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77화 (78/171)
  • 제77화. 비극의 서막 (4)

    어렵기는 했으나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혼을 걱정하던 자신이 이제는 친구에게 이혼을 권하고 있는 이 상황이 못내 우스웠으나, 제라니아는 애써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뒤는 내가 봐주겠다며 제라니아가 우스갯소리를 던지자, 셀리나는 불그스름한 눈가를 휘어 웃었다.

    “너의 그런 면을 좋아해.”

    “응?”

    “이혼이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있는, 그런 점.”

    결혼한 귀족 여성에게 이혼이란 더없이 수치스러운 일에 속했다. 그 사유가 남편에게 있다면 그의 마음을 붙들지 못한 여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통념이 강했고, 아내에게 있다면 더욱이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

    터부시되는 것들을 입에 담고자 한다면 그만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놀랍고 부러웠다. 자신은 그럴 수 없는 길을 가는 네가.

    “도와달라고 말하면, 도와줄 거야?”

    애처롭다고 해도 좋을 미소였다. 고작 그 짧은 질문에 제라니아는 한참 동안 답을 잇지 못했다. 속을 모를 얼굴을 한 셀리나에게 제라니아가 되레 질문했다.

    “그럼 넌?”

    “…….”

    “도와주겠다고 하면, 내가 하잔 대로 할 거야?”

    이번엔 셀리나의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망설이는 기색이 그의 얼굴 위로 가득 드러났다. 물끄러미 그를 탐색하듯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데릭 전하께서는 어디 계셔?”

    “일이 많아서, 오늘은 밖에서 주무시고 온댔어.”

    “그래.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손님방에서 자고 가.”

    “고마워.”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곱게 펴며 셀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를 불러 셀리나를 방으로 보내는 제라니아의 얼굴이 착잡했다.

    “안녕하십니까, 비전하.”

    왔구나.

    제 옆으로 다가온 갈색 머리칼의 미남자를 올려다보던 제라니아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고 손등에 정중한 입맞춤을 남기면서 데릭은 눈가를 휘어 웃었다. 그 미소가 셀리나와 자못 닮아 있었다.

    세자궁의 응접실 한복판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걸음쯤의 공백이 둘 사이를 메웠다.

    “다름이 아니라, 제 아내를 데리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입니다.”

    “…소식이 참 빠르시네요.”

    어젯밤 이후 이제 정오가 넘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이 사람의 곁에 붙어 있다던 남자를 정말 파봐야 하나, 속으로 그런 고민이나 중얼거리면서도 제라니아의 얼굴에 씌워진 미소는 견고했다.

    “왕자비께서 먼저 이쪽을 찾아오셨습니다. 처소에 혼자 남고 싶지 않으시다더군요.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며칠 정도 그분을 저희 쪽에 머물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그래, 당연히 안 되겠지.

    “비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작금의 상황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비전하께 당치도 않은 오해를 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주를 담은 듯 우아한 적색 눈동자에 뻣뻣하게 굳은 제라니아의 얼굴이 비쳤다. 제라니아는 뒷목을 잡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고자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왕자비를 데리고 있겠다 말하는 것에 다른 꿍꿍이가 있다,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불쾌하다는 듯 제라니아는 한껏 크게 미간을 찌푸렸고, 데릭은 철 지난 연극의 광대처럼 과장된 표정으로 대답을 꺼냈다.

    “그럴 리가요. 고결하고 다정하신 분께서, 설마 그런 치졸한 짓을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무렇지 않게 못을 박는 그 뻔뻔한 태도에 제라니아는 기가 찼다. 자신이 셀리나를 데리고 인질극이라도 할 것처럼 굴어놓고 이런 대답이라니.

    정중한 척하면서도 자신을 깔아보는 듯한 시선이 꽤나 곤욕스러웠다.

    “왕자비께서는 아무런 강제 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머무르셨습니다. 독단적인 판단은 지양해 줬으면 하는군요.”

    제라니아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이 이상 프란츠에게 쓸데없는 소문이 붙는 건 곤란했다. 셀리나가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이건 다른 문제였다.

    이번 역모 문제에 프란츠가 얼마나 매달렸는지 제라니아는 잘 알고 있었다. 되도 않는 소문 따위에 휘말려서 놓아버릴 건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신경이 쓰였다.

    불쾌감이 전신을 파먹는 것처럼 피부를 따끔따끔 찔렀다. 눈앞의 상대에게 이토록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에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제라니아는 여상하게 웃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럴듯하게 올린 입꼬리와 달리 남자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생각했다. 결혼식에 갔을 때처럼 온건했던 적도 있는데, 어쩌다 이렇게 설전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된 걸까.

    단순히 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토록 깊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일까.

    “그래서, 비는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슬슬 이 무의미한 설전을 그만두고 싶다는 노골적인 어필에 제라니아는 팔짱을 끼고 살짝 턱을 들었다. 다소 오만한 자세를 취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글쎄요.”

    “…예?”

    태연한 대답에 데릭의 표정이 살짝 허물어졌고, 제라니아는 한 술 더 떴다.

