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79화 (80/171)
  • 제79화. 비극의 서막 (6)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아일라가 프란츠의 손바닥을 다시금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그렇게 간단히 보내줄 리 없으니까.]

    “…….”

    지나치게 영리하구나. 고작 열두 살 된 제 이복동생을 내려다보는 프란츠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제 눈빛이 변한 걸 눈치챘을 텐데도, 겁먹지 않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머리를 그는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말을 조심하거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권력도 없는 후궁의 소생인 이 작은 소녀가 그의 계획에 위협이 될 리 만무했다.

    아일라의 금빛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며 그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겼다. 제법 조심스럽다 싶은 손길을 받으며 소녀는 미묘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오라버니는…. 가끔 잘 모르겠어요. 다정한 건지, 위험한 건지.]

    소녀는 말이 많았다. 아마 평범하게 자랐다면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쉬이 들을 수 있었을 터였다. 문득 떠올린 생각을 프란츠는 곧 지웠다. 자신이 이렇게 자라지 않았다면, 만큼이나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다. 지금 딛고 서 있는 현실만이 중요했다.

    “너보다 강하다 싶은 인간은 무조건 경계하도록 해.”

    [그런 점이 헷갈린다는 거예요.]

    비록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일라의 얼굴에 투덜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이 풍부한 점은 제라니아와 닮았다.

    제법 비슷한 환경을 가졌음에도, 지극히 부동심으로 자라난 자신과 달리 아이는 밝고 명랑했다. 사람을 키우는 건 환경이라지만, 이런 걸 보면 자신은 어쨌거나 지금 같은 성격이 되었을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건데요?]

    “저녁 식사 전까지.”

    [네? 지금 아침인데요?!]

    “…….”

    설명하기 귀찮았으므로 프란츠는 침묵을 선택했다. 하루 종일 여기 앉아 하늘만 바라본 적도 있으니 시간이야 순식간에 지나갈 터였다.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은 여인의 실루엣을 지워내려 애쓰며 프란츠는 한껏 제 눈동자에 푸른 하늘을 가득 담았다. 여유롭게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데도 신경이 쓰이고,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아득한 기분에 자꾸만 멀어지고 싶으면서도, 가장 가까이에 있고 싶기도 한 양가적인 감정이 공존했다.

    ‘마음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왜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건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민하는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아마 시간을 되돌린대도 똑같은 반응을 내보였을 것이다.

    이유를 찾다 보니, 터무니없는 생각 하나가 반짝 떠올랐다.

    사실 나는, 당신이 나를 이유로 무언가를 포기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아.”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샌가 또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제 상태를 깨닫고 프란츠는 헛웃음을 지었다.

    중증이었다.

    * * *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를 올리는 상대의 얼굴은 기억 그대로였다. 마시려던 찻잔을 내려놓고 아이렌은 눈가를 가리는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걷어냈다.

    “…티레인.”

    이게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일까. 그가 가문을 나간 뒤로 몇 년간, 그의 이름은 가문의 수치라고 노발대발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간간이 언급되는 정도에 그쳤다.

    갑자기 연락이 왔을 때는 꽤 놀랐다.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거절하지 않은 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서였다.

    “왜, 네 주군께서 정보라도 캐 오라 시킨 것이더냐.”

    집을 나간 이후로 그와 만났던 적은 손에 꼽게 적었다. 특히 이렇게 독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기가 차서 대답하는 아이렌에게 티레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몇 년 만에 대면하는 그는 변한 게 없었다. 밝고 능글맞으며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면모까지.

    “아니요, 그럴 리가. 그저 약간의 조언을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조언이라면.”

    “너무 깊게 파고들지 마십시오. 후작 각하는 누님의 생각보다 더 엄청난 일에 손댄 건지도 모르니까요.”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촉이 싸했다. 아버지란 작자는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처음에는 왕족을 암살하려고 불법 마법사 몇을 고용했거니,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파내면 파낼수록 그것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티레인은 생각했다. 자신이 좀 더 성실한 후계자였다면 이 정도로 조사가 난항에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아비란 자가 제게 방심하게 두었더라면, 오로지 그것만이 후회되었다.

    “더없이 쓸데없는 참견이군.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닐 텐데.”

