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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3화 (3/121)

# 3

#3화

“미천한 게 감히 먼저 자리를 피하려 해?!”

이제 블론디나는 한숨마저 나왔다. 사과해도 난리다. 황족이란 역시 평민의 몸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족속이었다.

그때 뒤에서 여자아이 한 명이 톡 튀어나왔다.

“라르트. 그만해.”

블론디나의 배다른 동생이자, 라르트 황자와 쌍둥이인 아델라이 황녀였다.

아델라이 황녀는 제 뒤에 있는 시녀를 우아한 손짓으로 떨어뜨린 후 블론디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라르트 황자보다 오히려 아델라이 황녀의 잠잠한 눈동자에 경멸이 더욱 깊게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언니도 이제 그만하도록 해.”

정적인 만류가 조용히 울렸다.

라르트 황자는 입을 꾹 다물었고 블론디나 역시 침묵했다.

라르트 황자와 아델라이 황녀. 쌍둥이라고는 하나 분위기나 생김새가 무척 달랐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오만한 표정으로 블론디나를 찬찬히 훑던 아델라이 황녀가 블론디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언니. 다시 한번 내 앞에서 황족, 아니, 라르트를 욕보인다면 가만있지 않겠어. 이런 식의 불쾌한 난동을 넘어가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블론디나는 가뜩이나 피곤한 심신이 더욱 피곤해졌다.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난 그냥 걸어가고 있었을 뿐이야. 갑자기 와서 혼자 화를 내고, 발을 구르고, 삿대질하는 상대를 지켜봤을 뿐이고. 불쾌한 난동을 부린 기억은 없어.”

아델라이 황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불쾌한 난동을 부린 건 라르트라는 그 소리인가?”

블론디나는 대답하는 대신 눈만 깜빡였다.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 정답을 말하는 순간 저 성격 나쁜 쌍둥이가 다시 길길이 날뛸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정말 이상한 쌍둥이 아닌가. 무슨 말만 해도 화를 내고 배배 꼬아 듣는다.

저런 건 아무래도 가정교육 문제가 확실한데, 아무래도 자신의 아버지인 황제는 가정 교육에 영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날 버렸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한편, 아델라이 황녀는 블론디나의 밋밋한 표정을 날카로운 표정으로 훑었다. 눈동자 안에 차가운 분노가 맺혀 있었다.

아까 라르트 황자를 상대할 때도 느꼈지만 저 블론디나라는 천한 것은, 침착한 척 비꼬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다.

‘만만히 봐서는 안 되겠어.’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가 저 역시 블론디나처럼 표정을 무감정하게 가꾸었다. 흥분하면 꼭 제가 진 것같이 느껴져서.

“아무튼, 블론디나 황녀. 아니, 언니. 앞으로 행동 똑바로 해. 괜히 설치고 다니면서 황족의 명예 실추시키지 말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위엄 있게 경고를 보냈다.

블론디나는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황족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건 자신이 아닌 저 둘 같았으나 입 밖에 내면 크게 화를 낼 것 같아 계속 참기로 했다.

“그래, 알겠어.”

블론디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그 선한 미소를 보자 라르트 황자는 이상하게 자꾸 약이 올랐다.

“그게 알겠다는 표정이야? 너 지금 나 비웃고 있지?!”

정답! 블론디나는 의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웠다. 표정으로 말하는 긍정이었다.

입술을 꽉 물었다 뗀 아델라이 황녀가 이내 날뛰기 시작하려는 라르트 황자를 붙들고 뒤돌았다.

“가자, 라르트. 어울려 봤자 우리 격만 떨어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델라이 황녀의 광택 흐르는 드레스가 점점 멀어져 갔다.

어느새 푸른 잔디 위에는 블론디나만 남았다.

“……이상한 애들이네.”

어깨를 으쓱한 블론디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뒤돌았다. 이제 좀 쉬고 싶었다.

블론디나는 별궁까지 홀로 걸었다.

