.
비록 불친절한 말투로 늘 틱틱대기는 하지만 자신에게만은 관대한 신수.
위대하고 잔혹한 짐승이나 결코 발톱은 보이지 않는 상냥한 에이몬.
제 앞이 바로 외로운 낭떠러지였으나, 발아래엔 아직 단단한 땅이 있다. 에이몬이 있다.
그거면 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