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나디사는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차라리 인질이 어울렸다.
빌려 달라는 둥, 앞으로 연락을 전하는 사람이 올 거라는 둥, 왕세자의 질문에도 라넌이 대신 대답했다.
나디사의 입은 술을 마시는 용도로 쓰다 왔다.
“라넌 경!”
왕세자를 배웅한 라넌 샤스는 이렇다 할 인사 없이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라넌 경. 잠시만요.”
나디사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녀를 쫓았다.
“나중에 따로 부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저는…….”
“출세한 거야. 보기보다 똑똑해서 놀랐어. 왕세자가 자리한 자리에서 숨겨 둔 힘을 개방하는 건 좋은 선택이지.”
나디사는 라넌 샤스가 존경스러웠다. 빈말이 아니었다.
세 시간째 왕세자의 수다를 들어주면서도 라넌은 매무새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숨겨 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갑자기 나온 건가? 더 대단하군. 탄 지 1년도 안 된 신입이.”
“저는 왕자님의 직속으로 들어가길 원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걷던 라넌이 멈추어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원하는 게 뭔데.”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것. 라넌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자와 함께하면, 거기서 더 나아가 그의 눈에 들면 부와 명예가 따른다. 라드군을 아예 나가라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도 속하고 거기에도 속한다는 뜻이야. 그마저도 내 입김 없었으면 불가능했고. 더 할 말이라도 있나?”
라넌이 자신에게 보이는 악의가 익숙했다. 그 신관도, 그 랭키 웨던도, 이 여자도. 자신을 볼 때면 늘 다른 사람 하나를 더 끼워서 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그 전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었다. 그녀의 감정은 너무도 뚜렷하여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수석으로 합격하고도 발톱에 온 이유 말이다. 혹은 노디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이유라던가.
라넌은 갈림길에서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르던 나디사는 갑자기 멈추는 라넌 때문에 자세를 바로 했다.
“맞다. 연달아 일이 터지니까 원래 생각하던 일도 희미해지네. 노디 사용은 승인한다. 정식 휴가가 끝나면 너희 쪽에도 훈련 참가할 자격과 선생을 따로 붙여 주겠다.”
기뻐야 정상이었다. 원하던 것을 얻었고, 그녀의 부대는 정식 부대로 인정받았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디사는 다 던져 주고 떠나는 그녀가 개운치 않았다.
“어째서입니까.”
답이 돌아오지 않을 말을 했는데, 답이 돌아와서인지 그녀는 불쾌한 눈치였다. 돌아본 라넌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저희를 미워하지 않으셨습니까.”
구경꾼이 사라진, 저녁노을이 앉기 시작하는 훈련장 입구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흙이 섞인 바람이 구두 앞을 지나칠 때였다. 라넌의 금안을 채운 감정은 밀려 나가고 없었다.
“그랬지.”
“지금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런데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전부가 아니라 하나만. 그 한 놈을 위해 그럴듯한 부대에 몰아넣었지.”
“그럼 지금은요.”
그 한 놈이 자신이라는 걸 안다. 라넌은 무표정한 나디사를 보며 지친 듯이 웃었다.
포악을 떨거나 욕설을 내뱉거나. 그중 하나를 했다면 놀라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웃었다. 그래서 놀랐다.
“포기했다. 의미가 없다는 깨달았거든.”
라넌은 불친절한 대답만을 던지고 등을 돌렸다. 당당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이었다.
그 안에 있는 모두가 놀랐다. 자신도 놀랐다. 라드의 날개가 두 쌍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그 정도의 힘이 제 것일 줄은 몰랐기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놀라고, 그 무릎 부대의 사람들도 놀랐었는데.
오로지 그녀만이 무언가를 견디는 얼굴이었다.
제 오판을 후회하는 걸 견디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치미는 감정을 견디는 얼굴이었다.
노을 지는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다가, 나디사 또한 왼쪽으로 꺾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지고 있는 황금색의 노을만이 남았다.
* * *
초여름 날씨에 창문을 닫아 두니 의무실은 실외보다 더웠다.
5분만 환기하자고 해도 의무실 관리인은 창문을 열지 말라며 몹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나디사!”
드르륵, 의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디사는 옹기종기 모인 제 부대에게로 걸어갔다.
의무실 중간에 있는 아트리스는 왼팔에 흰 천을, 한쪽 눈은 안대를 했다.
침대에 앉아 동료들과 얘기 중이던 그가 나디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나디사! 있지. 방금 감시관이 왔다 갔는데 말이야. 우리 보고 휴가 갔다 오래! 그리고 그다음엔…….”
“나디사. 몸은 괜찮아?”
아트리스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신나게 떠들던 마벤은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
“조금 쉬니까 괜찮아졌어.”
옆구리 통증은 여전하지만 팔이 부러진 사람 앞에서 엄살떨기가 그랬다.
“이제 휴가 얘기해도 될까?”
“마벤, 천천히.”
나디사는 꽃이 핀 화분을 구경 중이던 그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사는 어쩐 일인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나디사! 집중해 봐.”
하지만 마벤이 계속 질문을 하여 잊을 수밖에 없었다.