별궁은 본디 별 볼 일 없는 나라의 사신이 오면 묵게 하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멀찍이 떨어진 본궁들과는 달리 사냥터에 인접해 있었으며 화단도 화단이라기보단 들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곱게 깔린 튤립도 지나고 덩굴진 장미 화단도 지나니 여기저기 야생적으로 무리진 나무 군락과 쭉쭉 뻗은 나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방금 마주했던 쌍둥이를 떠올렸다.

만나서 반갑다며 환영 파티를 해주리라 생각한 적은 없으나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는데.

‘날 만든 건 자기네 아빠인데 왜 나한테 난리야. 난 그냥 태어나기만 했는데.’

문득 억울함이 치솟았으나 이내 가볍게 웃었다.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공처럼 뻥뻥 차이고만 살았는데 이까짓 불청객 취급이 대수랴.

잡다한 생각과 함께 열심히 발을 놀릴 때였다.

애옹.

어디서인가 고양이 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몇 걸음 떨어진 수풀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블론디나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야옹야옹.

물기 어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주저 없이 수풀 앞으로 다가가 그 안을 뒤적거렸다.

몸을 웅크린 채 절 향해 하악거리고 있는 작고 까만 생명체가 보였다.

아…… 예뻐라.

자주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절 노려보고 있는 짐승.

뒷다리를 다쳤는지 움직이지는 못하고 경계만 하고 있었는데, 생긴 것만은 천사같이 귀여운 새까만 새끼 고양이였다.

이마에는 눈동자 색과 같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고양이의 다리 상처를 보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신기한 고양이네.”

「고양이 아니야.」

이를 드러낸 고양이가 앙칼지게 말했다. 깜짝 놀란 블론디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흠칫 물러났다.

마법인가?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하다니……! 아무래도 마법에 걸린 고양이가 틀림없었다.

평민이었던 자신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 아닌가. 심드렁하게 느껴졌던 황궁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양이가 말을 하네?”

「고양이 아니라고.」

“그런데 귀엽네?”

「이거 말이 안 통하는 꼬맹이잖아?」

까만 고양이가 꼬리로 땅을 탁! 탁! 때렸다. 그 신경질적인 몸짓에 나뭇잎 부스러기가 옅게 일었다.

블론디나는 놀라는 중에 그저 웃었다.

말이 안 통하는 꼬맹이라니. 새끼고양이가 하는 말치고는 참으로 까칠하고 귀여웠다.

“다리 다쳤어?”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플까 봐 그러지.”

손을 조심스레 내밀어 뒷다리를 살펴보려 했다. 우선 말하는 고양이에 대한 의문보다 걱정이 앞선 탓이다.

고양이는 하악거리며 털을 세웠다가 앞발로 블론디나의 손등을 탁 내리쳤다. 물론 아프지는 않았다. 귀여운 솜밤망이다.

하지만 귀엽다고 하면 다시 이를 드러낼 것 같아 입술을 꼭 깨물고 표정을 애써 참아 냈다.

라르트 황자와 아델라이 황녀 때문에 마음에 맴돌던 불쾌함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어쩌다 다친 거야?”

고양이는 대답 대신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수풀 뒤로 그리 높지 않은 절벽이 있었다. 중간에 나무 하나가 비죽 나와 있었는데 한쪽 가지가 살짝 꺾여 있는 것을 보니 그쪽에 부딪친 모양이다.

저기서 떨어졌나 보구나.

블론디나는 다시 고양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은근슬쩍 손을 뻗었다.

다시 상처를 살펴보려는 순간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리를 일으켠 블론디나가 수풀 너머를 응시했다. 점박이 고양이 두 마리가 흠칫 놀라더니 큰 나무 뒤로 우다다 몸을 숨기는 모습이 보였다.

“흐음.”

블론디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저놈들이구나. 저놈들이 괴롭혔구나.

어릴 적, 절 괴롭히던 남자애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도랑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때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어나자 남자애들은 놀란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었다.

지금 저 고양이들 태도가 딱 그 남자애들 같다.

블론디나가 새끼 고양이들을 향해 찬찬히 다가갔다.

고양이들은 히익, 하며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마구 뛰어다니다가,

“너희 잠시만 이리 와볼래?”

