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화
라르트 황자는 쇳소리 같은 숨을 쉭쉭 내쉬었다.
제 목을 밟고 있는 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선득한 감각이 발끝부터 몸을 타고 올랐다.
방금, 블론디나의 품에 안겨 있던 고양이가 절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가 인간으로 변해 제 목을 밟고 있다.
이마 위에서 반짝이는 변환석이 알려 주고 있다.
표범 신수. 눈앞의 이는 인간의 형상을 한 짐승이었다.
어찌하여 저 신수가 이곳에 있는 건지, 왜 블론디나와 함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안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공포심이 온몸의 감각을 긁어 댔다.
눈을 감아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에이몬이 라르트 황자의 얼굴을 향해 상체를 내렸다. 삭막한 살기를 띤 눈빛이 쏘아질 듯 쏟아졌다.
“인간 따위가 감히 내 것을 위협해……?”
“컥…….”
아니라 대답하고 싶었으나 목이 밟혀 있어 그리할 수 없었다. 고개를 내젓고 싶었으나 제 목을 사뿐히 밟고 있는 발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살짝 벌어진 라르트 황자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샜다.
에이몬은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가 황자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서야 치웠다.
연약한 인간 따위 죽이는 건 간단하다. 생명을 앗는 것에 주저할 리 없었다.
신경 쓰이는 건 황족을 죽인 후 장로에게서 쏟아질 잔소리였다. 게다가.
‘게다가 이 어린아이를 죽이면 블론디나와 더는…….’
에이몬은, 제 목을 쥐고 바닥을 구르는 라르트 황자를 표정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블론디나는 놀란 얼굴로 나무 옆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야.”
“크흑…….”
라르트 황자는 대답 대신 끓는 신음을 뱉었다.
에이몬이 다시 라르트 황자의 가슴팍을 발로 차 풀 위로 쓰러뜨렸다. 라르트 황자의 몸이 풀밭을 한번 구르다가 멈췄다.
“너희 인간은 아주 약해. 알지?”
“크흣…… 네, 네.”
“화살에 맞으면 당연히 죽어.”
라르트 황자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숨만 몰아쉬었다.
들이켜는 공기에 가시라도 있는 걸까. 목구멍이 따갑고 호흡이 힘들었다.
“한데 넌 블론디나에게 화살을 날렸어.”
“모, 몰랐…… 블론디나 황녀인 줄 모르고…….”
라르트 황자가 애써 부정했다. 비록 그것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에이몬의 무표정한 낯 위에 옅은 미소가 감겼다.
“몰랐다……. 그래. 모를 수 있지. 모를 수 있어.”
“…….”
“그런데 나도 모르겠거든. 어느 정도로 힘을 주어야 네가 죽을지.”
꾸욱. 에이몬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라르트 황자가 꺾이는 듯한 숨을 들이켰다. 밟혀 있는 갈비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죽으려나?”
“커흑……!”
“아니면, 이 정도?”
에이몬이 힘주어 가슴팍을 꾸욱 밟을 때마다 고통으로 눈앞이 흐릿해졌다. 어쩌면 뼈가 이미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날아온 마제또가 그들의 머리 위를 빙빙 돌며 짹짹거렸다.
“죽여! 죽여 버려요!”
공포에 젖은 라르트는 그 말을 듣지 못했고, 에이몬 역시 마제또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격해진 호흡이 라르트의 목구멍에 걸렸다.
벌벌 떨리는 다리 사이로 축축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수치스러운 꼴이었으나 창피해할 겨를조차 없었다.
두 손으로 에이몬의 발목을 붙잡고 절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니……!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살려…….”
누구보다 오만했던 황족 아이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에이몬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오만한 자 위에 더욱 오만한 짐승이 있었다. 이내 그 짐승이 웃었다. 그 미소 속에 잔인한 살기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에이몬은 블론디나가 들을 수 없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블론디나는 내 인간이야.”
“크흑……!”
“내 말의 뜻을 알겠지? 똑똑하고 대단하신 황족이잖아.”
“네……! 네!”
라르트 황자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순종적으로 답했다. 어떻게든 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제또는 어느새 블론디나의 어깨에 앉아 흥분한듯 쫑쫑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혼내 줘요, 에이몬 님! 쟤네도 비둘기 죽였어!”
그제야 블론디나가 정신을 차렸다. 정말 저러다가 잔인한 사건이 눈앞에 펼쳐질 것 같아 황급히 걸음을 옮긴다.
“에이몬.”
블론디나는 떨리는 손으로 에이몬의 옷깃을 잡았다.
에이몬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표범이었을 때처럼 고개를 슬그머니 기울여 블론디나의 표정을 훑었다.
블론디나의 낯 위에 공포와 혼란이 배어 있었다.
블론디나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에이몬이 밟고 있는 라르트의 모습에서, 여관 주인에게 얻어맞던 제 과거 모습이 투영된 탓이다.
저도 모르게 손이 벌벌 떨리고 이가 다닥다닥 맞물렸다.
“무서워? 그만할까?”
에이몬이 다정하게 물었다.
블론디나는 고개를 내젓더니, 떨리는 손으로 에이몬을 끌어당긴 후 연기처럼 속삭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응.”
“혹시 모르니까……. 상처가 안 보일 부위로 잘 골라서…….”
그래도 배다른 동생이기에 죽이는 것까지는 좀 그렇지만, 제 머리통에 화살을 날렸으니 혼내 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
에이몬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으려다 간신히 참았다.
상황을 두려워하여 발발 떨고 있는 건 맞는데, 안 보이는 부위로 골라 때리라고 하다니.
