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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5화 (5/121)

# 5

#5화

곰보다 큰 체구,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파괴적인 힘, 신에 가까운 종족.

표범 신수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제왕이었다. 하찮고 나약한 인간 따위 감히 대적할 수 있을 리 없다.

본인은 그런 위대한 종족인 것이다.

쯧, 하고 혀를 찬 소년이 팔짱을 꼈다.

“고귀하고 존귀하신 이 몸보다, 아까 그 무식한 몸집의 인간이 더 두려워?”

“응. 우선, 그 기사는 몸이 컸으니까.”

“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난 한 손으로도 당장 그자의 심장을 움켜쥘 수 있다고.”

“어쨌든 보이는 건 로하디 경이 더 크잖아. 그냥 무서워.”

날 때렸던 여관 주인과 닮았거든.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대충 얼버무리는 말에 소년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녀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블론디나는 말을 돌렸다.

“이제 내 방으로 가자. 치료해야지.”

소년은 제 발목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미약한 미풍이 들었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블론디나가 고개를 내리자, 눈앞에 다시 까맣고 작은 짐승이 있었다.

짐승이 꼬리로 바닥을 탁탁 때렸다.

「발목 아프니까 안고 가.」

“…….”

블론디나는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내밀었다.

뾰로통하니 절 올려다보는 고양이, 아니 새끼 표범의 얼굴이 귀엽다. 귀여워 미치겠다. 하지만 그 속내를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손 위에 훌쩍 올라갔다.

블론디나는 제 방을 향해 걸으며 품속 짐승의 털을 살살 매만졌다. 보드랍고 간지러웠다.

한 손으로 심장도 빼낼 수 있다며 뻐기던 존재가 발목이 아프니 안아 달라니.

그 간극이 귀엽고도 웃겨 그저 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넌 이름이 뭐야?”

「에이몬. 에이몬 아킨.」

“난 블론디나야. 아까 들어서 알지? 하지만 브리디라고 불러도 돼. 우리 엄마는 날 그렇게 부르셨거든.”

「그래, 브리디.」

블론디나는 품 안 온기가 기분 좋아 콧노래를 불렀다. 에이몬이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미천한 인간은 감히 나와 눈도 못 마주치는데 말이야.」

“그럼 미천한 인간인 나와 친구 안 해줄 거야?”

「그건 아니고. 그 뜻이 아니야.」

에이몬이 졌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여자애였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손목만 앞발로 톡톡 내리치다가 새삼 놀랍다는 듯 꾸욱 눌렀다. 인간의 살결이 생각보다 매끄럽고 보드라웠다.

내 주위는 다 털투성이인데. 귀를 쫑긋거리며 블론디나의 팔뚝을 문지르고 매만지며 놀았다. 마치 꾹꾹이를 하듯.

블론디나가 키득 웃었다.

“간지러워. 그런데 너 정말 귀엽다. 발바닥 말랑말랑해.”

「…….」

에이몬은 앞발을 급히 떼고는 고개도 휙 돌렸다.

별궁으로 돌아온 블론디나는, 하녀에게 부탁해 연고와 붕대를 달라 했다.

깨끗한 물로 표범의 뒷다리에 엉겨 붙은 핏물을 닦았다.

피가 꽤 많이 말라붙어 있어 걱정했건만, 의외로 큰 상처는 없었다. 살짝 파인 생채기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큰 상처는 아니네. 다행이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뒷다리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으며 픽 웃었다.

흔적밖에 남지 않은 상처 때문에 안아 달라고 하다니. 그 행동이 퍽 귀엽지 않은가.

하지만 블론디나의 생각은, 반 정도 틀렸다.

블론디나가 처음 에이몬을 풀숲에서 마주했을 땐 큰 상처가 맞았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며 다리가 걸려 크게 찢어졌으니까.

그 탓에 한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애옹거리며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나.

그러나 애초에 신수인 이상 치유력이 탁월했다.

