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웠더니 짐승-6화 (6/121)

# 6

#6화

황제궁 안, 은밀하고도 깊숙한 곳. 실내 분수대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황제가 나른한 얼굴로 체스 말을 옮겼다.

“이번에도 아니었는가.”

“예. 선명한 금발에 금안이라 기대했습니다만…….”

공작이 콧수염을 더듬으며 시선을 내렸다. 황제가 우아한 손길로 퀸을 잡았다.

“일전에 찾았던 자는 어찌 되었는가.”

“그자 역시 마정석에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실패라는 말이로군.”

“죄송합니다!”

떨그렁. 체스 말을 던진 황제는 아름다운 낯을 구기며 체스판을 밀어냈다.

소파에 몸을 묻어 생각에 잠긴다.

금발과 금안을 지닌 이들이 가진 ‘능력’을 찾아내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그 능력만이 황제의 권위에 반발하는 짐승을 굴복시킬 수 있을 터. 오랜 기간 황족을 농락해 온 아름다운 표범을.

문득, 블론디나가 떠올랐다.

제 어미를 닮은 금발, 하지만 모친인 릴리, 그녀의 금안까지는 닮지 않았다.

릴리 역시, 금발에 금안일 뿐 능력은 없었다.

혹시나 하여 아이를 낳아 보았으나 블론디나는 능력을 가지기는커녕 눈동자마저 잿빛이었다. 절 지독히 닮은 그 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묘하게 빠져드는 것만 같은.

태어난 아이가 능력이 없음을 확인하자 여자를 버리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다.

초라한 여인의 아름다운 미모에 혹해 1년간 흔들렸던 것뿐,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반지를 남기며 ‘언젠간 다시 오겠다.’라고 약조했으나 황궁으로 돌아와 황태자 책봉을 받자마자 잊었다.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기억에서 지워 냈다는 게 맞다.

릴리라는 여인과 함께했던 일은 그저 신기루이자 꿈이었다. 제 현실은 언제나 황궁이었을 따름이다.

이제 와 블론디나라는 딸을 황궁으로 들인 것도 한낱 충동에 불과했다.

어찌 되었든 제 핏줄. 외면하며 신경 쓰는 것보다야 황궁에 처박아 놓고 잊는 게 나았다.

혹여 뒤탈이 생길 수도 있거니와…… 그렇다고 죽여 버리기에는 무언가 찝찝했다.

“그 신수 놈들을 어찌한다…….”

홀로 중얼거리는 황제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추켜 올렸다.

조바심이 일었으나 방법은 없었다.

그들을 제어할 신이 사라져 버렸으니 인간인 자신들은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

“황녀님.”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인가 불어오는 바람에 풋풋한 흙내음이 섞여 있다.

블론디나는 눈꺼풀을 살짝 움직였다.

“황녀님. 말씀하셨던 주사위 놀이를 갖고 왔습니다. 루시 영애도 오셨어요.”

문 너머로 하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까딱했다.

황녀. 블론디나 황녀라. 잠결에 중얼거리다가 그것이 제 신분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세상에. 내가 황녀라니. 상기하면 할수록 신기할 따름이었다.

황궁에 들어온 지 이미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잠에서 깰 때면 자신이 황녀라는 걸 온전히 자각하지 못했다.

평민으로 살아온 것이 몇 년인데,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이불을 대충 걷어 낸 후 나무 문짝을 향해 답했다.

“들어와.”

곧 하녀가 커다란 네모판과 금빛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 뒤를 자그마한 소녀가 쫓아 들어왔다. 석 달 전, 블론디나의 말동무 시녀로 들어온 헤리브 백작가의 막내딸 루시였다. 무너져 가는 백작가의 마지막 후예.

“황녀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응.”

“오늘도 에이몬 님이 안 계시네요? 안 오신 지 보름이 넘어가는데.”

“그러게.”

루시는 이미 몇 달 전 에이몬을 처음 마주했으며, 그의 정체를 그날 바로 파악했다.