    넌 이제 남의 사람이니까. 생략된 답을 알아듣고도 티레인은 능청스레 답했다.

    “걱정되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걱정. 그 단어를 듣자마자 기이한 감정이 아이렌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왕비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래? 그럼 묻지. 너는 언제까지 나를 그저 가련한 피해자로만 볼 셈이냐.”

    “…예?”

    “어째서 이 모든 게, 단지 아버지의 뜻이리라 여기는 건지 모르겠구나. 나 역시 야심을 가질 수 있는데 말이다.”

    언제까지 자신이 그가 알던 순진해빠졌던 여린 소녀라고 생각하는 건지. 얼이 빠져 있는 동생의 얼굴에 아이렌은 저열한 쾌감이 심장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버지의 부속물이 아니고, 내 아들도 마찬가지지.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 길을 선택했어.”

    제 아들인 이안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고, 수많은 정적을 제거했으며 왕궁 내부를 휘어잡았다. 정치를 하면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까. 힘이 없을수록 희생은 필연적이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누군가의 모습을 아이렌은 망설임 없이 지워버렸다.

    왕비의 얼굴을 한 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티레인이 입을 열었다.

    “이미 시작점인 결혼부터가 누님의 의지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온전히 당신의 뜻일 수 있습니까.”

    등을 떠밀려서 선택하는 것과 아무런 제약 없는 상태에서 선택하는 것의 무게가 같을 리가 없다. 그것을 지적하는 티레인의 말에 아이렌의 눈가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꽉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전히 그렇게 말할 거면서, 너는 어째서 그 자리에 있는 걸까.

    왕궁 생활은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기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철없던 시절, 왕비가 된다는 사실에 제게 질투심을 가졌던 비비와 달리 티레인만은 언제나 한결같았으니까.

    국혼이 결정되었을 때 그가 아버지와 몇 날 며칠 싸우던 모습이 여전히 뇌리에 선명했다. 권력을 위해 누이를 호색한에게 팔아넘기는 거냐며 소리 질렀다가, 후작이 던진 장식물에 맞아 팔을 꿰맬 때조차 그는 괜찮다는 양 웃었다. 그래서 자신은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주던 단 한 사람의 이해자. 그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렌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남색으로 보일 만큼 짙고 어두운 눈동자가 아이렌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그는 쾌활하고 밝은 사람이었지만 유독 눈의 색깔만은 차가웠다. 그 눈에 비치는 제 얼굴을 마주한 아이렌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라.”

    안타깝기 짝이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지 마!

    평정을 잃고 씹어뱉듯이 소리치는 아이렌을 속을 모를 눈빛으로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누님. 내가, 가문을 나가기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누님의 편일 겁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그렇게 말하고는 며칠 뒤 아버지와 갈라섰다. 지금도 그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내 편일 거라고 했으면서 어떻게 그 왕세자의 손을 잡을 수 있었는지.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당신이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경박하다 싶을 정도로 가벼운 평소의 말투 대신, 돌이킬 수 없는 맹세를 읊듯 엄숙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보데로아는 가라앉는 배입니다.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되는 법이니까요.”

    느릿하게 하고자 하는 말을 쏟아내며 티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왕비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존중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태양의 찬란함이 언제나 왕비 마마께 깃들기를.”

    진심 어린 축복을 내뱉으며 티레인은 눈가를 휘어 웃었다.

    * * *

    그렇게 계속, 평온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되묻는 제라니아에게 앞장서 들어온 기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셀리나 왕자비께서 시신으로 발견되셨습니다.”

    제라니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제라니아의 어깨를 프란츠가 재빨리 붙들었다.

    “그리고….”

    기사의 시선이 제라니아를 지나, 그 뒤에 서 있는 프란츠에게로 향했다.

    “전하께서 어젯밤 셀리나 왕자비와 접촉하셨다고 증언한 이가 있습니다. 조사를 위해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숫제 범인 취급 하는 듯이 딱딱한 어투로 선고하는 기사의 말에 프란츠는 짤막하게 답했다.

    “없다.”

    “그럼.”

    프란츠가 손을 내밀자 두꺼운 밧줄이 프란츠의 손목을 단단히 결박했다. 병사들에 둘러싸여 궁을 나서는 그를 붙잡으려던 제라니아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헛돌았다.

    “프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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