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4화
블론디나는 대번 눈치챘다. 고양이의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걸.
고양이를 향해 조심스레 두 손을 뻗었다.
“우선 내가 사는 곳으로 갈래? 하녀에게 말해서 약과 붕대를 달라고 할게. 너 그대로 집에 가면 아플 거 아니야.”
고양이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블론디나가 내민 손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았을 뿐이다.
블론디나의 손바닥 위에 작은 고양이의 감촉이 닿아 왔다. 살짝살짝 맞닿는 작은 코와 살랑거리는 까만 털.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손등과 손바닥, 손날을 번갈아 가며 냄새 맡던 고양이는 이내 제 뺨을 블론디나의 손등에 살짝 비비더니 스스로 그녀 손 위로 훌쩍 올라탔다.
‘아……!’
따끈하고 말랑하고 보드라운 털 뭉치가 품에 안겼다.
블론디나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를 뻔하다가 목울대를 꿀꺽이며 감정을 넘긴 후 고양이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알아 둬. 치료만 하고 집에 갈 거야.」
“응. 그래. 우선 치료만 하고 가.”
「친구 한다는 건 아니야.」
웅얼거리는 고양이 목소리가 퍽 귀여워 블론디나는 가만히 웃었다.
“그런데 넌 고양이인데 어떻게 말을 하는 거니?”
「고양이가 아니니까.」
“고양이가 아니야? 그럼 뭔데?”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아주 놀라 자빠질 거라고, 너.」
블론디나는 품 안의 고양이를 멀거니 내려다봤다. 제 할 말을 마친 고양이는 눈을 감고 편히 안겨 있었다.
외로워 보여 충동적으로 친구가 되어 달라 했더니 제 품에 안겨 오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물론, 아직 친구가 된 건 아니었지만.
문득 아까 보았던 두 마리 점박이 고양이가 떠올랐다. 이 까만 고양이를 괴롭히던 녀석들.
사실 오지랖이었다.
두 황족에게 쪼임을 당하고, 아비가 없다며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던 제 모습이 이 고양이에게 투영되어 그냥 지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나 괴롭히던 애들은 엄마가 다 혼내 줬었는데…….’
엄마.
잊고 있던 가시가 다시 심장을 찔러 왔다.
자신이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듯 절 품에 안아 주시던 어머니. 모든 게 낯선 것투성이인 황궁에 오자 그 언제보다 엄마가 그리워졌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듯 아련한 그리움이 스몄다.
환하게 웃어 주던 어머니의 얼굴과 뺨에 눌리던 입술. 추운 겨울, 초라한 침대에 누워 서로를 꼭 끌어안던 온기까지.
동시에 절 혐오스럽게 쳐다보던 황후의 표정과 절 표독스럽게 몰아세우던 황자와 황녀의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그게 자신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새삼스러운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슬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홀로 입꼬리를 꾹 내리고 있으려니, 고양이가 고개를 들어 아이를 올려다봤다.
깜빡깜빡. 고양이의 예쁜 속눈썹이 가만히 움직였다. 자주색 눈동자에 의문이 어린다.
「너 울어? 갑자기 왜?」
“아니. 안 우는데.”
「아니라고? 그럼 그 눈물은 뭔데?」
블론디나는 어? 하고 되묻더니 눈가를 매만졌다. 손끝에 뜨거운 물기가 닿았다. 눈을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모양이다.
괜찮은 척했으나 사실은 슬펐나 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으나 실은 서러웠나 보다. 지금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그 방증이었다.
“내가 울었구나.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
고양이가 눈물 고인 블론디나의 턱을 앞발로 톡 쳤다.
「거참 이상한 여자애네.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어.」
그 말에, 블론디나 역시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깊이 동감하는 바였다. 처음 보는 말하는 고양이에게 친구가 되자 하고, 치료하러 데려가면서 혼자 울고.
확실히 이상한 여자애가 맞았다.
별궁 앞에 다가서자 누군가 성큼 다가왔다. 번쩍이는 기사복을 입은 커다란 체구의 사내였다.
블론디나는 그에게 누구냐는 말을 묻기도 전에 숨을 들이켜며 발을 헛디뎠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체구가 절 때리던 식당 주인의 몸집을 똑 닮은 탓이다.
저도 모르게 품 안의 고양이를 꽉 끌어 안자,
「뭐야!」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고양이는 털을 한번 부스스 세웠다.
“미안. 미안해, 내가 큰 사람을 보면 좀 놀라. 정말 미안해.”
팔에 힘을 푼 블론디나가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사과했다.
고양이는 대답 대신 꼬리로 그녀의 팔뚝을 툭툭 때렸다. 불만의 표시인 듯싶었다.
물론 힘이 실린 공격은 아닌지라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마치 커다란 강아지풀로 맞는 느낌이었다.
그들 앞에 서 있던 기사가 블론디나를 향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저는…….”
하지만 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블론디나 품 안의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말을 내뱉는 대신 불안한 호흡을 들이켠 것이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고양이를 살피고 그 이마에 난 자주색 보석에 시선을 박았다.
머지 않아 커다란 고성이 터져 나왔다.
“위대한 표범 신수 일족을 뵙습니다!”
거대한 몸이 풀썩 땅 위로 납작 엎드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블론디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이다.
얼어 버린 블론디나 품에서 고양이가 풀쩍 뛰어내렸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내린 건 까만 짐승의 발이 아니었다. 뽀얗고 깨끗한 인간의 발이 바닥을 내디디며 가볍게 착지했다.