블론디나는 문득 루시와 에이몬이 처음 마주했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루시가 어찌했더라.

에이몬의 어렴풋한 형체만 보았을 때는, ‘어머, 귀여운 고양이네요?’라며 화색을 밝혔고, 그의 이마 위 변환석을 발견했을 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차갑게 식은 손끝을 두려움으로 벌벌 떨어 가며.

“위대한 표범 신수 일족을 뵙습니다!”

공포로 차마 얼굴조차 들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 블론디나가 에이몬을 격 없이 대하자 달달 떨면서도 은근슬쩍 다가왔고, 몇 달인 지금은 새끼 표범을 아주 완벽히 귀여워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를 위해 쿠키를 열심히 챙겨 왔으니.

둘은 이내 마주 앉아 주사위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에이몬 님은 왜 안 오시는 걸까요?”

에이몬의 방문은 늘 비정기적이었다.

일주일 내내 놀러 오는 경우도 있었고, 열흘 동안 꼬리 한 번 보이지 않다가 사냥하듯 기습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보름 동안 블론디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글쎄. 왜 안 올까……. 궁금해, 루시? 매일 신경질만 내는 표범이 뭐가 좋아서?”

물론, 자신의 눈에는 에이몬의 툴툴거림마저 너무도 사랑스러웠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루시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외모가…… 귀엽고…… 너무너무 귀엽고…….”

루시가 부끄럽다는 듯 어물어물 답했다.

“맞아. 에이몬이 귀엽게 생기기는 했지. 털 색도 반지르르한게 새까맣고 눈도 반짝거리고. 눈동자에 꼭 보석 박힌 것 같아, 그치?”

떼구루루, 주사위 구르는 소리 틈으로 두 여자아이는 다정히 대화했다.

그때였다. 주사위판 위로 까맣고 뽀송뽀송한 발이 사뿐 내려앉았다. 새끼 표범의 작은 발이었다.

보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가 그림자같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난 작은 표범은, 주사위와 작은 표식을 앞발로 퉁퉁 내찼다. 이 몸이 등장했으니 어서 내게 주목하라는 듯.

데굴데굴 구른 주사위와 표식들이 테이블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에이몬 님?!”

루시는, 뻔뻔하게 등장한 에이몬을 향해 화색을 밝혔다. 하지만 곧 낯을 굳히고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작은 표범의 입에 무언가 물려 있던 탓이다. 무언가 아주 작고, 귀여운 그 무엇.

툭.

앞발을 휘저으며 제 앞을 깨끗이 치운 에이몬이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떨궜다.

오다 주웠다. 마치 그런 식으로 선물하듯.

동시에, 루시가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악! 참새! 참새가!”

에이몬이 뱉어 낸 건 참새 한 마리였다. 자그맣고 배가 통통한 참새.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생명체.

파르르 떨리는 루시의 손이 눈앞 광경을 보지 않으려는 듯 얼굴을 확 가렸다.

블론디나 역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름 만에 놀러 온 에이몬. 귀여운 새끼 표범. 그 입에 물려 있던 작은 참새. 그 참새가 지금 제 앞에 톡 떨어져 있다.

블론디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 보니 방앗간 아주머니가 그러셨었다. 뒷골목 줄무늬 고양이에게 밥을 몇 번 챙겨 주었더니 죽은 생쥐를 물고 왔었다고.

고양이 나름의 깜찍하고도 끔찍한 보은이라나.

‘혹시 에이몬이 선물로 물어 온 걸까?’

고양이 아니야! 라고 앙칼지게 말하더니, 하는 짓은 역시 고양이가 확실하지 않은가.

블론디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참혹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참새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루시는 이미 창 쪽으로 달아난 뒤였다.

소리 없이 테이블 위를 걸어온 에이몬이, 고개를 갸웃 기울여 블론디나를 올려다봤다.

「너 뭐 해? 눈 감고.」

블론디나의 반응이 재밌는지 귀가 살짝 쫑긋거리고 있었다.

「참새가 무서워?」

“무섭다기보다는…….”

