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78화 (79/171)
  • 제78화. 비극의 서막 (5)

    데릭의 눈동자에 희열이 들어차는 동시에, 제라니아는 손을 거두었다. 그저 덤덤한 여인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어 셀리나는 꼿꼿이 등을 펴고 남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래도, 좀 다르려나 싶었다. 결론이 바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셀리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래도 결국 이 자리지.

    태어나고서부터 평생 동안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 그렇게 살기엔 셀리나는 겁이 많았고 무엇보다 두려웠다.

    보장되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 또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가문에 해가 되는 것이.

    데릭을 포기한다는 건 그 개인을 포함해 왕실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자신이 여기서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가문과 왕실의 사이에 금이 가게 된다.

    그걸 다 알면서도 제게 행복을 우선하라 하는 제라니아의 마음이 고마웠지만, 사실 그 이전의 문제였다. 자신은 가시밭길이 예상되는 길을 선뜻 걸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나도 너처럼 특별했다면, 그러면 조금은 달랐으려나.

    이렇게 미련하게 굴지는 않을 수 있었을까.

    “셀리나.”

    격식을 차리지 않은 날것의 호칭이 제라니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데릭을 따라 나가려던 셀리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제라니아가 한마디를 남겼다.

    “제대로 대화를 해.”

    염려하는 마음이 묻어나는 차분한 음성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을까. 제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는 셀리나의 등 뒤로 하나로 땋은 검은색 머리칼이 풍랑처럼 물결쳤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크리스토퍼 경, 듣던 대로 훤칠하시군요. 공작 각하를 많이 닮으셨습니다.”

    시끄러워.

    “몰렌 산맥에 아직 미개발된 탄광이 수두룩하다던 소문이 있는데, 아직 개발 권한이 없다면 저희와 계약하시는 것도….”

    그런 건 아버지한테나 묻지 왜 자신에게 말한단 말인가?

    한껏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노인을 마주하며 크리스토퍼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한참 동안 철광에 관해 떠들던 상대는 한껏 올린 입꼬리에 경련이 올 즈음이 되어서야 물러났다. 겨우 무표정을 되찾고 크리스토퍼는 목을 죄던 예복의 단추를 하나 끌렀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파티 자리에 도대체 자신이 왜 나와야 하는가. 루크, 이 자식. 의무를 방기하고 자리를 피한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크리스토퍼는 이를 갈았다. 돌아오면 제대로 훈련이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슬슬 구석으로 빠졌다. 시끌시끌한 분위기를 피해 발코니가 있는 쪽으로 향하자 이제는 작게 시시덕거리는 소리들이 귓가를 깔짝였다.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쪽으로 향하는 발코니의 커튼을 걷어냈다가, 도로 닫았다.

    “뭐 해?”

    반문과 함께 커튼 뒤에서 하얀 손이 뻗어져 나와 크리스토퍼의 팔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떼어낼까 하다가도 그건 그것대로 유난이다 싶어 크리스토퍼는 말없이 끌려갔다. 안에 들어서자 우아하게 틀어 올린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칼리아 바이첸.

    단어만으로도 제 혀를 까끌거리게 하는 상대였다.

    난간에 기대어 선 채 제 쪽을 힐끗 돌아보는 칼리아에게 크리스토퍼는 변명조로 답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혼자 있는데 소리를 왜 내겠어. 눈에 띄고 싶은 것도 아닌데.”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화려한 미모를 생각하면 재수 없게 들릴 법도 했지만, 크리스토퍼는 저게 진심임을 알았다. 그런 면은 동생인 제라니아와 비슷했다. 극과 극처럼 보이는데도 사이가 좋은 건 그래서일까.

    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넓은 정원을 내다보는 옆모습이 아름답고도 고독해 보였다. 그가 껄끄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크리스토퍼는 기꺼이 선객의 호의에 기대기로 했다.

    칼리아와 거리를 두고 난간에 기대자, 깨작깨작 귓가에 들리는 말소리와 웃음소리만이 귓가에 희미하게 겹쳐 울렸다.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며.”

    나직한 음성이 꺼내드는 화제에 크리스토퍼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게 단지 안 좋은 일이라는 말로만 치환될 수 있는 일일까, 모르겠다.

    “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그 정도 걱정은 할 수도 있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는 칼리아의 옆얼굴을 크리스토퍼는 살짝 힐끔거렸다.

    확실히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인데, 어째서 이토록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을까. 그를 대신해 불편한 감정이 제 마음속을 좀먹어 간다.