    “생각해보니, 말씀하신 대로 제가 생각이 좀 많은 것도 같아서요.”

    “비전하.”

    “왜 그리 놀라시나요? 이런 반응을 아주 예상하지 못하신 것도 아닐 텐데.”

    매끄럽기 짝이 없는 미소를 선보이며 제라니아는 남자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것을 묵묵히 관망했다.

    어젯밤, 침대에 앉아 프란츠와 나누었던 대화가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두둥실 떠올랐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그래서, 도와줄 겁니까?’

    ‘이미 제 대답을 아시잖아요.’

    목 아래까지 꽁꽁 싸맨 새하얀 가운을 입은 채, 한참 말이 없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마 내일 데릭이 올 겁니다. 내가 있으면 분명 더 귀찮게 굴 테니 미리 나가 있겠습니다.’

    ‘나가 계신다고요?’

    ‘세자궁 한복판에서 소동을 피울 만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자는 아니니까요. 당신도 내가 관여하길 바라는 건 아니잖습니까.’

    선뜻 물러나겠다 말하는 프란츠의 의중이 쉬이 짐작 가지 않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제라니아의 심정을 프란츠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고민하고 있군요.’

    ‘내일 돌려보낼 거예요. 이미 그렇게 정했고, 그게 약속이었잖아요.’

    ‘…마음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경악하는 제라니아와 달리 프란츠는 지극히 태연했다. 나른한 어투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제라니아. 내가 보게 될 손해를 당신이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어떤 난장판을 벌이든, 그 정도 손해를 메우지 못할 만큼 무능하진 않으니까요.’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손해잖아요.’

    ‘당신도 그런 걸 계산하면서 나를 돕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는 제라니아의 뺨으로 손가락을 뻗었지만, 피부에 닿기 전에 손을 거뒀다. 묘하게 벽을 세우는 듯한 동작에 제라니아는 재빨리 프란츠의 손을 꼭 붙잡았다. 살짝 움찔거리면서도 그는 손을 빼내려 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조금 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도 됩니다. 나와 당신은 다르니까.’

    마지막 문장이 화살처럼 심장에 꽂혔다. 제라니아의 입술이 가만히 달싹이다가, 혀를 움직여 어떻게든 대답을 밀어냈다.

    ‘…다르지 않아요.’

    ‘…….’

    ‘물론 전하랑 제가 눈 코 입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머리카락 색부터 생김새까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자꾸 그러시면 저 화낼 거예요.’

    제 말이 그에게 닿았을까. 붙잡은 손에 제라니아는 가만히 힘을 주었다. 그 손을 힐끔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에 온화한 빛이 감돌았다.

    ‘왜 그런 눈을 하세요?’

    ‘상상해 봤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놀랐습니다.’

    ‘무엇이요?’

    ‘당신이 나를 위해 화를 낸다는 게.’

    무덤덤한 얼굴로 더없이 엄청난 말을 내뱉는 프란츠를 제라니아는 놀라 마주 보았다. 호수를 보는 것처럼 푸르고 깊은 눈동자, 그 위로 파문이 일듯 제 심장 소리가 귓가를 잠식했다.

    언젠가부터 프란츠는 이상해졌다. 제가 스스로 입을 맞췄던 그날 이후부터였을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을 만큼.

    뭐랄까, 그 말은 꼭. 그러니까.

    “…무얼 바라시는 겁니까.”

    데릭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상념을 털어내고 제라니아는 차분히 대답했다.

    “비전하께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 것 같던데, 그분의 의사를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존중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면서도 심란했다.

    알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 둘의 문제고,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셀리나가 원하지 않는다면 이런 조언조차 주제넘은 일일 뿐이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릭은 기가 차다는 듯 대답했다.

    “부부지간의 문제에, 간섭이 너무 심하신 것 같습니다.”

    “그분의 친우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보다 우선해야 하는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선택하는 건 제 몫이죠.”

    화가 난 것처럼 균열이 가는 데릭의 얼굴을 보니 통쾌하면서도 묘한 씁쓸함이 혀끝에 번졌다.

    “잠깐만요.”

    그 순간 차분한 음성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둘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응접실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문이 열리고, 창백한 안색의 셀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리나.”

    안도했다는 듯 데릭의 얼굴이 아주 약간 더 밝아졌고, 제라니아는 속으로 꽤 놀랐다. 그래도 셀리나를 걱정한 건 진심인가.

    봉오리가 개화하듯 주먹을 부드럽게 펼치며, 데릭은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데리러 왔어.”

    “…….”

    “돌아가자, 셀리나.”

    애잔한 시선에도 셀리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갈등하는 기색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셀리나는 도움을 청하듯 제라니아를 쳐다보았으나 그로서도 해줄 말이 없었다.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니까.

    평온해 보이는 녹색 시선이 선택을 종용하는 듯했다.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던 제라니아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두 개의 손이 푸른 망막에 고스란히 박혔다.

    ‘그럼 넌? 도와주겠다고 하면, 내가 하잔 대로 할 거야?’

    그 질문에 셀리나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제라니아 역시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셀리나는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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