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76화 (77/171)
  • 제76화. 비극의 서막 (3)

    휘잉,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일부 걷어냈다. 아무도 없는 야외 통로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세자궁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들어설 때까지 둘은 조용히 걷기만 했다.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체계를 뒤엎을 생각이군요.”

    “정확하십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지금도 차고 넘칩니다. 아까의 그 종이를 봤을 때, 비전하께서 미혼이셨다면 전 당장 청혼했을 겁니다.”

    전하께는 비밀로 해달라 덧붙이는 덤덤한 목소리에 제라니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방울이 울리는 것처럼 고운 웃음소리가 적막 속에 흩뿌려졌다.

    저 멀리 통로 끝에 세자궁이 보였다. 침실 쪽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프란츠가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살짝 빠르게 하던 제라니아는 궁의 정문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저기요?”

    가까이 다가가서 묻자 드레스를 입은 뒷모습이 흠칫 떨렸다. 뒤를 돌아보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 제라니아는 깜짝 놀랐다.

    “…셀리나?”

    여기는 왜….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제 품에 뛰어드는 여인을 제라니아는 두 팔을 벌려 받아냈다. 저보다 분명 키가 큰데도 그 순간만큼은 저보다 어린아이 같았다. 제라니아의 옷자락을 붙든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손등 위로 따뜻한 온기가 겹쳐지는 것에 셀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제 얼굴을 가득 담은 선명한 녹색, 부드럽고 다정한 눈동자가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마셔.”

    셀리나를 이끌어 응접실로 데려온 뒤, 제라니아는 시녀를 시켜 서둘러 따뜻한 차를 내왔다. 제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두 손으로 조심히 집어 드는 하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셀리나는 얌전히 찻잔 위를 내려다보았다. 갈색 찻물에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제 얼굴이 흐릿하게 번졌다.

    “…밤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괜찮아.”

    제라니아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대답을 기다리며 그는 말없이 셀리나를 훑어보았다.

    원래도 하얗다지만 오늘따라 유독 창백한 안색과 떨리는 동공, 초조할 때면 입술을 깨무는 버릇은 여전했다. 푸른색 드레스 위로 걸친 하늘색 숄에는 꽉 움켜쥐었던 것처럼 옅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셀리나가 찾아온 것을 알렸을 때 프란츠는 상당히 언짢아했다. 자신과 둘이 있을 때 그가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보는 건 간만이라, 제라니아는 상당히 놀랐다.

    ‘돌려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그래요.’

    ‘이런 밤중에 찾아오는 사람치고, 귀찮지 않은 부탁을 할 리가 없으니까.’

    매정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제라니아는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왕궁에 돌고 있는 소문의 출처로 의심되는 게 데릭 왕자와 아이렌 왕비인 걸 생각하면, 프란츠의 반응은 지극히 온건한 편이었다.

    ‘그래도, 일단 이야기를 들어본 다음에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듣지 말라는 겁니다.’

    ‘네?’

    ‘당신은 그런 사람한테 약하니까.’

    상냥하고 연약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가면무도회 때도 그렇지만 리암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보였다. 그가 강압적으로 구는 대신, 연약한 면을 내보였기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걸 프란츠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제게도 그랬으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저 그렇게까지 무르지는 않아요.’

    ‘압니다. 하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해보겠다고 하겠죠. 당신이 다소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이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다정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이 조금 더 이기적이라면 좋을 텐데.

    ‘프란츠, 이게 내 문제일 뿐이라면 아마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일엔 당신 역시 무관하지 않잖아요.’

    제라니아는 조곤조곤 말을 꺼내며 프란츠의 뺨에 손을 대었다. 피부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가락 끝에서 간질거림이 피어났다.

    ‘나는 이미 당신의 사람이에요. 셀리나와 친한 건 사실이지만, 누구를 더 우선해야 하는지는 내가 더 잘 알아요.’

    듣기 좋은 말을 꺼내는 다정한 목소리가 프란츠의 마음 한구석을 허물어뜨렸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음식을 먹었을 때 느끼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무슨 부탁을 받든, 꼭 당신과 상의해서 결정할게요. 약속해요.’

    그렇게까지 말하는 제라니아의 부탁을, 프란츠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는 셀리나의 손이 찻잔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침묵이 길게 늘어졌지만, 제라니아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비어 있는 찻잔에 다시금 차를 부어주었다.