블론디나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나지막한 블론디나의 목소리에 왜인지 짐승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힘이 실려 있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의 말 따위 들을 필요 없는 건데.

바닥에 납작 엎드린 새끼 고양이들이 꾸물꾸물 블론디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그들이 다가오자마자 상체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 너희도 내 말 알아듣지?”

「……야옹.」

못 알아듣는 척 애옹거리고 있으나, 블론디나는 눈빛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분명 제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죄책감이 섞인 울음소리에서 대번 느껴졌다.

아. 귀엽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는데, 다리 다친 까만 고양이를 생각하니 다시 미소가 사라졌다.

“혹시 너희가 저 까만 고양이 괴롭혔니?”

고양이는 말없이 블론디나 표정만 살피더니 다시 수풀 너머로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블론디나는 수풀 위로 삐죽 나와 살랑거리는 꼬리를 향해 말했다.

“둘이서 하나 괴롭히면 안 돼. 그건 정말 치사하고 못된 행동이야.”

불현듯 아까 두 명의 황족 아이가 절 괴롭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다. 다친 까만 고양이에게 유독 신경이 쓰이는 건. 자꾸 저같이 느껴져서.

「쟤, 쟤가 우리 꼬리 물어뜯었어!」

수풀 안에서 귀여운 변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블론디나의 등 뒤에 있던 까만 고양이에게서도 신경질 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너네가 먼저 뒤에서 나 덮쳤잖아!」

「넌 강해서 깨물어도 아프지도 않잖아!」

변명하는 듯한 대꾸에 까만 고양이가 휙 튀어 올랐다. 아무래도 저 두 고양이를 응징하러 가려는 것 같았다.

블론디나가 까만 고양이의 꼬리를 다급히 붙들었다.

다친 다리로 움직이면 더욱 아플 뿐이다. 여관 주인에게 많이 맞아 본 블론디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정해, 고양아. 움직이면 피 더 나.”

「고양이 아니라니까!」

그사이 두 점박이 고양이가 후다닥 도망가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그 고양이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 질렀다.

“그냥 가는 거야? 나중에라도 꼭 사과해야 해, 응?”

저 멀리서 미약하게 냐옹! 하는 소리가 났다. 알겠다는 대답인지 싫다는 거부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두 고양이가 온전히 멀어지자, 블론디나는 그제야 검은 고양이를 향해 다가갔다.

고양이는 아직 씩씩거리며 꼬리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곧 블론디나가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내려 고양이를 응시하자 고양이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인간, 처음으로 가까이 마주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조금 신기한 듯싶었다.

“나랑 가자, 고양아.”

「싫어.」

하지만 함께 가자는 블론디나의 제안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 다리로 혼자 어떻게 하려고. 내가 치료해 줄게.”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을 내가 왜 따라가.」

“그럼 누군지 알면 돼? 난 블론디나라고 해. 블론디나 륜 아테스.”

「네 이름 따위 궁금하지 않아.」

고양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블론디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랑 친구 하자. 어차피 친구도 없지 않아?”

「누가 그래?! 이 불쾌하고 건방진 인간!」

고양이가 콧잔등을 올리며 갸르릉거렸다. 사실이었기에 더욱 약이 오르는 표정이었다.

블론디나는 속으로 답했다. 그냥 네 눈빛을 보니 알 수 있었어, 라고. 이래 봬도 뒷골목을 구르며 배운 눈치다.

“나랑 친구 해주면 안 돼? 나는 혼자거든.”

「…….」

시무룩한 블론디나의 목소리에 고양이의 수염이 움찔거렸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새로 생겼는데 날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 뭐,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심지어 나랑 배다른 형제는 나 되게 싫어한다? 아까도 그냥 막 화냈어.”

블론디나는 웃음기 섞인 얼굴로 제 슬픔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동정심에 호소하기 위해 들이민 말이기는 했으나 사실 그다지 비참하지는 않았다. 이미 외로움과 핍박에는 익숙해진 지 오래니까.

“그러니까 나랑 친구가 돼줘. 같이 놀자.”

고양이 귀가 다시 쫑긋 섰다. 블론디나의 속내를 살피는 듯한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꼬리를 느릿하게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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