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 *
괴한은 참지 못하고 먼저 움직였다. 큰 동작으로 필립의 몸통을 노리며 정권을 내질렀는데, 필립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해내는 데 성공했다.
쉽게 피하기는 했지만, 만약 제대로 적중했다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을 법한 파괴력이 있었다.
몸에 익힌 기술 자체는 완성형에 가까웠으나, 아무래도 응용력이 기준 미달이었다. 필립은 이어지는 다음 공격을 피하며 침착하게 카운터를 꽂아넣었다.
첫 주먹에 턱이 돌아갔고, 두 번째에는 옆구리에 무릎을 꽂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전투력을 잃었을 상황에도 괴한은 고통만 느낄 뿐 미친 들소처럼 필립에게 돌진했다.
‘내구력을 믿고 마구잡이로 돌진하는군. 언제까지 버티나 어디 한번 볼까.’
“크아아아악! 이 미꾸라지 같은!”
괴한은 분노로 비명 같은 함성을 질렀다. 맨발에 고작 수건 한 장을 걸친 필립에게 그의 공격은 전혀 닿질 않았다.
‘생각을 안 하고 싸우니 저렇게 되지.’
수준 이하의 상대에게는 잘 통했겠지만, 공격을 맞출 수 없는 상대에게는 움직이는 샌드백에 불과했다. 원한다면 한 방에 보낼 수는 있겠으나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에 필립은 적당한 타격만 가했다.
필립은 괴한을 비웃으며 그가 뭘 하려고 할 때마다 무릎을 걷어차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렇게 열 수 정도가 지나자, 괴한은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느꼈다.
패배를 직감한 괴한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을 준비했다.
“으아아아! 빌어쳐먹을!”
체중과 오러를 전부 실은 펀치였다. 머리통을 부술 듯 날아오는 주먹을 끝까지 지켜보며, 필립은 옆으로 살짝 빠지며 오른손 훅으로 그의 턱을 완전히 돌려 버렸다.
괴한의 드러난 눈동자가 위로 돌아갔다. 그는 정신이 날아가는 충격에 저항하려는 듯 비틀거리다가, 이내 뇌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뜨거운 온천물에 머리부터 입수했다.
병사와 경호원들이 제 역할을 시작한 건 그때였다. 괴한이 무너뜨린 벽 탓에 발이 묶였던 것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별로 괜찮지 않으니 어서 잡아가십시오.”
“세상에, 저놈과 맨손으로 싸워 이기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 네 명도 때려눕히는 실력자인데… 앗, 죄송합니다.”
기사처럼 무장한 여성 경호원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필립을 바라보다가 그의 복장을 알아차리곤 얼굴을 붉혔다.
“지금 절 칭찬하실 때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이게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가장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라고 해서 이곳을 예약했는데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아… 그게. 정말로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필립의 활약에 감탄하던 경호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숙였다.
“그보다 빨리 들어가자. 필립. 애들 춥겠다. 이게 무슨 일이래니.”
펠리시아가 학생들을 다독이며 그렇게 말했다. 필립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경호원에게 전했다.
“책임자를 불러 주십시오. 이 일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 * *
“이런 씨발, 세상에. 그 빌어먹을 놈을 죽일 수도 없고!”
하르딘 온천의 주인은 하르딘 자작이었다. 레드 드래곤 하르디아나에게 이 온천을 선물 받은 이후 선조들은 가문의 이름조차 하르딘으로 바꾸었고, 대를 이어 온천을 관리했다.
올해로 서른둘이 된 드보라 하르딘 자작은 괴한의 침입 소식을 듣자마자 네 시간 전에 먹었던 빵이 역류하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유세프 상단주가 직접 예약을 주관한 손님에게 행패를 부리다니!”
유세프 상단은 하르딘 온천의 가장 중요한 사업 파트너였다. 대륙의 온갖 국가에서 모이는 손님들의 취향을 만족할 장식품과 건축 자재를 모두 유세프 상회를 통해 들여오기도 했고, 식당에서 쓰이는 식재와 기타 여가 시설에서 쓰이는 자재 또한 유세프 상회의 것이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유세프 상단과의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만한 재앙이 없었다. 귀족이라고 뻗대기에는 유세프 상단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
애초에 수백 년 동안 귀족보다는 상인의 길을 걸어온 가문이었기에 행동은 누구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드보라 하르딘 자작은 곧바로 귀빈, 즉 필립과 학생들이 머무는 별장으로 향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이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저희 측 잘못입니다. 한 번만 너그러이 넘어가 주신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필립과 펠리시아는 자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다짜고짜 찾아와 석고대죄하자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어떻게 해?’
