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웠더니 짐승-9화 (9/121)

# 9

#9화

“그 잔악하고 오만한 신수 놈들……!”

라르트 황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라르트 황자는 제 쌍둥이인 아델라이 황녀에게 주절거리며 하소연 중이었다.

아까의 일, 그러니까 에이몬에게 목을 밟힌 건 차마 주위에 알릴 수 없었다. 아버지인 황제 폐하께도 마찬가지다.

고귀한 황족이 고작 짐승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비웃음당하다니.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었으나,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만으로 폐하는 분노하실 것이다. 폐하께서 자신에게 실망하시는 건 죽어도 싫었다.

“라르트. 그 짐승이 널 위협하고 블론디나를 감쌌다고?”

“응! 내 목을 밟고 가슴뼈를 부수려 했어! 정말 아팠다고!”

라르트 황자가 제 가슴팍을 두드리며 외쳤다. 치욕에 기인한 격한 감정이 서럽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델라이 황녀는 피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제했다.

제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한낱 미물인 주제에 황족인 라르트를 욕보이다니.

그 사실만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 이유가 블론디나라는 천한 핏줄을 위해서였다니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황족으로서 수치다.

“그러게 왜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해서 황족의 격을 떨어뜨려?”

“…….”

“창피를 당한 건 너이지만 결국 그 모든 게 황족의 치부야. 언제까지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할 거야?”

“……아델라이.”

아델라이의 얼굴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만약 네가 쏜 화살에 그 천한 것이 맞기라도 했어 봐. 폐하께서 뭐라 하셨을 것 같아? 호사가들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순간이야.”

침착한 어조의 비난에, 라르트 황자는 눈물을 닦으며 울먹였다.

“미, 미안해.”

아델라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네 잘못은 아니지. 넌 그저 그 계집애를 놀려 주려 했던 것이니까. 나도 네 감정이 이해는 가.”

“맞아! 어머니를 슬프게 하는 천한 핏줄 같은 건, 내가……!”

아델라이 황녀가 손수건으로 제 쌍둥이 남동생의 눈가를 눌러 닦았다.

“어쨌든, 이제 조심하도록 하자. 되도록 그 신수가 있을 때는 블론디나를 건드리지 말고. 그들이 강한 건 사실이니까. 알겠지?”

언제 타박했냐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아델라이는 말했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라르트 황자를 손안에 굴리는 방법 정도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라르트 황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으응.” 하고 착하게 답했다.

아델라이 황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위로하듯 라르트 황자의 등을 두드렸다.

“라르트. 네게 치욕을 준 그들에게 반드시 내가 복수해 줄게.”

“어떻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그들에게도 분명 약점 하나쯤은 있겠지.”

“응. 응. 꼭이야!”

“그래. 날 믿어.”

아델라이 황녀는 침착한 얼굴로 웃었다.

“폐하. 많이 바쁘신가요?”

황제의 집무실을 찾은 아델라이 황녀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황제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

라르트 황자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아이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응석 부리듯 그의 팔에 매달린다. 황제는 졌다는 듯 깃펜을 놓았다.

“이리 오너라.”

두 팔을 벌린 그가 아델라이 황녀를 꼭 안아 주었다. 블론디나에게는 보여 준 적 없는 다정한 아비의 얼굴이었다.

아델라이는 황제의 품에 덥석 안겨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제는 제 딸아이의 고민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

“예, 폐하…….”

“어리디어린 네가 무슨 고민이 있어 그리 큰 한숨을 내쉬는 게냐.”

어린 황녀의 고민이 귀엽다는 듯, 황제가 크게 웃었다.

아델라이 황녀는 제 아비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침울한 목소리로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제국의 역사를 배우는데 문득 슬퍼져서요.”

“무어가 말이냐.”

“제국을 일군 것도 황족, 백성을 이끄는 것도 위대한 황족이잖아요?”

“그렇지.”

“한데…… 있는 것이라고는 힘밖에 없는 표범 신수 따위를, 지켜만 봐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 슬퍼요.”

“…….”