어디서인가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빛이 단정하고 말간 얼굴 위에서 반짝거린다. 검은 머리카락이 매끄러운 이마를 살랑거리며 덮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호흡을 멈출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이, 탐스러워 보이는 붉은 입술로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웃었다.
“내가 고양이 아니라고 했잖아.”
빛나는 자수정 색 눈동자가 블론디나를 돌아보며 짓궂게 웃고 있었다.
열 살 정도 됐을까. 눈앞의 소년은 소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미색이었다.
자르르하게 빛이 흐르는 천이 소년의 몸을 우아하게 감싸고 있었다.
신관복 비슷한 디자인의 옷이 소년의 고아한 얼굴과 매우 잘 어울린다. 기다랗게 내려온 가운 아래 살짝 보이는 복숭아뼈조차 보기 좋았다.
“…….”
블론디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직 어린 열한 살 소녀였으나, 제 또래 아름다운 남자아이를 보자 입이 절로 벌어진 탓이다.
심지어 눈앞의 소년이 방금까지 제 품에서 솜방망이를 날려 대던 고양이라는 사실까지 잊을 정도로.
보송보송한 까만 털은 빛을 내는 흑발로, 반짝이던 보랏빛 눈동자는 소년에게 보석처럼 박혔다.
소년이 고개를 기울이며 기다란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인간?”
블론디나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고양이가 인간이 된 게 영 꿈 같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애초에 고양이가 사람 말을 한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아까는, 이곳이 황궁이기에 신기한 것도 많다고 쉽게 생각했었다. 고양이에게 마법이라도 걸렸나 보다, 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걸까.
블론디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고양아.”
“고양이 아니라니까.”
“다리는 괜찮아? 너 뒷다리 다쳤는데 두 발로 서 있잖아.”
그 질문에 소년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거야?”라고 블론디나가 되묻자 머쓱한 표정으로 앞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살짝 아프긴 하네.”
목 안으로 삭여 드는 작은 목소리였다.
블론디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귀엽다. 소년으로 변했어도, 저 모습을 보니 알겠다. 저 소년은 방금까지 제 품에 있었던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맞았다.
그 시각, 바닥에 엎드려 있는 기사는 언제 몸을 일으켜야 할지 몰라 눈알만 굴렸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황녀 품 안에 안긴 자그마한 동물이, 포악하고 잔인한 표범 신수 일족이라는 걸.
더군다나 그중 최악으로 잔악하다는 흑표범이다.
비록 새끼이고 어리기는 하나 신체 능력은 인간인 절 한참 뛰어넘었을 게 분명하다.
얼마나 이마를 땅에 박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슬그머니 눈을 올려 위를 바라보자 소년이 제 발목을 가리키며 소녀를 향해 엄살 피우듯 툴툴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시선을 느꼈을까. 블론디나가 시선을 내렸다. 그런 후 저도 모르게 다시 힉, 하고 뒤로 물러섰다.
정신을 차려 보니, 큰 몸집의 사내가 자신 앞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의 체구가 상기되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얘한테 정신 팔려 저 기사를 잊고 있었네.’
블론디나는 소년 뒤로 급히 숨었다. 소년은 고개 돌려 블론디나의 표정을 살폈다.
블론디나가 말했다.
“여긴 무슨 일로 왔나요? 아니, 무슨 일로 왔지?”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폐하의 명으로 황족의 팔찌를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그가 손만 조심스레 내밀어 무언가를 꺼냈다. 황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팔찌로, 황제와 만났을 때 받아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쿠키 박스 전하듯 건넬 물건이 아닌 고귀한 황족의 징표. 하지만 이것이 황제가 블론디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블론디나는 기사가 내민 상자를 받아 들고 발을 톡톡 굴렸다.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기사는 바닥 문양을 이리저리 관찰하다가 엎드렸던 몸을 겨우 일으켰다.
황녀가 일어나도 된다 했으니 일어나도 되겠지. 저 표범 신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까.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탓에 어서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기사가 등 돌리기 전, 소년이 툭하니 제 말을 밀어 넣었다.
“이봐, 인간. 내가 여기 있다는 거 흘리지 마. 귀찮아지니까.”
“……예!”
기사는 굳게 다문 입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입을 놀려 신수의 발톱에 찢기는 건 사양이다.
황족보다 더욱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가 바로 난폭한 신수 아닌가.
힐끔 소년의 표정을 살핀 그가 이내 허리를 숙인 후 자리를 벗어났다.
블론디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가고 나니 비로소 몸의 긴장이 풀렸다.
살짝 땀이 밴 이마를 문지르다가 소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소년이 자랑스레 턱을 치켜들고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자. 이 몸의 실체를 알게 된 소감이 어때?”
블론디나는 주저 않고 답했다.
“예뻐. 예쁘게 생겼어.”
“…….”
솔직한 블론디나의 말에, 소년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오만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복숭앗빛으로 살살 달아오르기 시작한 뺨이 남았다.
“그거 말고. 이 몸의 위대함을 알아차렸냐 이거야.”
블론디나는 그제야 옅게 웃었다.
“응. 사람이 됐네. 신기하다. 아까는 고양이였는데.”
“아니, 그것도 아니야. 그걸 놀라워하라는 게 아니란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소년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제 입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위대한 표범 신수 일족이야!’라는 말을 하기에는 영 멋이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