시간이 지나 블론디나의 궁 앞에서 기사 로하디를 만났을 땐 살짝 지끈거리는 통증만이 남았고 지금은 온전히 나아 버렸다.

다만, 진지한 표정으로 연고를 발라 주는 블론디나의 손길이 싫지 않은 에이몬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둔 것뿐이다.

“치료 다 끝났어. 벌써 해가 져버렸네. 어두운데 돌아갈 수 있겠어?”

오늘따라 구름이 많았다. 달빛마저 가려진 지상은 막막한 어둠에 감겨 있었다.

적막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흩뿌려진다.

에이몬은 붕대를 바라보며 높낮이 없는 음색으로 뻐기듯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매복과 공격. 탁월한 잠행 능력. 이게 우리 위대한 표범의 상징이라고. 밤은 내 시간이야.」

“그래? 그럼 조심히 가.”

위대하신 표범 신수라 하시니 별 위험은 없겠지. 블론디나는 그리 생각하며 연고와 붕대를 착착 정리했다.

부산스러운 그녀의 몸짓을 에이몬은 사냥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초리로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런 후 이내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댔다.

검은 꼬리가 살랑하고 움직였다.

「그냥 여기서 잘래.」

“응? 그래. 그럼.”

블론디나가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대번 나온 허락에 오히려 당황한 건 에이몬이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쉽게 허락을 해?」

“너? 귀여운 고양이.”

「…….」

이제 고양이가 아니라는 소리를 하기도 지쳤다. 에이몬은 신경질적으로 꼬리만 휙휙 흔들다가 흘리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난 원래 아무 데서나 자는 쉬운 놈이 아니라는 듯.

「넌 특별히 날 치료해 줬으니까 여기서 자주는 거야. 위대한 신수가 인간의 서식지에서 자는 건 지금이 처음일걸?」

“왜?”

「우린 인간하고 친하지 않으니까.」

“왜 안 친한데?”

「인간을 싫어하니까.」

“왜 싫어해?”

블론디나는 네 살 아이처럼 같은 반문을 계속했다.

에이몬은 애써 답을 짜내는 듯 앞발로 쿠션을 신경질적으로 틱틱 긁었다.

「인간에게는 교활하고 미련한 냄새가 나.」

“냄새? 내게도 나?”

블론디나가 제 팔목을 킁킁거리며 물었다.

맡아지는 거라고는 향기로운 향유 냄새뿐이다. 이젠 더러운 골목에서 뒹굴던 소녀가 아니라 황녀였으니까.

그게 저 예쁜 새끼 표범의 심기를 거스를 것 같지 않아 퍽 다행이었다.

「아니. 넌 괜찮아.」

에이몬이 쿠션에 제 턱을 올리며 답했다.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냄새란 게 어떤 냄새 말하는 건데?”

「있어, 그런 게. 인간 아이는 몰라도 돼.」

실제 향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짐승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향. 본능으로 읽을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냄새라 표현했을 뿐이다.

표범족이 만나는 인간은 대부분 황족이나 고위 귀족이었으며 그들은 대개 교활하고 교만했다.

분위기로 풍기는 악취. 짐승이기에 더욱 쉬이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드레스룸으로 들어와 보드라운 실크 슈미즈로 갈아입으며 ‘본능적인 향?’이라고 중얼거렸으나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은은한 조명을 켠 후 침대 대신 양탄자 위에 누웠다. 딱딱한 바닥에 익숙하니 침대보다 바닥이 편했다.

블론디나는 꼬물꼬물 움직여 에이몬이 누워 있는 쿠션 가까이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는 에이몬의 콧잔등을 슬슬 문지르자 에이몬이 눈 아래를 찡그렸다.

기다란 수염이 살짝 움직였다. 그마저도 귀엽다.

새끼 표범의 모습일 때 에이몬은 너무도 작고 귀여웠다.

위대한 표범 신수라고는 하지만 제 눈에는 검은 새끼고양이 같을 따름이다.

“에이몬.”

