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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71화 (71/210)

71화

히아신은 가릴 데만 겨우 가린 반라의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그가 깨어나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린 나디사는 틈틈이 오지랖도 부렸다. 눈을 가린 그의 머리를 옆으로 치워 주었다.

잠든 자신을 안고서 성탑까지 무사히 데려온 모양이었다.

창을 맞은 그에 대해 왜 보고하지 못했던 걸까.

상처가 아물게 만든 그 검은빛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신력을 거부하듯 내뿜던 검은빛은 쉬이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느낌을 냈다.

한편으로는 그에 대해 궁금하면서도, 차라리 모르고 싶다는 이중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디사는 자고 있는 그의 어깨 상처를 보기 위해 천천히 이불을 내리다가 멈칫했다.

그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회색 시계 줄이 보였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나디사는 그것에 손을 뻗었다.

남의 물건을 보면 안 되지만, 그 시계의 모양이 독특했다. ‘아리아에게.’ 라고 적혀 있는 그 시계를 열어 보았다.

나디사는 심각한 상황을 잊고 잠깐 미소가 올랐다.

제 초상화를 접고 접어서 그 회중시계 안에 넣어 두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얼굴 쪽이 보이도록 해 놓았다.

가져가야 하는데, 돌려받아야 하는데, 이 정도 정성이면 주고 싶다.

그림을 엄지로 치워 두고 시간을 보았다. 막상 시계 자체는 깨지고 멈추어 있었다.

3시 3분. 히아신은 매일 이걸로 시간을 보던데. 그는 역시 미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몇 시야.”

놀라서 몸이 움찔 떨렸다. 잠기운이 서린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 나디사는 보던 시계를 돌려놓았다.

어느새 그는 제 허벅지에 머리를 꾸물꾸물 들이밀었다. 하품하며 회중시계로 시간을 보았다.

“음, 아직 깨기엔 이른 시각인데. 나디사가 뽀뽀해 주면…….”

“고장 난 시계잖아. 왜 이걸 들고 다녀.”

나디사는 앙탈 중인 그의 머리를 밀어 내었다.

그는 초상화를 가져가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지지치도 않는지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엉겼다.

“착한 사람 눈에는 시간이 보여.”

“……새 시계 사 줄까?”

“나한테? 정말로?”

“이것저것 나 도와준 것 많으니까.”

아리아에게. 그 이름이 신경 쓰였지만 나디사는 그만 일어나려고 했다.

히아신은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그럼 시계 말고 다른 거. 데이트 사 줄래. 나랑 데이트하는 거, 하루 나디사가 사 줘.”

“시계가 고장이 났는데. 왜?”

“이건 어머니한테 뺏은, 세상에 둘도 없는 거라서.”

그런 의미가 있는 시계였구나. 그에게도 어머니가 주신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구나.

나디사는 두꺼운 팔에 묶인 채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웬일인지 마음이 기특했다.

“잠깐 옷 입고 나와. 이야기할 거 있어.”

“여기서 하자. 옷 입기 싫어. 그리고 내 데이트 사 주기로 약속도 안 했잖아?”

“왜 그리 데이트에 집착해?”

“그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그렇지. 나디사.”

눈을 휘어지게 웃은 히아신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래서 데이트 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아.”

나디사는 이런 직접적인 고백을 처음 받아 봤다.

그에게 들으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그날,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려고 왔던 것인데.

“내 대답이, 필요해?”

나디사는 제가 말을 뱉어 놓고서도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받아 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표현해 주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때 일어난 히아신이 나디사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나디사는 심장이 쿵, 쿵, 뛰는 소리를 듣고 머리가 멍해졌다. 히아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도 컸다. 형편없는 대응에도 히아신은 감격에 겨워 말했다.

“그렇게 상냥하게 대답해 줄 줄은 몰랐어……. 네 마음 같은 건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왜, 그렇게까지 말하겠어.”

히아신은 얼굴을 들고서 그녀를 달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데이트는?”

나디사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부풀고 있는 그의 아랫도리가 그녀에게 맞닿아 있었다.

“복잡한 일, 해결되고 나면.”

“복잡한 일, 그게 뭔데.”

나디사는 그제야 머릿속에 팟 스치는 생각이 선명해졌다. 잠든 그를 구경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었다.

“그거 때문에 온 거야. 어제 갑자기 네가 도착하고 그 신관이 사라졌잖아. 지금 그 신관이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인데 너하고 내가 거기에 있었잖아.”

그는 와다다 말을 쏟아 내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뺨을 쓰다듬었다. 심각성을 모르는 그의 반응을 보며 마음이 막막했다.

“아트리스가 갔는데 그에게 솔직히 말은 못 했어.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어서.”

“솔직히 말하지, 왜.”

히아신은 포옹을 풀고서 침대 머리맡에 있던 제 윗옷을 입었다.

머리를 옷 위로 쑥 내민 그가 다가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나는 무서울 거 없어. 그런데 무서우면 말해 줘. 얘기도 안 나오게 만들어 줄게.”

나디사는 그의 말이 장난같이 들리지만 장난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씻고 나온다며 욕탕으로 느긋하게 걸어가는 그에게선 조금의 조급함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저 머리통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나디사는 그가 입을 맞춘 뺨을 손등으로 닦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 심장 소리. 쿵, 쿵, 울리는 소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제 가슴에 손을 올려 보니 아까의 히아신처럼 울리는 게 느껴졌다.

