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짐 이것도 더 넣어!”
“이것도!”
“그건 무거워서 안 돼.”
“가볍게 가자고, 최대한.”
준비는 사전에 해 두었기에 출발 날짜가 앞당겨졌어도 큰 무리가 없었다. 회담 장소까지는 이곳에서 말의 걸음으로 하루가 걸리니 짐이 많은 후방 부대만 빼면 약속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였다.
책임자가 된 록은 이번 회담에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신관들의 체력이나 지내 온 환경이 먼 거리의 행군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록 님.”
“응.”
“이것 한 번만 확인해 주십쇼. 저희 출발 명단입니다.”
“아까 봐 두었잖아.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면 그만해도 돼. 자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예. 아, 짐을 챙기고 계셨습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됐어. 아, 저거나 좀 도와주게.”
좋은 말로 에둘러 하급 신관을 보낸 록은 수레에 실을 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쌌다. 회담이 잘 마무리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 점도 한몫했다. 재미없는 신전에서 벗어나 한 번쯤, 만약 친자가 아니라고 해도 나디사 마로닌과 식사 자리를 마련해 보고 싶었다.
아직 약속해 두지도 않은 그 시간이 기다려져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혼자 웃고 있는 그를 수상하게 보는 시선이 있더라도 록은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얼굴을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옷 한 벌쯤은 지어 줘도 되지 않을까. 무엇하나 명확히 밝혀진 게 없는데도 록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너무 흥분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다. 생전 부른 적 없던 콧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의사를 데려온 이도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
“왜 그러니, 란.”
“요즘 왜 그 여자 얼굴이 안 보이죠?”
대신전을 나와 천막생활을 하면서 란의 얼굴은 유난히도 맑아졌다. 명색이 신관인데 공주의 시녀들이 그를 짝사랑한다는 소문까지 들려오고 있을 정도이니. 소매를 접는 행위까지 단속하던 신전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본래 가지고 있던 성격이 나오는가 보다. 마음이 편해야 얼굴도 피는 것일 테니. 만일 그가 첫 번째 신관이 된다면 지금처럼 신전의 꽉 막힌 느낌이 덜해질까.
저가 물어뜯고 싶어 안달하던 나디사를 궁금해하는 것도 재밌었다. 짧게 과거를 회상한 란은 짐 가방을 닫으며 미소 지었다.
“보기 싫다고 하더니. 그래도 걱정은 되나 보구나.”
“걱정되는 게 아니라 안 보이니까요. 그 부대 전체가요. 여기가 불리해 보이니 도망간 거 아닌가 해서.”
“곧 올 거야. 안 그래도 불렀단다.”
때에 알맞게 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말에 응답하듯 천막이 걷히며 기분 좋은 햇살이 들이쳤다. 록과 란은 하던 일을 멈추고 들어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입꼬리가 천장을 찌를 듯이 올라가 있던 록의 미소는 이내 거두어졌다. 지금 들어오는 사람은 그가 기대했던 얼굴이 아니었다.
“이건, 내가 부른 사람이 아닌 듯한데.”
“저 그게…….”
책임을 다하지 못한 어린 신관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자 록은 재차 추궁했다.
“나디사 경은.”
“나디사 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어진 대답에 록은 일그러졌던 표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차갑게 식은 손가락 끝을 떤 그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혹시 이름이…….”
“그리사 데이입니다. 이건 나디사 경의 편지인데 도움이 될까 해서 전달합니다. 약속한 날이 오늘인데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록의 수행원 노릇을 하는 신관이 그 편지를 받아 그에게 전달했다. 이 마음을 걱정이라고 할지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록은 그저 그 같은 편지는 좋은 소식을 전해 준 적이 없다는 사실만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수색대를 꾸려야 될까요, 아버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살인 사건도 있었고.”
곁에 서 있는 신관들이 참견을 시작하는데 록은 나약하게 편지만 쥐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감히 신을 버리고 사랑을 원한 벌을 주듯이 떠나가 버린다.
편지를 확인해야 하는데도 록은 그 순간을 뒤로 미루고 싶었다. 록의 미적거림이 불편한 침묵을 불러왔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저 때문에 나간 것이기도 하고요.”
기다리다 지친 표정의 그리사가 본인이 생각해 둔 제안을 해 왔다.
“…… 그래도.”