‘받아줘야지 뭐 어쩌겠어?’
눈빛만으로 의견을 교환한 남매 중 동생이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먼저 나서서 사과해 주시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아무래도 저희보다 인생의 선배이시니 너무 예를 갖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가장 사적이어야 할 공간에서 그런 일을 당하셨으니 어찌 기분이 나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아카데미의 학생들이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충격이 클지….”
자작이라는 위치에도 너무 저자세로 나오는 하르딘 자작을 보며 역시 세상은 인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오스왈드 가문이 아무리 대귀족이라고 해도 필립이 유세프 상단과 밀접하게 엮여 있지 않았더라면 저런 반응까지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
필립이 의외로 호의적이자 한숨 돌린 자작은 곧 보상안을 내놓았다.
“피해를 보신 모든 손님께 사과하는 의미로 머무시는 동안 저희 가문이 데리고 있는 가장 뛰어난 요리사의 만찬을 즐기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일 년에 한 번 온천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회원권을 발급해 드리고….”
펠리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과한 보상이었다. 금화로 치면 한 사람당 백 개는 넘을 터였다.
그러나 필립은 거기에 대고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거기에, 열천熱川을 한번 방문하게 해 주신다면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열천을 말입니까? 그곳은 왜? 애초에 열천의 존재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르딘 자작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열천은 하르딘 온천의 근원이 되는 원류였고, 가득한 열기와 수증기 탓에 닭을 집어넣으면 단숨에 삶은 닭이 될 만큼 뜨거웠기에 사람의 발길이 멎은 곳이었다.
“곤란하다면 괜찮습니다.”
“아니, 곤란한 건 아닙니다. 거기서 뭘 하실지 궁금할 뿐입니다. 그 정도로 괜찮다면야….”
딱히 거기서 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자르딘 자작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그 괴한이 적어도 저희가 여기 있는 동안엔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보다 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필립의 질문에 자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그놈이요. 아마 감옥에 며칠 갇혀 있다가 풀려날 겁니다.”
“이 난동을 피웠는데도요?”
펠리시아가 깜짝 놀라서 묻자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람을 크게 상하게 한 일도 없고, 물건 몇 개 부순 게 다이니 녀석의 보호자가 배상금을 내면 풀어줄 수밖에요. 사실 녀석은 모자라기는 해도 심성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 근처에 강도나 도둑들이 씨가 마른 건 녀석과 녀석이 속한 집단 덕이니까요.”
“그와 잘 압니까?”
“라일이라는 놈인데, 어디서 무슨 무술 같은 걸 배우고 와서는 세상의 정의를 세우겠다며 날뛰는 친구입니다.”
‘역시 그놈이었군.’
‘권치’ 라일. 원작에선 가끔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는 NPC였다. 상당히 강하지만 지능이 낮은 설정으로 마주칠 때마다 위기에 처해 있거나, 종종 시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어디 가서 객사할 운명이라는 뜻.
걸어 다니는 시체나 다름없는 이와 엮였다간 인생이 매우 피곤해질 게 분명했다. 게다가 라일이 속한 단체 또한 그야말로 민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피곤한 집단이었다.
“제가 책임지고 이 이상의 불상사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작의 장담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좋습니다.”
* * *
필립은 펠리시아와 루아, 그리고 차냐 우제추를 데리고 하르딘 자작의 조카이자 경비 담당자인 플랜디스 하르딘의 안내를 받아 열천으로 향했다.
관광지까지 와서 갑자기 무슨 산을 오르라는 말에 펠리시아는 불만을 표시했다.
“여기가 뭐라고 같이 가야 한다는 거야?”
‘그러게, 여기가 뭐라고.’
앞에서 말없이 걷고 있던 플랜디스 하르딘 또한 그렇게 생각했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이곳은 더럽게 뜨거운 물이 있는 장소일 뿐이었다.