순간 황제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몸을 떨어뜨린 황제가 아이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델라이 황녀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델라이. 넌 나를 무척 많이 닮았다.”

“존귀하신 폐하를 닮았다 해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폐하.”

“그 때문에, 차후 제국을 통치할 이가 여황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

아델라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놀란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입술만 달싹인다.

황제는 대대로 남성의 몫이었다.

과거, 여자 황제가 없던 건 아니었으나 그것은 후계가 없을 때야만 가능했던 일.

라르트 황자가 있는 이상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감히 생각하지 않았건만…….

아델라이의 흔들리는 눈동자 안에 저 모를 탐욕이 들어찼다.

욕심내지 않았던 자리가 저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 흥분마저 밀려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애써 속마음을 누르고 침착하게 황제를 응시했다.

“아델라이. 금발, 금안을 찾아라.”

“금발…… 금안…….”

“신수 따위에게 우리가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방법은, ‘신의 후예’를 찾는 것뿐이다.”

표범 신수. 인간이 아무리 칼과 창을 들고 달려들어도 맨몸의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화살조차 튕겨 내는 단단한 가죽. 집채만 한 몸집의 지배자. 두려울 정도로 강한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이는, 신의 자손뿐이었다.

태초의 신이 인간과 신수를 만들었고, 인간을 위해 또 다른 신을 낳았다.

바라한이 바로 그였다. 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바라한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태초의 신은 소멸했고 인간의 신, 바라한 역시 사라졌다고 일컬어졌으나…….

오백 년 전, 바라한의 후예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비록 흑표범 신수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에게 자식이 있었으니 분명 어딘가에 후예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를 찾아내기만 하면 다시 인간들의 세상이 돌아온다.

황제가 아델라이 황녀의 뺨을 애정 어린 손길로 매만졌다.

“아델라이. 이미 소멸한 신. 바라한의 후예를 네가 찾는다면…….”

황제가 가만히 웃었다.

“네가 황제의 관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델라이 황녀는 숨을 들이켰다.

***

황궁의 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블론디나 방의 창 너머, 만개했던 봄꽃들이 꽃잎을 하나씩 떨구어 간다.

꽃향기 밴 봄바람에 여름 열기가 밸 무렵, 에이몬이 찾아왔다. 근 한 달 만의 방문이었다.

「블론디나. 쿠키 줘…….」

에이몬은 귀를 축 늘어뜨린 채 창가 테이블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자수를 놓던 블론디나와, 시녀 루시가 동시에 에이몬을 향해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에이몬. 왜 이렇게 오래간만에 왔어? 네 분홍 발바닥이 그리웠어.”

“에이몬 님! 에이몬 님 드리려고 제가 털실 뭉치를 많이 모아 놨어요!”

에이몬은 물끄러미 두 여자아이를 올려다보았다.

분홍 발바닥을 못 보아 우울했다는 블론디나. 절 위해 털실 뭉치를 모아 놓았다는 루시.

에이몬은 제 발가락을 매만지기 시작한 블론디나의 손아귀에서 앞발을 휙 거뒀다.

「털실 뭉치라니……. 나 어린애 아니야. 덧붙여 표범이고. 털 뭉치를 갖고 놀 나이도, 그걸 갖고 노는 고양이 따위도 아니란 말이야.」

에이몬이 언짢은 마음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말했다.

도대체 자신을 무어로 보는 건지. 아무래도 정말 신수로서 제 권위와 위상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만 같았다. 이건 좀 곤란했다.

고고하게 고개를 든 표범 주위에서 참새 마제또가 호들갑스럽게 날개를 퍼덕거렸다.

“맞아요! 에이몬 님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멋지십니다! 고양이 따위가 아니시지요!”

하지만 10분 후.

“황녀님. 에이몬 님 정말 잘 노시네요.”

“그러게, 루시. 나도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툴툴댔던 에이몬은 제 말이 무색하리만큼 털실을 잘 갖고 놀았다.

실을 이로 앙앙 물어뜯기도 하고 앞발로 마구 두드려 늘여 놓기도 했다. 참으로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짐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 무척 귀여워, 두 여자아이는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서 턱을 괴고 작은 표범을 관찰하게 됐다.

