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물을 더!”
“다 떨어졌어요!”
“마을 사람이라도 불러와야겠어.”
연기를 들이마신 로단을 콜록거리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등유를 끼얹은 것처럼 기세 좋은 불이었다. 물이 바닥난 것을 본 나디사의 심장이 오르막길을 걷는 듯이 쿵쾅거렸다. 가구가 타지 않게 옮기느라 땀 범벅이 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파괴되고 있었다. 기회만 되면 떠나고 싶었던 곳이라 여겼었는데.
보기만 해도 흐뭇했던 추억들이 빨간 불길에 먹히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나디사는 까만 재로 변한 잔해를 쥐며 울음을 삼켰다. 마로닌 부인이 거의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을 더…….”
마을 우물로 가서 물을 떠 오려던 나디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침을 멈추지 못하는 로단도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불은 갑자기 났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발을 동동거린 사람들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제풀에 지친 것처럼 사그라든 불은 탄 자국만 남기고 떠나갔다. 나디사는 일반적이지 않은 사고에 눈이 뜨였다. 사람이 낸 것이었다. 그것도 특수한 힘을 가진 사람이.
라드가 우는 소리를 확인하러 떠난 히아신이 떠올랐다. 귀가 좋은 그가 이 난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샤포드가 건조한 지역이라고는 해도 이유 없이 불이 날까. 목조를 써서 지은 집이기에 로단은 작은 불씨도 경계하고 살았다.
“잠시 다녀올게요.”
“나디사?”
“어디를…….”
까만 재투성이가 되어 집 밖으로 뛰쳐나온 나디사는 폐가를 코앞에 두고 소리를 질렀다.
“히아신!”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늘 엎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던 남자였다. 숨이 차게 달려가며 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를 혼자 가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됐다.
이 거친 숨소리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치미는 불안을 없애려는 것처럼 연신 히아신의 이름을 불렀다. 창문 아래서 반가운 것처럼 손을 흔들던 남자. 그 철없고 시끄러운 남자가 인사도 없이 떠나갈까.
“로마.”
폐가로 들어선 발은 쉴 틈이 없었다. 밧줄에 감겨 있는 로마는 서러운 듯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옆에 있는 디디는 울 힘도 없어 보였다. 바닥으로 흘러나온 피의 양이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
“잠시만.”
밧줄을 자를 칼이 필요했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머릿속은 불이 난 것 같았다. 히아신은 없고 라드들은 날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묶어 두었다. 그리고 다시, 히아신은 없고.
머리가 산발이 되어 뛰어 들어오는 나디사 때문에 마로닌 부부는 안도할 틈이 없었다. 불에 탄 식기들을 치우느라 허리를 굽히고 있던 로단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디사가 그처럼 창백해진 건 처음 본 일이었다.
“칼, 칼이 있을까요.”
마로닌 부인은 의아해하면서도 군말 없이 부엌에서 칼을 찾아다 꺼내 주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칼을 가져간 나디사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히아신이 없었다. 히아신이 사라졌다. 히아신이 떠났다. 그 모든 게 사실로 다가오기 전에 그가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 나디사는 뛰면서도 풀숲에서 그가 나오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실망이 좀먹는 마음을 부여잡고 폐가로 돌아왔다. 로마의 밧줄을 칼로 끊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울고 있는 디디의 눈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를 버리고 간 거라고.
흐릿해지는 정신을 잡으며 로마의 밧줄을 끊어 냈다. 촉촉한 코가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에 맞닿아 비벼졌다.
“괜찮아, 괜찮아…….”
사실은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누가 누구를 다독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기듯이 걸어가 디디의 몸에 묶인 밧줄을 풀어 주었다. 일분일초가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자유를 얻은 디디의 목이 그녀의 몸 위로 쓰러졌을 차였다.
‘나디사!’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바깥쪽으로 시선을 옮긴 나디사는 두 마리 라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걱정이 지나친 것일 수도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양손에 꽃을 들고 오지 않을까. 설산 근처에 예쁜 꽃이 있어서 그걸 구경하다가 늦었다고 하면서. 감쪽같이 나타나 화가 난 그녀를 안아 줄 것만 같았다. 그는 그리 심각할 게 무어냐면서 걱정한 저를 속상하게 할 것이었다.
