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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70화 (70/210)

70화

라넌은 이 자리가 몹시 불쾌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불려 온 곳이 아직 최고 신관도 되지 못한 어린놈의 처소라는 것도 기가 막힌 와중.

“이 풀들이 누운 자국이 딱 봐도 라드군의 것이 아닙니까.”

그녀를 불쾌하게 만드는 말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뭣도 모르는 늙은이들을 보며 라넌은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불려 가 들은 소리가 그것이었다.

이제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그녀의 상관, 유일한 라드의 머리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려고 그러네. 이것들이.’

그리고 라넌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라드군이 미쳤다고 신전 처소로 들어와 최고 신관 후보에 있는 이를 공격했을까.

그들은 풀들이 누운 자국을 보니 라드가 틀림없다며 열변을 토했다.

듣다 못 한 라넌은 피식 웃으며 늙은 신관들의 말을 잘랐다.

“하면 누가 그랬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라넌의 목소리에 꿀 먹은 것처럼 다들 입을 다물었다.

정확한 증거도 없이 일단 라넌을 불러 놓고, 추궁하는 꼴이 된 것이었다.

“신전 담을 넘어서 란 님과 같은 고위 신관을 쓰러트리고 도망갈 실력이 있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라넌의 말에 안 그래도 민망하던 시선들은 더 눈 둘 곳이 없어졌다. 라넌은 누운 풀을 군화로 짓밟으며 웃었다.

“저를 부르신 걸 보니 저라는 소리입니까.”

“와, 왕세자님은 언제 오신답니까.”

“알 길이 있습니까. 왕세자님이 제가 부르면 오시는 분입니까? 직접 부르시죠.”

라넌과 늙은 신관의 사이가 험악해지는 그때. 라넌은 멀리서 고아하게 걸어오는 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아들이라고 감싸고 돌 때는 언제고. 요즘은 사이가 소원해졌다더니 일이 이렇게 커지고 나서야 돌아온다.

라넌은 늙은 신관들에게 가벼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처소로 들어가는 복도를 빠르게 걸어오던 그도 다가오는 라넌을 발견하고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들은 편리하게도 저희들끼리 신력으로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편리한 능력을 내버려 두고 엉뚱한 곳만 쑤시고 다니는 것은 거지 같은 법도 때문이었다.

처소로 냉큼 들어가게 내버려 둘 순 없지. 란 정도 되는 신관은 함부로 기억을 볼 수 없었다. 그보다 높은 이가 도착해야 했다.

해서 이분, 두 번째 신관 록이 오기 전까지 모욕당한 라드군의 몫은 누가 갚아 줄 것인가.

록은 라넌의 화난 얼굴을 보고도 무표정하게 인사를 할 뿐이었다. 그리고 말없이 지나쳐 가려고 하기에, 라넌은 그의 앞길을 슬쩍 막아섰다.

“비켜서요. 지금 중요한 일이 무언지 모릅니까.”

“첫 번째 신관님은 안 오십니까? 더 정확한 의견이 필요한데요.”

“랍 님은 지금 왕세자님의 부름으로 가셨고. 왕세자님께서 아프신 모양입니다.”

“여기저기 다 아프군요. 저희 라드군은 의사도 아닌데 아픈 곳마다 불려 다니구요.”

그래서 오전에 라드군의 머리가 왕실로 떠났구나. 라넌의 비꼼을 듣고서 록은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라넌은 비킬 생각이 없었다.

“원하는 게 무업니까. 나는 지금 당신을 상대할 시간이 없어요.”

“같이 듣게 해 주십쇼. 범인이 라드군이라는 오해를 사는 마당에 문 밖에서 대기할 수 없습니다.”

라넌의 말을 듣고 록은 조용히 끄덕였다.

그제야 라넌은 몸을 비켰다. 그따위 상관없다는 듯이 처소로 들어간 록은 온 신관에게 둘러싸여 있는 란에게로 달려갔다.

저 고상한 신관이 달리는 것도 보고 귀중한 구경이구만. 라넌은 비웃음 가득한 시선으로 신관 부자의 상봉을 지켜봤다.

처소 문에 기대어 록이 란의 이마에 손을 대는 것을 지켜봤다.

신성한 노란색의 빛이 록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록이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살짝 흘렸다.