마른 입으로 인해 말이 헛돈다. 록이 결정을 내리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왔다. 나디사가 사라졌든 죽었든 말이다. 티사가 죽었을 때의 슬픔을 떠올린 록은 목이 메었다.
“아버지!”
찾아보라는 말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게 아닐까. 그러한 마음에 채찍질하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그렇다. 도움을 주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그녀를 사지로 모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럼.”
한참 말을 미루던 록이 수색대를 보내기로 결정한 순간 천막을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우-
고래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나팔 소리가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혹은 성의 주인과 그 가족이 죽었을 때만 저 나팔을 불었다.
“록 님…….”
천막 내를 휘감은 긴장감은 록을 겨냥했다. 모여든 시선들은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그에게 답을 구했다.
“잠깐 나갔다 오지.”
그 시선을 무시할 위치가 아닌 록은 나디사의 편지를 쥔 채로 등을 돌렸다. 천막을 걷어 내며 밖으로 나가자 나팔 소리에 쫓겨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뛰다가 횃불을 잘못 차서 땅에 엎어진 건 예삿일이었다. 화창한 날씨를 물리치듯 고함 지르는 이들. 그리고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나팔 소리.
록은 사람들 사이에 버려져 어쩔 줄 모르는 나귀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나귀의 처지가 자신과 다르지 않았다.
“록 님!”
하얀 신관복이 벗겨질세라 달려온 어린 신관의 모습이 마치 깃발 같았다. 안 좋은 예감은 그냥 놀다 가는 법이 없었다. 이것도 신이 주신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기습입니다. 저쪽에서 약속을 어겼어요.”
첫 번째 신관인 랍이 자신을 가르칠 때 제 성격이 순수하고 약지 않아 좋다고 그랬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대피를…….”
“그래.”
나디사의 편지가 그의 손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순수하고 약지 못한 이에게 바치는 조롱이었다.
* * *
나디사는 아침을 먹고 나와 빨래터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빨래터 윗물 쪽이었다. 마로닌 부인을 도우러 온 그녀는 세 시간째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어머니를 따라왔는지 아이들 웃는 소리가 아랫물 쪽에서 흘러들어왔다. 여름이 되어 얼음물이 녹은 시냇가는 빨래하기가 좋은 시기였다. 여기서 한 달만 넘어가도 가을의 초입이 되어 손을 물에 담그기 힘들었다.
그래서 여름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그녀가 일하는 세탁소에서 몰래 집안 빨래를 해결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하니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녀가 세탁소를 그만둔 올해는 어떻게 지나갈지 싶다.
“나디사.”
“네?”
손톱을 뜯고 있던 나디사는 빨래를 다 끝낸 마로닌 부인의 미소를 보자마자 가슴이 뜨끔했다.
불에 탄 집수리는 로단이, 빨래나 식사 같은 집안일은 마로닌 부인이 전담하고 있었다. 저는 그저 식량을 축내는 애벌레처럼 먹고 자느라 바빴다.
돌아가야 하는 날이 지났음에도 두 사람이 걱정된다는 핑계로 눌러앉아 있질 않았나.
“가자, 나디사.”
하물며 안 간다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던 마로닌 부인은 은근히 가는 날을 떠보고 있었다.
“오늘은 날도 좋다.”
“그러게요.”
“그런데 왜 집에만 있니. 돌아갈 날도 머지않았는데.”
집에는 일단 복귀 날짜를 미뤘다고 해두었다. 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로단이 봐도 알 만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나디사는 갈 수 없었다.
혹시나 히아신이 작별 인사를 하러 돌아올까 봐.
그렇게 걸어가면서도 마로닌 부인의 말을 놓치기를 여러 번. 집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핑계로 그녀를 데리고 나왔던 마로닌 부인은 좁은 골목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디사.”
“네.”
싱겁게 대답한 그녀의 시선은 땅에 닿아 있었다. 히아신이 떠나갔으면, 하고 바랐던 건 그녀였는데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삶을 지겹게끔 한다. 모든 것이 느리고, 모든 것에 확신이 없다. 그 나쁜 사람이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는 사실을 주입하듯 머리에 넣어도 깜빡 뒤돌아서면 휘발되고 없다.
“나디사. 나를 봐.”
그녀는 제 손을 잡는 마로닌 부인 때문에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리움을 시냇물에 떠내려 보려고 했지만 그게 잘 안됐다. 아무도 이 마음을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내 얘기 하나 해 줄까, 나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