무섭다기보다는 불쌍하지. 죽은 참새가.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고귀하시고도 대단하신 신수 일족께서 손수 참새를 잡아 오신 거다. 그것도 절 위해.

황송해하며 넙죽 엎드려야 할 판인데 그러기가 힘들다는 게 문제였다.

「인간들은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아?」

“음…….”

좋아하지. 귀여우니까. ……다만, 살아 있을 때.

어떻게 해야 에이몬이 상처받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이 나름대로 호의를 베푼 짐승을 이해시킬까.

블론디나는 나름대로 절실하게 고민했다.

「너 귀여워하잖아, 작은 참새 같은 거.」

“그게. 그렇긴 해. 그렇긴 한데.”

「그런데.」

“죽은 것보다는 살았을 때 보는 쪽이…….”

에이몬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갸우뚱 기울이며 블론디나를 올려다보다가 곧 시선을 내려 참새를 응시했다.

에이몬의 앞발이 참새의 통통한 배를 꼭 눌렀다.

「야. 일어나.」

“…….”

참새를 향한 명령 같았다.

물론 참새는 답하지 않았다. 죽었지 않은가.

하지만 에이몬은 귀여운 목소리로 깡패같이 말을 이었다.

「야. 일어나라고.」

“…….”

여전히 참새는 침묵했다. 가만히 참새를 내려다보던 에이몬이 발톱을 내밀어 테이블을 드르륵 긁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지막 경고가 울렸다.

「그렇게 계속 죽은 척하다가 진짜로 죽는 수가 있어.」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네!”

죽었던 참새가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것도 하이톤의 목소리로 인간의 말을 버럭 외치며.

블론디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봤다.

에이몬이 참새를 물고 온 것도 신기했고, 참새가 죽은 척했다는 것도 신기했고, 에이몬이 참새를 협박했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 말을 듣고 참새가 일어난 것도 신기했다.

「자. 이제 저 여자애랑 놀아.」

에이몬이 참새 머리를 앞발로 꾹 누르며 말했다.

참새는 다시 “네, 에이몬 님!” 하고 대답하더니 블론디나 어깨로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블론디나는 어색하게 굳은 채 눈만 굴려 참새를 힐끗거렸다.

귓가에 짹짹거리는 참새 목소리가 울려 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그쪽이 싫어서 죽은 척한 게 아니라! 진짜로 아팠거든요! 아시다시피 에이몬 님 이빨이 워낙 뾰족해서 움직이다가 진짜로 찔릴 수도 있고! 또! 솔직히 여기 오는 게 귀찮기도 했는데! 그건 다시 말하지만 그쪽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참새의 말이 하도 길어져서 불론디나는 끝까지 듣는 걸 포기하고는 다시 에이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작은 표범은 입꼬리를 올리고 턱을 약간 치켜든 채였다.

자. 어서 날 칭찬해. 선물 고맙다고 해. 그리 말하는 듯한 당당하고 뿌듯한 얼굴이다. 꼬리가 살랑살랑 귀엽게도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말하는 참새가 생겨 어안이 벙벙하기는 했으나 우선은 에이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블론디나는 손끝으로 그의 턱을 슬슬 문질렀다. 오래간만에 만지는 보드라운 털이었다.

에이몬이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인사를 안 했구나. 안녕.”

그러자 에이몬 대신 어깨 위에서 통통거리던 참새가 답했다.

“네! 안녕하세욧!”

“…….”

넌 아까 인사했잖아……. 블론디나는 어색하게 손을 올려 칭찬하듯 참새의 목을 긁어 주고는 다시 에이몬을 향해 인사했다.

“에이몬, 오래간만이네. 요새 왜 안 왔어?”

「신성한 산을 방문하고 왔어.」

“신성한 산?”

「응. 거기에 가야 내가 힘을…… 자꾸 꼬치꼬치 캐묻지 마. 나도 모르게 대답하잖아.」

에이몬은 까칠하게 답하며 턱을 좀 더 들었다. 자, 어서 더 쓰다듬어. 더. 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