    여기 있기로 한 게 괜찮은 선택이었을까.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피하지 마, 크리스토퍼.”

    마음을 읽었다는 양 칼리아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크리스토퍼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피한 적 없습니다.”

    “웃기네. 원래도 엄청 예의를 차리긴 했지만, 내가 고백한 뒤로는 더 심해졌잖아.”

    “…어색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너를 좋아해, 크리스토퍼.’ 절대 엮일 리 없다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늘 고고하던 얼굴에 붉은 물이 드는 걸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가 있습니다.’

    ‘알아.’

    맑은 웃음소리가 상념을 깨치고 들어왔다.

    “어색하게라도 여겨주니 다행이네.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으면 그게 더 상처였을 거라서.”

    “떠들고 다닐 생각 없습니다.”

    칼리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아. 감정 정리하려고 했던 얘기였기도 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불가능한 소리였기에 크리스토퍼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왜 이제껏 제라니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겠는가. 칼리아의 고백을 듣고 나서 새삼스레 실감했다.

    제라니아가 제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할 바에는, 평생에 걸쳐서라도 숨기고 가겠다고.

    고백 때문에 어색하다는 걸 제외하면, 크리스토퍼는 칼리아를 싫어하지 않았다. 제라니아에게 느끼는 특별함과는 다르지만 좋은 교류 상대라는 건 인정했다.

    그저 꽃처럼 화려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눈치도 빠르고 타인을 배려하는 면모 역시 있었다. 사실 제 마음을 제하고 본다면 과분하다고 할 수 있는 상대였다.

    “제 어디가 마음에 드신 겁니까?”

    “이제야 그게 궁금해졌어?”

    크리스토퍼를 돌아보는 칼리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살짝 삐져나온 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칼리아는 말했다.

    “여러 가지 있지만…. 사랑이 실존한다는 걸 믿게 만드는 점?”

    “네?”

    “그러니, 가망이 있으면 그것대로 곤란해.”

    알쏭달쏭한 말만 내뱉은 칼리아가 당황하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곱게 휘어지는 눈가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피학적인 취미가 있습니까.”

    “너무 가감 없이 질문하는 거 아니야?”

    어때 보이는데, 운을 떼며 칼리아는 고양이처럼 새침한 얼굴을 했다. 이런 일엔 유독 말주변이 없는 만큼 크리스토퍼는 속절없이 칼리아에게 휘말렸다. 한참을 놀림당한 다음 그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참 많이 닮았다고.

    * * *

    제라니아를 위한답시고 밖으로 나온 건 좋았는데, 프란츠는 곧 제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인지했다.

    갈 곳이 없었다.

    시간을 때우는 일도 친한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거였다. 일을 하느라 바빠본 적은 있어도 사적으로 사람을 사귀어본 적이 없는 그는 잠깐 낭패감에 젖었다.

    그는 예전에 홀로 머물던 숲으로 향했다. 오솔길을 걸어 자주 머물렀던 커다란 나무 아래로 향하자, 이미 와 있던 선객이 그를 맞이했다.

    “…오라버니?”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저 없이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발음만은 유독 정확했다. 그늘 아래에 앉아 있던 아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프란츠는 손짓으로 제지했다.

    주춤거리는 아일라의 옆자리로 가 앉자, 쏴아아- 바람을 타고 푸른 잎사귀들이 하나둘씩 프란츠의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이 고목 역시 계절의 변화를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넓게 퍼져 있는 나뭇가지 사이사이가 이가 빠진 듯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프란츠를 향해 아일라는 무릎걸음으로 걸어왔다. 꼬물거리며 제 손을 붙잡는 작은 손가락을 프란츠는 내버려 두었다.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소녀가 손바닥에 글자를 깨작였다. 소문이 이 아이의 귀에까지 들어갔는가. 제 얼굴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고 프란츠는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래.”

    [도대체 왜 해명을 제대로 안 하는 건데요? 왕궁에 오라버니를 욕하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는데도요.]

    “어차피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까. 의미 없는 일이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아일라가 한껏 볼을 부풀렸다. 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프란츠는 보지 못했다.

    [의미가 없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요?]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말에 프란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부드럽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선연한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래도 말하는 게,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마음이라도 편하잖아요. 세상에 아주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이렌스가 그랬어요.]

    “글쎄.”

    [애초에 소문부터가 말이 안 된다고요. 오라버니가 아버지…. 국왕 폐하께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선뜻 단언하는 아일라의 태도에 프란츠는 여상한 투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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