“왕자랑 무슨 이야기 했어? 너 진급시켜 준대? 심장으로 간대? 가도 너 우리 잊으면 안 된다?”
“아……. 그게.”
입술이 열리기만을 고대하는 마벤의 시선은 뜨거웠다. 나디사는 민망한 기분에 어깨를 으쓱했다.
“부대를 옮기는 건 아닌 것 같고. 대신 왕자가 필요할 때 부르면 잠시 갔다 오는 느낌이야.”
“응? 그게 다라고?”
“글쎄. 사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안 가는 게 많아서.”
시네라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디사의 앞에 의자를 놓았다.
“이, 일단 앉아, 나디사.”
“아, 고마워.”
아트리스는 침대 주변에 동그랗게 모여 앉는 게 민망했는지 뺨을 살짝 붉혔다.
“일 년 뒤면 나디사는 다른 곳으로 진급하게 될 확률이 높아. 아니, 그렇게 되겠지. 보통 한 번 부대를 정하면 적어도 일 년 정도는 그 부대에 있어야 하니까.”
“뭐야. 김새게.”
“그래도 내 자리는 내려놓아야 될 것 같은데.”
“뭐?”
“어?”
딴청 피우고 있던 그리사조차 놀라서 목소리가 커졌다.
“자리를 내려놓겠다고요?”
“보다시피 우리가 노디 사용권과 정식 훈련에 참여하게 된 건 나디사의 공이 커. 나는 피해를 끼쳤지. 수장 자리엔 네가 맞아, 나디사.”
입을 쉽사리 여는 사람은 없었다. 나디사는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이 분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트리스.”
“응.”
“말했다시피 왕자가 부르면 가야 할지도 몰라. 무슨, 보물 어쩌고 했는데 기억은 안 나고. 수장은 내 자리가 아닌 듯해. 나는 네가 지시해 주는 게 좋아.”
자존심 강한 그가 경합을 끝까지 보지 못한 것이 문제겠다.
하지만 나디사는 더 이상 이 주제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아트리스는 충분히 잘해 왔다.
“그나저나 히아신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주제였다. 다행히 이 주제가 먹혔는지 마벤은 텅 빈 문간 쪽을 바라보았다.
“경합 끝나고부터 안 보여. 머리 다친 사람처럼 멍하니 있더니.”
“지, 진짜 부상 아니야?”
“어우, 몰라. 오늘 걔 때문에 내 심장이 한 백번도 더 떨어져서 지금도 가슴이 아니라 배에 있는 것 같애.”
무모한 그의 경합 스타일을 떠올린 나디사는 숙연해졌다.
기회만 되면 그를 데리고 의무실로 와야겠다. 정신 건강을 위한 상담 치료가 시급해 보였다. 라드군은 그게 무료라고 들었다.
“그나저나 여러분. 주목!”
마벤의 발랄한 한마디에 의무실이 환하게 밝아진 착각이 들었다.
“휴가 때 같이 어디 놀러 가자.”
“싫어요.”
“그, 글쎄.”
“안 돼.”
남자 셋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기운차게 들었던 마벤의 손은 주먹으로 변하여 내려왔다.
“가, 자. 어?”
아무리 마벤이 목소리를 깔아 봤자 셋은 코웃음도 안 치는 분위기였다. 마벤은 유일하게 대답하지 않은 나디사의 손을 잡았다.
“나디사가 이렇게 활약했는데! 이제 곧 출세해서 일 년 뒤면 같은 부대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우리 다 뿔뿔이 흩어질 거라고. 휴가 같이 보내자. 우리가 지금 아니면 언제 휴가를 또 받겠어? 어?”
포상처럼 주어진 이 휴가는 다 같이 쓰는 게 맞지 않냐는 설득이 십 분가량 이어졌다.
의무실에 우리밖에 없어서 망정이지. 듣다가 못한 남자 셋은 한 사람씩 반박에 나섰다.
“각자 휴가를 알아서 쓰고 싶은 사정이 있지 않겠어?”
“휴가를 알아서 쓰고, 날짜를 정해서 모이면 되잖아. 바보야?”
아트리스는 말을 말자는 식으로 아예 누워서 베개에 귀를 파묻었다. 그리사는 가문을 방패로 썼다.
“저 집이 엄해요. 못 나와요.”
“그건 로사 가문의 딸로서 장담하지. 화려한 선물과 로사 가문의 이름이면 어떤 문이든 통과할 수 있거든? 너희 부모님은 내가 설득할게.”
“다시 생각해 보니 알아서 설득할 수 있을 듯해요.”
“왜. 내가 너희 집 가는 게 싫어서?”
“하……. 이만 가는 게 어때요. 환자도 피곤해 보이는데.”
시네라는 활활 타오르는 마벤의 눈을 보고 쪼그라들었다.
“도, 돈도 없고…….”
“돈 없으면 돈 있는 사람이 내면 되잖아! 나!”
남자 셋을 입으로 쓰러트린 용맹한 라드군이었다. 나디사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 하하하하!”
나디사의 청량한 웃음이 의무실을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