눈앞의 인간 여자애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에이몬은 황자를 어찌할까 살짝 고민했다. 블론디나가 잘 때리라고 명하시니 왠지 그래야 할 것 같기는 한데. 자신이 진정 애완 고양이도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황자를 밟던 발을 치웠다.
블론디나가 괜찮다는 행동을 취하고 있으나 두려워하고 있음을 안다. 에이몬은 제 행동을 끝내야 할 시간이 언제인지 잘 알고 있었다.
누워 있던 라르트 황자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젖은 호흡이 풀밭 위에 힘겹게 흐트러졌다.
마제또의 한탄 섞인 말이 울렸다.
“힝. 왜 안 죽이시지?”
블론디나는 쉿, 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가, 마제또를 진정시키는 듯 손끝으로 날개를 쓸어내렸다.
블론디나의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두려움을 알아챈 에이몬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풀밭 위에 작은 새끼 표범이 톡, 떨어졌다.
에이몬은 작은 짐승의 모습으로 변해, 라르트 황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황자의 귓가에 살기 어린 목소리가 작게 속삭여졌다.
「알아 둬. 오늘 일로 브리디에게 보복이라도 하려 든다면 그날이 네 인생이 끝나는 날이 될 거야.」
“……네.”
라르트 황자는 공포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 역시 떠벌리지 마. 창피하잖아? 명색이 황족인데.」
“네…….”
「그래. 똑똑하네.」
에이몬이 만족했다는 듯 귀를 쫑긋거렸다.
오늘 일이 알려져 장로에게 잔소리 듣는 건 싫었다. 에이샤 장로의 잔소리는 늘 언제나 길고도 지루했으니까.
곧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향해 총총 걸어갔다. 블론디나는 아직도 죽은 나무처럼 굳어 있었다.
블론디나의 구두 끝을 앞발로 톡 건드리자 블론디나가 고개를 숙여 에이몬을 내려보았다.
에이몬이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활쏘기 대회 같은 건 이제 됐어. 네 궁으로 가서 간식이나 먹자.」
“응.”
「안아 줘, 브리디.」
언제 라르트 황자를 위협했냐는 듯, 에이몬은 애교 피우듯 블론디나의 복숭아뼈에 얼굴을 비볐다.
날 무서워하지 마. 난 네 작고 귀여운 짐승이야.
살랑이는 꼬리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블론디나는 그제야 허리를 숙였다.
“응. 가자.”
두 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에이몬이 뛰어올랐다.
손바닥 아래 닿는 따끈하고 보송한 생명체. 절 위해 라르트를 혼내 준 귀엽고도 무서운 작은 친구, 에이몬.
누워 헐떡거리는 라르트를 두고, 홀로 별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행사 중간에 빠져 버렸으나 반푼이 황녀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제인 자신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일 터.
“왜 안 죽였어요, 에이몬 님?”
마제또가 부산스레 묻자, 에이몬은 신경질적으로 앞발을 휙휙 휘둘렀다. 마제또는 얻어맞기 전에 포르르 하늘로 도망가 버렸다.
블론디나는 저 멀리 보이는 별궁 지붕을 바라보다가 에이몬의 몸통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에이몬은, 졸지에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영문 모를 표정으로 블론디나를 응시하게 됐다.
“에이몬.”
「응.」
“막 발로 밟고 협박하는 거 되게 멋있더라.”
에이몬이 머쓱한 듯 앞발로 콧잔등을 문질렀다.
「다음엔 더 멋있게 밟아 줄게. 잘할 수 있어.」
에이몬은 라르트 황자를 향한 더 나은 폭력 행위를 약속했다.
「짐승은 많이 물어 봤는데 인간은 처음이라…….」
머쓱한 중얼거림이 흩어졌다.
블론디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이렇게 행동하다가 뒤탈 생기는 거 아니야?”
「뒤탈? 무슨?」
“그래도 황족이니까. 혹시 네게 복수한다고 하면 어쩌지?”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눈동자에 새겨진 걱정을 살핀 후 그녀의 손등을 살짝 핥았다.
깜짝 놀란 블론디나가 에이몬을 놓쳤다. 까끌까끌한 혀의 감촉이 낯선 탓이다.
탁. 네 발로 바닥을 가볍게 디딘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브리디. 난 강해.」
“응.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인간들의 계급 따위 나와는 상관없어. 네가 원한다면 황제도 밟아 줄게.」
“그 황제가 내 아빤데?”
「음. 그럼 황제는 뺄까?」
에이몬이 급히 꼬리를 말았다. 블론디나는 대답을 미루고 옅게 웃었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넌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된다는 거야. 날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
블론디나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기어코 목울대를 꿀꺽 울렸다.
울컥거리는 감정이 자꾸만 제 속을 들쑤신다.
사실 아까부터 눈물이 날 것 같아 애써 참았다.
그래서 황제가 내 아빠라는 둥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건넸으나 고저 없이 말해 오는 에이몬의 진심에 다시 감정이 터져 나왔다.
늘 신경질을 부리지만 다정한 친구. 위대하고 고결한 신수이나 저에게만큼은 그저 귀여운 표범. 내 소중한 친구, 에이몬.
블론디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어 에이몬에게 눈을 맞췄다. 손을 내밀자 에이몬이 손바닥 위에 제 몸통을 비벼 왔다.
「그러니까, 브리디. 이제 날 예뻐해 줘.」
“……응.”
블론디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눈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새삼스럽게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울먹이는 표정을 들키는 게 민망하고도 부끄러워 애써 참았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에이몬은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고 있다가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억지로 제 콧등을 비볐다. 마치 응석 부리듯.
한참을 그렇게 비비적대던 에이몬이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춰 왔다. 햇살 아래 그의 눈동자가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 닿는 체온이 사뭇 따뜻했다. 블론디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울먹임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