그 광경에는 라넌도 놀랐다. 이렇게 그가 신력을 쓰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리 빠른 시간 안에 고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라드를 모는 라드군, 그리고 신의 거룩한 힘을 빌려 쓰는 수비교의 신관들. 전부 그 힘을 어느 정도 빌려 쓰면 반드시 부작용이 왔다.

지금 록의 태도를 봐서는, 이미 어디선가 신력을 잔뜩 쓰고 온 기분이었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피를 참으며 란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던 록은 천천히 그에게서 손을 뗐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급 신관이 눈물을 짜내며 록에게 조급히 물었다.

“범인이 누구입니까, 예?”

“란은 금방 깨어날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네, 록 님.”

“그리고.”

록의 서늘한 눈빛이 라넌을 향했다. 모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라넌을 바라봤다. 라넌은 당당한 표정으로 거지 같은 신관들의 눈빛을 받아 내었다.

“잠시 얘기 좀 하죠. 단둘이.”

“그러죠.”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기색은 역력하지만, 록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는 하급 신관들이 쪼르르 처소 밖으로 나갔다.

제 주인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것밖에 없는 처소로 들어왔다. 라넌은 말없이 제 아들을 쓰다듬고 있는 록의 옆에 섰다.

“범인이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 혹여나 라드군이 나올까 약간의 긴장을 하고 있던 라넌은 긴장이 풀렸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녀의 눈빛은 날이 섰다.

“하지만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죠.”

“똑바로 설명해 주십쇼.”

“나디사 경이 그 자리에 있었어요.”

라넌이 믿지 않는 표정을 짓자, 록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거짓이 아니란 소리였다.

라넌은 흔들리는 눈을 숨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사는 저희 쪽에서 하겠습니다. 추후 저희 쪽에서 결과를 알려 드리는 방식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라넌 경. 그 아이를 싫어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제 감정과는 별개로 나디사 마로닌은 라드군입니다. 신관에게 끌려가 문초를 당하는 건, 라드군 전체의 모욕입니다. 저희 쪽에서 해결하게 해 주시죠.”

“위급한 상황에서는 한 가족이라는 거군.”

씁쓸한 미소를 지은 록은 곤히 자는 란의 머리를 정리해 주곤 일어섰다.

“우리 쪽도 잘한 것은 없습니다. 란이, 창에 힘을 넣어 날렸어요. 나디사에게.”

가만히 듣고 있던 라넌의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라넌은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쪽도 살해 의도가 있었습니까?”

“나디사는 방어만 했습니다. 그 아이는 범인이 아니에요.”

“그럼 혼자 힘을 과도하게 쓰고 쓰러져 버려, 우리 쪽에 덮어씌울 생각인 거군요. 심지어 우리 쪽 사람은 살해를 당할 뻔했구요.”

그 시간에, 왜 란의 처소에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록도 이 건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제힘을 다 써서 쓰러졌다기보단 환영에 당한듯합니다.”

“환영…….”

라넌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이야기가 있었다.

“파르난에 유명한 환술쟁이가 있지 않습니까?”

“의심해 볼 순 있죠.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일이 커져서 란의 기억을 모두에게 공개해야만 합니다.”

“제 아들 지키자고 파르난의 악질들이 신전 처소까지 침입했는데 모른 척하다니요.”

록은 그 말에 반발하듯 일어서서 란의 앞을 막아섰다.

“라드군은 라드군이 처벌하듯, 이 아이는 신전에서 처벌하겠습니다.”

“알아서 하자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대신 저희 쪽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있을 시, 그 ‘아드님’도 신전에 온전히 붙어 있을 거란 기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라넌은 록에게 가벼이 인사하고 떠났다.

웃으며 고개를 돌렸지만, 처소를 나가는 동안 라넌의 미소는 사라져 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그녀는 라드가 모여 있는 푸르른 망토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직속 수하가 달려와 라넌의 옆에 서서 보고를 시작했다.

“발톱의 수장이 지금 본거지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설마 저희 쪽에서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여기 신전 손바닥 안이다. 말을 아껴.”

본거지. 나디사의 보고를 듣고 아마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수장이 움직였을 거다.

라넌이 제 라드에 올라타며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아아,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처소 방향으로 시선이 떠났다. 울고 웃는 소리에 그녀의 직속 부하가 말을 했다.

“깨어났나 봅니다.”

“알아서 하겠지. 우리는 우리 일을 하러 간다.”

라넌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 번 다시 이런 신전에 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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