블론디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세상에 저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까. 마치 제 새끼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소년이 되어 라르트 황자의 목을 짓밟던 에이몬은 기억나지 않았다.

황자의 가슴을 발로 찬 후 서늘한 안광을 내뿜던 에이몬의 얼굴 역시 기억에서 사라졌다.

보이는 건, 양탄자 위를 우다다 뛰어다니며 털실 뭉치를 갖고 노는 새끼 표범이었으니까.

한참을 뒹굴뒹굴 놀던 에이몬이 가만히 행동을 멈췄다. 발톱과 몸에 털실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털실 뭉치를 질질 끌고 온 에이몬이 블론디나에게 말했다.

「뭉쳤어. 떼줘.」

“참 귀엽단 말이야…….”

블론디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뱉었다. 에이몬은 불쾌하다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물론 블론디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에이몬의 앞발만 매만졌다. 털실이 엉켜 있는 앞발이 어찌나 귀여운지 자꾸만 만지작거리게 됐다.

에이몬은 그 손길을 벗어나려 발을 삭삭 피했다.

「얼른 떼주기나 해. 그만 귀여워하고.」

자포자기한 듯한 에이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여전히 그의 앞발을 톡톡 건드리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털 뭉치를 떼준 건 루시였다. 발톱에 엉킨 털실을 풀어낸 후 그것을 다시 돌돌 만 루시가 자그마한 공을 만들어 던졌다.

에이몬은 앞발로 공을 툭툭 두드리며 뒹굴거렸다.

「역시 너밖에 없어, 루시.」

“난? 난 없어, 에이몬?”

블론디나가 서운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힐끗 올려다보았다가 눈을 끔뻑거리며 털실과 함께 뒹굴었다.

「뭐…… 너도 있지. 늘 있지.」

그 웅얼거리는 모습이 또 어찌나 귀여운지, 언제 서운했냐는 듯,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에이몬이 펄쩍 뛰어 물러나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감히 이 몸의 엉덩이를 두드려? 손 없이 살고 싶어?」

“내 손 먹게? 식인도 해?”

「못할 것도 없지. 지금이라도 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핥고 자근자근 씹어 삼킬 수 있다고.」

위협인데,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 작은 고양이가 무슨 소리야.’라고 생각하며 웃을 따름이었다.

양탄자 위를 쫑쫑거리며 뛰어온 마제또 역시 에이몬의 말에 동조하듯 외쳤다.

“그럼요! 에이몬 님은 드실 수 있지요! 다 드실 수 있고말고요!”

블론디나는 표범과 참새가 외치는 잔인한 말을 모두 무시하고는 에이몬을 휙 끌어안았다.

그런 후 보송보송한 새끼 표범의 뺨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난 잡아먹지 마. 맛없을 거야. 열한 살 될 때까지 쓰레기 같은 음식만 먹고 자랐거든.”

「쓰레기?」

“응. 식당에서 남은 밥이나, 곰팡이 핀 딱딱한 빵이나 먹었어. 그러니까 먹으려면 루시를 먹어.”

옆에 있던 루시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화, 황녀님. 저도 그다지 맛은 없을 거예요…… 저희 백작가도 망해 가서 고기 못 먹은 지 꽤 됐어요…….”

목소리 끝에 약간의 겁마저 배어 있었다.

루시는 에이몬과 격 없이 지내다가도, 가끔 그의 정체를 상기할 때마다 무서워하고는 했다.

평민이었던 블론디나와는 달리 백작가 딸인 루시는 ‘신수’의 잔혹함과 흉포함에 대하여 진이 빠지도록 들어왔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에이몬. 네가 택해. 날 먹을 거야, 루시를 먹을 거야.”

「둘 다 좀 더 살이 찌면 생각해 볼게. 딱딱한 건 이 박을 때 느낌이 별로거든.」

에이몬이 진지하게 답했다.

루시는 움찔거리며 한 발 뒤로 물렀고, 블론디나는 살이 쪄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살짝 고민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