이건 큰일이었다.

* * *

라넌은 바로 본거지로 들어가지 않고, 보고를 위해 라드군 머리를 맡고 있는 이에게 들렀다.

그는 왕세자의 부름을 받고 왕궁에 들렀다가, 겨우 짬이 나서 라넌을 보러 온 것이었다.

“왕세자님 상태가 좋지 않아.”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본거지 바깥으로 나와 산책하는 척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건강하시던 분이 왜 갑자기.”

“왕께서도 오늘내일하시는데 왕세자님까지 저러니 첫 번째 신관도 이상한 말을 하더군.”

첫 번째 신관. 록과 다른 면으로 꺼려지는 사람이었다.

안 좋은 소문도 워낙 많은 이고. 정치와 깊게 관련이 있어, 지금의 첫째 왕세자를 거의 끼고 살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은근슬쩍 둘째 왕자님이 어떠냐고 내게 묻던데.”

“그게 무슨…….”

“대비는 해야 되지 않냐고.”

라넌은 경합을 보러 와서 술을 잔뜩 마시고,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를 열던 왕세자를 떠올리며 그의 건강이 좋아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워낙 왕실이 장수하는 이가 없는 터라 걱정하는 이도 적지 않긴 했지만.

라넌은 신관이 쓰러진 일고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이제 내부 다툼의 기미까지 보이는 윗분들 때문에 머리가 썩는 기분이었다.

평화를 평화로 두지 않는다. 겨우 외부와의 싸움에서 이겨 평화를 얻었더니, 이제는 내부 다툼이 어떠냐며 간을 보고 있었다.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머리까지 말을 하는 걸 보니, 이미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문제인 듯했다.

“더 심해지면 왕도, 왕세자도, 올여름을 넘기지 못하겠다던데.”

“그거까지 저희가 관여할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알아서 하겠죠.”

“그랬으면 좋으련만.”

불길한 말만 남긴 머리의 수장은 천천히 걸어갔다. 라넌은 홀로 남겨져,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라넌은 이제 늙어 버린 그의 머리카락, 굽은 어깨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티사 말입니다.”

오늘은 그도, 그녀도 바빴다. 대형 사고가 연이어 터지고 있으니. 하지만 라넌은 그에게 오늘 꼭 물어봐야 할 말이 있었다.

“아이가 있습니까?”

“티사 레나이?”

요 며칠 틀어박혀서 생각해 봤다. 그 시절 그녀와 나눈 편지. 꺼내 보지 않아 먼지가 가득 쌓여 있던 그 편지를 다시 꺼냈다.

중요한 임무에서 갑작스러운 탈선으로 많은 부상자를 내고도, 사과 한마디, 인사 한마디 없이 제 곁을 떠난 사람.

생각해 보니 티사 레나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신이 내린 재능을 믿고 오만하게 변해 버린 그녀를 원망했다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시절 그녀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라넌!’

힘든 상황에도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누구보다 동료를 아꼈던 제 친우.

“네가 티사 레나이를 입에 올리다니. 그 아이가 자살하고 나서 그 이름을 잊어버리려고 가장 노력했던 게 너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니까요. 그 아이가 죽은 지 십몇 년 뒤인 지금, 기가 막히게 그 아이랑 닮은 애가 나타났으니까요.”

머리 수장은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다.”

“…….”

“우리가 하늘을 누구보다 자유롭게 나는 것 같지만, 지금 누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지 봐라.”

라넌은 그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머리의 수장은 침을 삼키며 다시 제 갈 길로 걸어 나갔다.

“너는 거짓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쭉 널 머리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티사 레나이가 아니라. 그 애는 잘 날지만, 이 자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그 말은 처음이었다. 늘, 언제나, 이 자리에는 그녀가 아니라 티사 레나이, 그 여자의 자리가 아닐까, 그 아이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라넌은 뒤돌아 본거지로 힘없이 걸어갔다. 마음은 허전한데 머리는 오히려 깔끔했다.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라넌은 본거지 뒤에 있는 집무실로 들어가기 직전 아트리스 메놈을 마주쳤다.

이 시간까지 안 오고 기다렸던 거군. 동료 사랑이 지극한 놈이었다.

만일 일이 터졌으면 벌써 나디사 마로닌을 구금하고도 남았지.

“아트리스 메놈.”

한 자세로 꿋꿋이 기다리던 그였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절도 있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번 신관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범인은 곧 지목될 거다. 우리 중에 아닌 사람으로. 그러니 너도 알고 있는 거 있으면 속히 잊어. 마로닌 입단속도 철저히 하고.”

하루 종일 기다려서 고작 듣게 된 말이 이것이면 성질이 날 법도 한데, 아트리스 메놈은 이제껏 본 얼굴 중에 가장 환한 얼굴로 웃었다.

감탄할 정도로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하, 라넌은 외곽 성탑으로 뛰어 떠나가는 아트리스를 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티사도 인기가 많았는데, 그 비슷한 아이도 그렇군.

또 다다른 옛 생각에 고개를 흔들어 지우려는 찰나. 라넌은 문득 집무실 문고리를 돌리다가 한 단어에 꽂혔다. 인기.

만약 정말로 나디사가 티사의 딸이라면, 대체 그 아비는 누구지.

라넌은 한참을 집무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 질문은 오래도록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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