「왜.」

에이몬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심드렁히 답했다. 귀찮아하면서도 대꾸는 꼬박꼬박 해주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넌 몇 살이야? 난 열한 살인데.”

「아홉 살.」

“내가 누나네?”

「누나?」

에이몬이 픽, 하고 비웃었다. 누나 같은 소리 하네.

“아홉 살이면 성체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짐승이니까. 그런데 넌 아직…….”

「우리는 일반 표범과 달라.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되면 한 번에 커져. 그때 성년식 하거든.」

“그렇구나.”

일반 짐승은 아니니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그럼 이 귀여운 상태로 10년 정도는 더 있겠다는 거네?

왠지 기분이 좋아진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이마 솜털을 문질렀다. 손끝이 이마에 박힌 보랏빛 변환석을 살짝 스쳤다.

순간, 에이몬의 까만 털이 자르르 섰다. 날카로운 앞발톱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손을 급히 밀어냈다. 삐죽 나왔던 발톱을 황급히 숨기며.

「마, 만지지 마.」

“응? 기분 나빴어? 미안…….”

너무 친한 척했나 보다. 블론디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손을 뺐다.

에이몬이 그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제 변환석을 앞발로 문질렀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우리는 여기 예민해.」

“응? 무슨 뜻이야?”

「만지면 기분이 좀……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여기는 만지지 마.」

까만 새끼 표범 모습이니 다행이지, 소년 모습이었다면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을 것이다.

블론디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에이몬의 턱 아래를 간질이며 물었다.

“다른 데는 마음껏 만져도 돼?”

「……왜 말이 그렇게 되지?」

에이몬이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제 턱을 문지르는 인간의 손길이 싫지 않은지 눈을 감고 갸르릉거릴 따름이었다.

“그런데, 에이몬.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인간 서식지 근처에는 가까이 오지 않는다며?”

「아까 봤지. 그 점박이 애들.」

“응.”

「도망가는 걔네 쫓아오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런데 절벽에서는 왜 떨어졌어?”

「뒤가 낭떠러지인지 모르고 달려들다가 굴렀어. 바보 같은 실수였지.」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떼고 예쁜 짐승을 응시했다.

“같은 고양이인데 왜 사이가 안 좋아? 싸웠어?”

에이몬은 대답 대신 쿠션에 뺨을 비볐다.

흑표범. 자신이 흑표범으로 태어난 것이 애초에 문제였다. 이렇게 새까맣게 태어난 게 제 잘못도 아니었는데 표범 일족 대부분이 절 슬슬 피했다.

잔혹한 핏줄의 탄생. 500년 전 태어났던 흑표범이 그랬듯 에이몬이 자신들까지 죽여 버릴까 봐 겁을 낸 것이다.

신수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어리고 여린 아홉 살이다.

처음엔 외로웠기에 친구가 되고 싶어 다가갔고, 그 이후엔 친구가 될 수 없어 싸웠다.

그게 다였다.

억지로 성질을 숨기고 끼워 달라고 하느니 홀로 지내며 싸우는 편이 낫다. 애초에 제 성격이 그랬다.

「……그냥.」

그 말을 끝으로 에이몬은 하품을 하고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이제 잘 테니 말 시키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블론디나는 복잡한 얼굴로 에이몬의 귀여운 뒤통수를 응시했다.

뽀송뽀송하게 털이 난 동그랗고 까만 머리.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살살 쓸어내렸다.

에이몬이 귀찮다는 듯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실실 웃음이 나왔다.

‘진짜 귀엽네.’

조금 까칠하고 신경질적이지만…… 새끼 표범일 때는 귀엽고, 소년일 때는 예쁜 친구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 블론디나는 자꾸만 웃게 됐다.

그리고 이후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별궁을 제집 오듯 드나들었다.

맛있는 인간의 음식을 먹기 위해 오는 것뿐이야, 라고 앙칼지게 말하고는 했으나 이미 겉으로 보기엔 충분히 친구 사이였다.

블론디나는 새로 생긴 작은 친구가 퍽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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