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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48화 (48/210)

48화

나디사는 달려온 마벤의 포옹을 받고 나서야 땅에 돌아왔다는 걸 실감했다.

기뻐서 뛰는 마벤은 이겼노라, 해냈노라, 하는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끄으으

로마가 우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자 나디사는 옆구리에 통증이 쏘아졌다. 연결성이 좋아지는 바람에 고통이 두 배가 됐다.

“나디사. 야, 부축!”

안고 있던 마벤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어디 아파?”

“일단 의무실로 데려가죠. 수장도 거기 있을 테고.”

“맞아, 아트리스! 그리고…….”

마벤은 우두커니 서 있는 히아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건 또 왜 저래.”

그의 말에 시네라가 그를 불렀다.

“히아신! 이쪽으로 와 봐!”

그러나 그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사는 히아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부르길 포기한 눈치였다.

의사를 부르기 위해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저게 바람 맞고 체했나. 왜 저래?”

“내, 내버려 두자. 일단, 그리사가 지금 의사를 데리러 간 것 같, 은데.”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편 마지막 주자가 땅에 도착했다.

무릎의 사람들도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구름떼처럼 몰려 있는 사람들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무사히 도착한 듯싶었다.

힘이 풀린 나디사는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잠이 몰려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의무실로 천천히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나디사 마로닌.”

황금색의 망토를 두른 왕실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황금 투구를 벗고 나디사의 앞에 섰다.

“왕자님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하신다. 따라와.”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투구를 쓰고 훈련장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발톱의 대원들은 남은 이가 마벤, 그리고 시네라뿐이었다. 히아신은 그새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뒤늦게 터져 나왔다.

“아니, 그런데 초면에 왜 반말이야.”

황금의 망토는 멈추었다. 마벤은 제 말이 들린 줄 알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왜 오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나디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사가 데려올 의사도 아직 도착 전인데. 아트리스와 사라진 히아신도 신경 쓰이는데.

하지만 왕세자의 명을 거부할 순 없었다. 나디사는 마벤의 손을 떼어 놓고 천천히 걸어갔다.

복잡한 생각은 지웠다.

지금은 그래도 어렵게 얻은 승리의 기쁨에 집중할 때였다.

* * *

“라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닮을 수 있지.

“라넌.”

이미 끝난 장면이었지만, 라넌의 머릿속에는 수십 번씩 그려지고 재탄생됐다.

완벽한 라드군이라고 할 수 있는, 날개 네 개를 펼친 라드와 차분한 표정의 조종사.

라드의 날개는 숨겨진 것까지 해서 총 세 쌍이었다.

하지만 고대 소설에나 존재할 뿐이지 실제로 그 세 쌍을 본 이는 없다.

라드와 아무리 적합률이 좋다 한들, 나디사와 같은 두 쌍도 라드군 창시 이래로 다섯 명 이내였다.

두 쌍까지 보인 라드군의 조종수는 하나도 빠짐없이 심장 부대로 들어왔다. 타고난 재능이 좌지우지되는 이 라드군 내에서도 아주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야 했다.

그러한 사람은 그녀의 동기 중에 있었다. 티사 레나이.

전투 중, 모두가 실의에 빠진 상황에 그녀가 꺼낸 두 쌍의 날개는, 그 바람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 느꼈던 벅찬 경외감과 뼈 아린 질투까지도.

“라넌!”

“네.”

수차례 부른 모양인가 보다. 참 답답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왕세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를 머리로 만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어. 바로 옆에서 부르는데도 못 알아듣는다니.”

“죄송합니다.”

라넌의 빠른 수긍에 헛기침을 한다. 왕세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이 풀어졌다. 비록 감정 기복이 심하더라도 대들지만 않으면 그는 아랫사람에게 관대한 이였다.

왕세자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근래 몸도 안 좋고 골이 아픈 일이 많았는데, 간만에 머리통이 싹 뚫리는 기분이야.”

“그러셨습니까.”

“솔직히 자네가 무슨 이런 자리까지 오라고 해서 나는 귀찮았거든. 속여서 미안해. 내일 일정 같은 것 없네. 근처로 온 김에 보고 갈까 했던 거지.”

짐작하고 있었다. 저 게으른 파티광인 왕자에게 내일 일정 같은 것이 없다는걸.

애초에 이쪽에서 일정을 짤 때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하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일정이 생길 만큼 바쁜 분도 아니고 말이다.

술을 입에 머금고 손바닥을 싹싹 비비는 폼이, 새로운 장난감을 들여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라넌은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나디사 마로닌을 보며 아무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커졌다.

주인공인 나디사 마로닌의 등장이었다.

계단을 채 올라오기도 전에 왕세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마중을 갔다.

법도야 그가 곧 수비타의 법인데 무슨 상관이겠냐만. 왕가의 위엄이 상하긴 했다.

“어서 오게!”

경합을 볼 때부터 경주마 레이스 감상하듯 하던 왕세자였다.

태도가 달라진 건 두 쌍의 날개를 본 후였다.

결국 라넌은 자기가 판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나디사 마로닌이 왕실 예법 같은 걸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왕세자는 상관없다는 양 웃으며 그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우선 앉아, 아, 자네, 몸을 왜 이렇게 떨고 있나.”

