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사려 깊은 마로닌 부인의 말조차 듣기 싫은 시기였다. 만사가 귀찮은 제 마음을 자각한 나디사는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히아신이 떠나고 자신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마로닌 부인은 그녀의 상실감을 잘 아는 것처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를 이끌어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샤포드의 여름이 끝나는 듯 햇볕이 강하지 않은 날이었다. 무더운 여름을 보내는 것이 그녀는 조금 두려웠다. 그 여름이 마음을 태울 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옛날에 티사가 나한테도 같이 라드군 시험을 보자고 그랬거든. 그런데 나는 떨어지면 창피할 것 같아서 가지 않았어. 로단하고 결혼도 해야 했고.”
마로닌 부인이 꺼낸 별난 주제에 귀가 뜨였다. 아니, 무엇보다 그녀가 친모에 관한 이야기하는 게 처음이었다. 제 손을 꽉 쥐는 부인을 느끼며 상상해 보았다. 어리고 두려운 게 많은 마로닌 부인의 젊은 시절을.
“그런데 막상 티사가 멋진 군인이 된 데다가 마을 사람들 모두 그 아이를 칭찬하니 내 삶이 초라해 보이더라. 그날 겁내지 않고 따라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기도 하고.”
마로닌 부인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빛바랜 추억에 잠겨 들었다. 설산을 배경으로 선 마로닌 부인의 눈은 옛 기억을 더듬느라 아련해지고 있었다. 티사를, 친모를 그리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졸지에 친구의 아이를 맡아 키운 형편이었으니 원망하거나 아니면 잊기를 바라는 줄로만 알았는데.
“너를 버리려는 티사한테 실망해서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아픈 말을 했어. 그날 너를 따라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건 거짓말이었는데도.”
본인의 잘못을 뉘우치는 순간에도 마로닌 부인의 눈빛은 선하고 아름다웠다. 티사의 이야기가 속력을 붙여 준 건지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했다.
로단이 내는 못질 소리가 길에 감겨들고 있었다. 망치를 들고 있던 로단은 두 사람이 오자 조심하며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마로닌 부인은 로단이 들을 수 없는 거리에 서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 사람에게 실망해서 이러는 거든, 떠나서 이러는 거든. 나디사.”
“……네.”
“너는 내 딸이기도 하지만, 티사의 딸이기도 하잖아.”
마음을 강하게 먹은 마로닌 부인은 미소 띤 얼굴로 로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화 나누는 그녀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로단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모자를 쓴 설산 아래에 사는 부모에게 주지 않아 될 걱정을 끼쳤다.
“여기에 머물러도 좋고, 나는 그랬으면 좋겠지만. 네가 후회 없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 이건 너답지 않아, 나디사.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살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기다릴 수 있어. 한번 해 보니 해 볼 만해.”
“…….”
“말주변이 없어서 미안.”
“아니에요.”
“그리고 말이야.”
“네.”
“우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을 거야. 그러니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언제든 돌아오렴.”
이별을 직감한 마로닌 부인은 고인 눈물을 허둥지둥 닦아 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마무리 짓듯 그녀의 손등을 토닥거린 뒤 걸어가 로단의 곁으로 갔다. 집수리 중인 로단은 새로 달 창문의 높이를 물으며 웃음을 띠었다.
나디사는 두 분이 아끼는 집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동료랍시고 데려온 남자는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즉시 불이 났으니까. 화재의 원인을 그 사람 탓으로 돌려도 할 말이 없을 거다. 그녀도 이게 히아신의 짓이 아닐지 의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마로닌 부부는 이별의 예의를 아는 사람들이라 떠나간 사람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를 탓할 줄 알았던 로단도 어제와 똑같을 뿐이었다. 이별에 쩔쩔매는 그녀를 배려하듯이 말이다.
“저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시선이 던져졌다. 갑자기 주목받게 되어 쑥스러운 나디사는 뺨을 붉히며 말했다.
“잠시 라드들 좀 보고 와도 될까요. 저녁 준비는 그다음에…….”