    셀리나는 눈만 들어 제라니아를 힐끔 훔쳐보았다. 밤늦게 찾아왔는데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고요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제라니아를 보고 있자니 목이 메었다.

    그 정적인 다정함이 너무도 편안해서, 왜 너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금 깨닫고 말아서.

    “저, 전하가 이상해.”

    더듬거리면서도 셀리나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제라니아는 귀를 기울였다. 셀리나의 눈가에 붉은 끼가 돌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 전하 곁에 새로운 측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오고 나서부터 좀 이상해지셨어.”

    어느 날부터 데릭의 옆에 머물던 이상한 남자. 남편의 앞이라 차마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셀리나는 처음부터 그가 껄끄러웠다. 그와 있을 때면 간간이 시선을 느꼈다.

    제 피부 위를 기어가는 것 같은 뱀 같은 시선을 애써 외면하기만 하던 중, 데릭이 조사단에 파견되었고 자신은 밤늦게까지 홀로 처소에 남게 되었다.

    당분간 늦게 돌아올 거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자에게 저를 지키는 역할을 맡겼다 했을 때는 모골이 송연했다. 제가 과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억지로 태연을 가장하던 모습은 제게로 뻗어오는 손 하나에 와장창 깨졌다.

    ‘이거 놓으세요!’

    허락 없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그 손가락조차 마치 뱀을 떠올리게 했다. 팔을 붙잡혔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근데…. 그 사람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어.

    작게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꺼져가는 촛불처럼 무척 연약하고, 또 조심스러웠다. 제라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셀리나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너무 무서워서, 뿌리치고 도망쳤어. 그런데…. 도망쳐 나오고 보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거 있지.”

    “…….”

    “공작저에 있는 오라버니를 찾아가자니,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너무 막막하고,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널 찾아왔어. 미안해.”

    네 입장이 있는데. 살며시 고개를 떨구는 셀리나의 어깨를 제라니아의 손이 가볍게 토닥였다. 셀리나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잘게 떨리던 몸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즈음 제라니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데릭 전하께 솔직히 이야기하는 건? 너를 아끼시잖아.”

    이렇게 엮이기 전, 제라니아는 데릭을 만난 적이 있었다. 3년 전에 있었던 셀리나의 결혼식에서.

    ‘꼭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던 남자의 얼굴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순한 정략결혼이라기에 당시의 그는 셀리나를 무척 아끼는 것이 잘 드러났다.

    피로연에서 셀리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미소를 짓던 그는 셀리나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그렇기에 자신도 조금은 마음 편하게 그들을 축복할 수 있었다.

    제라니아의 제안에도 셀리나의 얼굴 위로 내려앉은 그늘은 가실 줄 몰랐다.

    “…모르겠어.”

    고개를 저어 보이는 여인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거든.”

    저 사람의 시선이 왠지 무섭다고,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 거냐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화를 내시더라고. 그럴 리가 없지 않냐면서….”

    이야기를 듣던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문득 가면무도회에서 만났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신을 헤집는 것 같던 목소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하던 사람.

    코델리아가 들었던 소문의 남자는 사기꾼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사람을 홀릴 수 있는 마법사는 실존했다. 리암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한 걸 보면, 성가신 능력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은 프란츠가 맡겼던 수호부로 인해 멀쩡하지 않았나. 안전에 신중한 건 데릭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 사람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가졌나? 아니면….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는 전하는 처음 봤어.”

    두 손을 꼭 무릎 위로 포갠 채 셀리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넋을 잃은 것처럼 허망한 눈동자가 바람 따라 일렁이는 촛불처럼 깜빡, 깜빡거렸다.

    “평소에는 괜찮으셔. 내가 사랑하는 전하의 모습 그대로야.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내 말을 들어주시지 않아.”

    “원래는 안 그러셨어?”

    셀리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도로 닫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그것도 잘 모르겠어. 이런 적은, 처음이라….”

    결혼하고 난 뒤로, 이렇게까지 남편과 맞선 적이 없었다. 그의 의지를 따르는 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무언가를 강권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조차 무리한 선은 아니었다.

    괜찮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번까지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조사가 끝나지 않은 이상 데릭은 앞으로도 자주 처소를 비울 것이고, 왕궁의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는 상황에서 왕자비인 셀리나가 외부로 지나치게 나도는 것은 이미지상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제라니아는 농담조로 말했다.

    “그렇게 돌아가기 싫으면, 차라리 이혼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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