열천은 온천 뒤편에 자리한 산맥의 초입부였다. 지하로 이어진 동굴을 지나 어느 정도 내려가자 답답하기 그지없는 공기가 느껴졌다.
“손님들,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플랜디스 하르딘은 곧바로 도망쳤다. 그녀는 안내를 맡았을 뿐 속옷까지 땀으로 젖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신발 밑창을 뚫고 들어올 만큼 바닥이 뜨거웠고, 장작을 잔뜩 땐 건식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땀이 몇 방울은 흘렀다.
“…너무 더워요.”
루아는 옷깃을 손가락으로 펄럭거리며 여름날 강아지처럼 헥헥거렸다. 인간의 인내심으로는 견디기 힘든 수준의 더위였다.
“혹시…저는 왜 데리고 오셨죠?”
난데없이 끌려온 차냐 우제추는 도를 넘은 더위에 옷을 벗어 던지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필립만 없었더라면 속옷까지 벗었을 터였다.
‘다 니들 좋으라고 하는 일이다.’
필립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영약으로 충만해진 오러 탓인지 그는 이곳의 열기가 그리 부담이 되지 않았다.
펠리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리 불편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 좋은 영약을 먹었으니 뭔가 변화가 있긴 하겠지.’
그녀 또한 자신의 신체가 얼마나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한 것인지 실감한 듯 표정이 확 밝아졌다. 필립과 시선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은 그녀는 입모양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견디기 힘들거든 이걸로 갈아입고 따라오렴.”
필립은 챙겨 온 짐 속에서 옷가지 몇 개를 내어놓았다. 얼마 전 회원이 된 ‘코피아’의 상품 중 하나로, 유치한 디자인의 줄무늬 수영복이었다.
“교수님도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물에 들어가야 하니까.”
“…물에 들어간다고? 무슨 물에?”
“보면 압니다.”
펠리시아는 뭔가 지독한 불안감을 느꼈으나, 일단은 동생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치만, 나한테는 뭘 할 생각인지 말해 줄 수 있잖아.’
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구석진 곳으로 가 촌스러운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필립의 기준에서나 촌스러운 디자인이었지 그녀들에겐 잠옷보다 더 노출도가 높은 이상한 옷일 뿐이었다.
하지만 훨씬 시원하기는 했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차냐 우제추의 경우는 숲에서 살 때 이것보다 더 시원한 옷을 입었고, 펠리시아는 남매였으며 루아는 애초에 부끄러움이라는 게 별로 없어 보였다.
나막신까지 챙겨 신은 일행을 본 필립은 고개를 끄덕인 뒤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곧 커다란 샘이 나타났다.
‘…여기가 열천이구나.’
지하수가 샘솟는 샘과 별 차이도 없어 보였다. 사소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워낙 뜨거운 나머지 샘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것뿐.
“너무… 더워요. 헤엑….”
차냐는 연신 숨을 내쉬며 체온을 조절하려 애썼으나, 루아는 아예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필립은 루아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몸에 오러를 조금 불어넣었다.
오러가 열기를 밀어내자 루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편해졌다. 불가에 누워 있는 듯한 따뜻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저기 들어갈 겁니다.”
필립은 부글부글 끓는 열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차냐의 갈색 피부가 창백해졌다.
“제, 제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요, 교관님? 저기 들어가면 죽고 말 거예요. 이러려고 절 여기 데려오신 거예요?”
하얗게 질려서 더듬더듬 말을 잇는 차냐를 보며 필립은 피식 웃었다.
이곳 열천은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신체의 내구성을 상승시켜 주고, 살면서 쌓인 몸의 노폐물들을 빼내 주는 효과가 있었다.
게임에서는 지속적으로 HP가 닳는 대신 여러 스테이터스가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는데, 온천과 관련된 이벤트가 있다면 필수적으로 들러야만 하는 코스였다.
당연히 상한선은 존재했으나 기대 수익이 꽤 짭짤했다.