왕실군이 의자를 빼내어 나디사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왕세자는 손수 에스코트하여 그녀를 앉혔다.

“한잔하지. 나 오늘 크게 감동받았어.”

“네.”

왕세자는 본인이 마시던 술을 빈 잔에 따랐다.

팔이나 눈가에 오는 경련은 힘을 뽑아낸 후유증 같은 것일 터다.

라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미 실신하여 실려 가고도 남았다. 플란 종족은 이래서 싫었다.

“춥나? 이봐, 거기 덮을 것 좀.”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이 수비타 왕국의 보물 같은 이에게.”

왕세자는 제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겐 아낌없이 퍼 준다.

반면 한 번이라도 눈 밖에 난 사람에게는 차라리 자살을 권유했다.

왕국군이 양털 담요를 가져와 나디사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따라 준 술을 거부하지 않고 마신다.

거부했다면 모르긴 몰라도 나디사 마로닌은 꽤 곤란해졌을 거다.

왕세자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서 저도 술을 마셨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흐르는 긴장감을 그는 즐기는 편이었다.

“발톱이라면 가장 낮은 부대 소속일 텐데. 아니, 이런 인재를 몰라보다니. 라넌, 자네 귀에 이어서 눈까지 어두워진 것 아닌가?”

옆에 서 있던 라넌은 고개를 숙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봅니다. 오늘부로 마로닌 경을 몸통에…….”

“내 직속 부대에 넣었음 하는데.”

듣고 있던 이들 모두가 놀랐다. 이미 라드군은 왕자인 그의 것이긴 하지만, 그의 직속 부대는 왕실군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주로 그의 경호 업무를 담당하는 왕실군에 나디사를 포함하겠다는 뜻이었다.

라넌은 이번만큼은 목숨을 걸고 반박했다.

“지금껏 라드군은 왕실 직속으로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아, 그러면 이번이 최초가 되겠군. 축하해, 이름이……. 아, 나디사 경.”

고집을 꺾지 않은 왕세자는 위악을 부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라드군은, 한 부대로 움직였을 때 더 효율이 좋습니다. 단독으로 나가는 것은 전부터 금지하는 일입니다.”

“라넌 경. 말이 많군.”

“라드군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저를 이 자리에 앉히신 것도 왕자님이고요. 싫으시다면 라드군에 해를 끼쳐도 아무런 말을 안 하시는 자를 저 대신 임명하시면 됩니다.”

술에 취한 왕자는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꼰 다리를 풀며 눈길을 어둡게 깔았다.

“그럼 이건 어떤가.”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나디사 경.”

술잔을 내려놓은 나디사는 두 손을 모았다. 왕세자의 욕심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애는 티사 레나이처럼 그저 날기만 하면 좋은 바보로 보이니까.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을 찾아다녔어. 능력이 있고, 젊고, 아름다운. 이 수비타 왕국의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옛것들이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해서 미안하군. 라넌은 그렇게 비웃은 뒤 표정을 없앴다.

“내가 지휘하는, 특수한 임무를 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우리는 잃어버린 수비타 왕국의 전해지는 세 개 보물 중 하나를 찾고 있지.”

그리고 왕자의 말이 길어질수록 라넌의 표정은 구겨지고 있었다.

왕자가 그 잃어버린 세 개 중 하나에 거의 근접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은 왕자의 직속보다도 더 위 단계의 충신들이었다. 거기에 나디사를 포함한다는 이야기다.

“아예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니 표정 풀어, 라넌 경. 자네의 말을 고려해서, 그럼 이렇게 하지.”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대여, 아니, 내가 요청할 때만 잠시 나디사 경을 빌려주는 것으로.”

왕세자는 그녀가 반박할 말을 잇기도 전에 차갑게 목소리를 내렸다.

“설마 소수 종족이라서 금하는 건 아니겠지. 수비타 왕국은 자랑스러운 차별 금지법이 엄연히 존재해. 자네가 왜 새로운 신입들, 그것도 소수 종족만 발톱에 배치했는지 묻지 않아.”

헐렁한 것 같아 보여도 이런 면 때문에 방심할 수 없었다.

차별 금지법으로 무장한 왕실이 그 부분을 지적한다면 처벌의 무게가 달라졌다.

그 말이 맞다. 라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차별한 게 맞았으니까. 그리고 그걸 어떤 이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구색 맞출 때만 나오는 차별 금지법에 라넌은 웃으며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다만 임무가 배정됐을 때는 왕자님의 부름에 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제 말이 통하는군. 고마워, 라넌.”

나디사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노디 사용을 허락받고자 벌인 일이 왜 왕세자의 수하로 마무리된 것이지.

“자, 건배나 할까.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걸 축하하네. 나디사 경은 소수 종족의 자랑이 될 거야.”

왕세자는 잔을 들어 나디사를 기다렸다.

그녀는 차분한 얼굴 아래에 불안을 숨겼다. 머뭇거리던 나디사의 잔도 다가가 부딪쳤다.

그러나 그 술을 마시지는 못하였다. 왕세자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의견은 관심 밖의 영역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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