“다녀와, 나디사.”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디사는 폐가로 걸어갔다. 쉬지 않고 그곳에 간 그녀를 맞이하는 건 서로의 다친 부위를 핥아 주는 라드들이었다.
“로마, 디디. 많이 아프니?”
습하고 어두운 곳을 고른 로마의 앞에 가 앉았다. 서로밖에 없던 이들은 나디사가 나타나자 반가운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디디.”
그녀는 너무나도 멀쩡한 디디의 코끝을 손등으로 건드렸다. 라드는 충성을 맺은 주인이 사라지거나 죽으면 저도 없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주인이 사라진 지 꽤 됐는데도 디디는 그러지 않았다. 되레 그녀가 새 주인인 것처럼 따르고 있었다. 이건 로마의 영향이 큰 듯하지만.
“네 주인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몇 가지나 될까.”
한때 적개심, 분노 같은 감정이 그녀를 지배했던 적도 있었다. 그간 그를 위해 노력하고 계획한 일을 우습게 여긴 게 아닌가. 그러나 며칠이 지난 지금은 생각 자체가 불편하고 힘이 든다. 복귀에 대한 것도, 그리고 그에 대한 것도. 이대로 더 생각했다간 골이 비게 생겼다. 숨을 쉬고 살 수 있도록 생각을 잠시 꺼 둔 것이었다.
-그르르…….
그녀가 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보이던 로마가 발을 치웠을 때였다. 발톱 밑에 깔린 천 조각을 발견한 나디사의 눈이 일순간 또렷해졌다.
그건 남성용 셔츠의 조각이었다. 실밥이 튀어나온 그 조각을 주운 나디사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네가 한 거니?”
말이 통할 리 없겠으나 그녀는 누구에게라도 묻고팠다. 떠나려는 그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다가 뜯어 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보니 조금은 유쾌해졌다. 밑이 찢긴 옷을 입고 다니게 된 히아신은 제 몰골을 창피해하고 있을까.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네. 웃고 있었을지. 아니면…….”
울면서 떠나는 히아신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필시 그라면 웃으며 떠났을 거였다. 그게 그다운 것을 알면서도 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웃는데 저만 웃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래.”
그 남자는 떠났다. 마음을 정리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떠났다. 그녀는 마로닌 부인과 로단처럼 착하고 다정하지 않아서 언제까지고 그를 기다리겠다는 약속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문득 그와 자신이 다를 게 있나 싶은 생각에 비난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인사 없이 떠나고, 편지 한 장 없고, 그리고 마음 내키면 돌아오고. 망아지 같다던 그와 다를 게 없었다.
마로닌 부부는 사기 친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건 전혀 당연한 게 아니었는데도.
돈을 부쳐 주어 좋은 곳으로 이사를 보내면 될 줄 알았다. 그런 핑계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나디사는 일어나 다시 폐가 밖으로 나갔다.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수리에 열중하는 마로닌 부부가 보였다. 두 사람이 이사 가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와 같았다. 돌아온 사람이 당황하여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만약 그가 돌아온다면 말이다.
왜 돈을 쓰지 않냐며 투정을 부릴 게 아니라 왜 자신이 그토록 무심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마로닌 부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친모를 닮았기에 그들처럼 기다리며 삶을 보낼 수 없었다.
“나디사. 그 도마뱀들은 다 나았니.”
여전히 라드를 도마뱀으로 여기는 로단이지만 그래도 다쳤다고 하니 걱정된 모양이었다. 나디사는 그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비록 다리를 다쳤지만 라드에게 중요한 날개는 끄떡없었다. 디디가 주인과 떨어져도 괜찮다면 데려가 치료를 맡겨 볼 생각이었다.
그래, 그녀는 또다시 다정한 이들을 버려두고 떠나 보려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지저분한 미련을 안고 누워만 있었다.
“나디사.”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서 마로닌 부인은 넌지시 정답을 알려 줬다.
“네.”
“가는 길에 배고프지 않게 샌드위치를 싸 줄까?”
긴장이 풀린 나디사는 배시시 웃었다. 잊고 살던 걸 되찾은 기분이었다. 웃을 수 있다는 감각 말이다.
“네.”
두 사람이 그녀에게 준 작별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