나디사는 다리 힘이 없는 사람처럼 풀썩 주저앉아 있었다. 부유하는 하얀 먼지와 나무가 타는 냄새. 아닌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며 낑낑거리는 라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게 물을 것이 많았다. 불은 왜 났는지, 얘들은 왜 묶여 있었는지, 같이 가자는 말로 나를 안심시켜 놓고 혹시 불을 낸 것인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얼른 와서 나를 안아 줄 수는 없는 건지.
마로닌 부부가 찾아오기 전까지 나디사는 폐가를 지켰다. 그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서로에게 약속된 날은 그토록 아무것도 아닌 듯이 저물었다.
* * *
아트리스 메놈은 사생아였다. 이모의 말로는 아버지 되는 쪽과 신분이 달라 반대에 부딪혔다고 들었다. 사툰 종족과의 혼혈로 태어난 아트리스는 하루도 빠짐없이 손가락질 같은 시선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다정하고 강한 여자였다. 늦잠을 자는 그를 타박하는 대신 다리를 주물러 주고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눈만 잘 보였더라면 재가도 가능했을 터였다.
‘아트리스. 너는 어떻게 생겼니.’
‘크게 달라진 것 없어요. 키가 컸다는 것만 빼면요.’
‘그러니. 너는 아버지를 닮아서 잘 생겼겠다.’
어머니가 아버지 이야기할 때마다 아트리스는 장난으로라도 웃지 않았다. 그들을 버리고 간 사람이었다. 낳아 놓고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고. 아트리스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이 있었다. 신관이 되면, 그래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다다르면 사람의 눈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마을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읽은 후로 매년 신관을 뽑는 시험을 치렀지만, 자질이 보인다는 평가에도 번번이 낙방이 되었다.
‘자네가 사툰 종족이 아니라서 그렇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더는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을 나이였다. 신전에서 잡심부름을 하며 기회를 엿보던 그에게 제의가 들어왔다.
‘임무를 무사히 끝내면, 신관 자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지.’
라드군에 합격한 나디사 마로닌의 감시였다. 그녀가 어디로 가든, 무얼 하든 수상한 낌새는 없나 감시하는 것. 특히 신전 쪽에 그녀가 접근하려는 듯이 굴거나 하면 그 즉시 보고할 것. 이토록 쉬운 일이 있나 싶었다. 나디사 마로닌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자에게 정이 들 줄은 몰랐다. 신전은 호시탐탐 그녀의 목숨을 끊어 내고 싶어 안달하듯이 굴고 말이다. 하물며 이런 감시를 당하는 건 마로닌뿐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단 하나였다. 자신과 같은 사생아. 그리고 나디사도 누군가의 사생아겠지. 사생아가 사생아를 감시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을 죽일 구덩이를 판다. 그렇게 해서 얻는 영광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트리스.”
천막을 걷어 내며 들어온 마벤은 어제와 표정이 똑같았다. 웃으려고 노력하느라 그 밖의 것들은 신경 못 쓰는 얼굴 말이다. 그건 시네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를 믿고 여기까지 왔다.
눈이 먼 것은 어머니였지만, 세상을 보고 있지 않은 건 그였다.
내가 살자고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한다. 심지어 살지도 못했다. 라넌 샤스가 한 말이 맞을 거다. 라드군이 되면 신관이 되지 못한다는 말. 그도 의심만 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소용없는 짓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는 걸 알아차릴 용기가.
“준비하래. 이제 곧 출발한다고.”
“응.”
마벤은 할 말이 더 남은 것처럼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렸다.
“오랜만에 나디사도 보겠네. 회담이 잘 끝나서 예전처럼 놀았으면 좋겠다.”
오래간 피해 온 이야기를 마벤은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그녀는 저조한 아트리스의 기분을 맞춰 주듯이 주눅 든 사람처럼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입은 강박적으로 쉬지 않았다. 했던 얘기를 또 하며 말이 끊기지 않게.
새삼 그녀의 수다스러움이 고마운 아트리스는 웃었다.
“그러게.”
마벤은 그의 미소에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도 기쁜 듯이 웃는다.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한 아트리스는 소매 단추를 잠그며 준비를 마쳤다. 라넌이 바라는 이야기는 해 주지 않을 거였다. 고백할 거라면, 그는 당사자에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게 그의 삶에 먹구름이 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