보기에는 지옥의 샘처럼 보이지만, 들어가자마자 죽는 건 아니었다. 물론 루아나 차냐가 맨몸으로 들어갔다간 몇 초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쟈니스나 스테판, 그리고 셰릴은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물론 카밀라도 그랬다. 여기 온 학생 중에는 육체를 단련한 루아나 차냐만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헤일리 바로운은 그가 알기로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곳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안 죽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뜨겁겠지만, 들어가 있다 보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필립은 차냐를 살살 달랬다. 하지만 그녀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필립을 빤히 쳐다보았다. 필립은 어쩔 수 없이 펠리시아에게 손짓했다.
“교수님. 잠깐만.”
“…너 정말 애들을 저기다 집어넣을 건 아니지? 이건 학대야. 알아?”
“알겠으니까 잠깐만 와 봐요. 교수님.”
펠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다가오자 필립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안은 뒤 높게 뛰어올랐다.
“꺄아아아악! 야!! 필립!”
화들짝 놀란 펠리시아는 몸부림을 쳤으나 이미 몸이 공중에 뜬 상태였고, 필립의 팔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펠리시아를 꼭 붙든 채 열천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방에 물이 튀며 펠리시아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꺅! 뜨거워! 이거 놔! 뜨거워 죽을 것 같다고!”
“정말 뜨거워요?”
필립이 묻자 펠리시아는 당연하다는 듯 필립을 주먹으로 때리며 소리쳤다.
“당연히 뜨겁지, 이 바보야! 펄펄 끓는 물에 들어왔는데! 그런데… 왜 안 뜨거워?”
펠리시아는 문득 전혀 뜨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천은 평범히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마치 농도가 낮은 젤리 속에 들어와 있는 묘한 기분 탓에 펠리시아는 신기하다는 듯 팔다리를 휘저었다.
점성 없이 몽글거리는 감촉이 은근히 좋았다.
“지금 입은 그 옷, 그거 열기 차단 마법이 걸린 마법 물품이거든요. 신체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열기를 차단해 줍니다.”
“…이게?”
펠리시아는 수영복의 배 부분을 당겼다가 놓았다. 스판 재질의 수영복이 살갗을 때리는 감각에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펠리시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어떤 변태 마법사가 이렇게 부끄러운 옷에다가 그런 마법을 건다는 거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받은 물건이라서요.”
필립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다리와 팔이 전부 드러나는 수영복이 열기를 차단하는 원리는 그마저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신비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코피아’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의 효과만큼은 제아무리 필립이라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신적인 존재가 관련된 것 같은데.’
다만 그렇게 추측할 뿐이었다.
“차냐, 루아. 너희들도 들어오렴. 몇 분 정도 있다가 나갈 테니 견딜 만할 거다.”
“네!”
루아가 밝게 대답하며 열천에 뛰어들었다.
“…힉!”
차냐는 그 모습에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루아가 헤실거리며 펠리시아의 옆구리에 달라붙은 모습이 보였다.
‘…진짠가?’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차냐도 주춤주춤 다리를 열천에 집어넣었다. 이상하게도 전혀 뜨겁지 않았다. 단지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물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차냐가 마법 물품의 성능에 감동하고 있을 때 펠리시아가 몸을 긁기 시작했다.
“어, 교수님. 간지러워요?”
루아의 질문에 펠리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조금 간지럽네. 아까 씻었는데….”
곧 그녀의 모공이 열리며 지금껏 그녀의 몸에 쌓인 불순물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주변이 검게 물들자 필립은 루아를 잡아당겨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이…이거 왜 이래?”
펠리시아가 울상이 되어 묻자 필립은 웃으며 대답했다.
“몸에 쌓인 노폐물이 빠져나오는 겁니다. 몇 분 정도 지나면 전부 사라질 테니 얌전히 있으세요.”
몸에서 구정물이 나오는 기이한 현상에 펠리시아는 얼굴을 있는 대로 붉혔다. 눈치를 보던 차냐까지 슬금슬금 필립 쪽으로 이동하자 펠리시아는 울상이 되어 눈물을 글썽였다.
“미…미리 말해줄 수 있었잖아… 응?”
이건 차라리 알몸을 보이는 것보다 몇 배는 더한 수치였다. 곧 차냐 우제추의 몸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다행인 건 열천의 정화 기능이 워낙 강력한 덕에 불순물이 금방 증발된다는 것이었다.
필립과 루아의 몸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이 애는….’
애초부터 체내에 불순물이 거의 쌓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혈류를 방해하는 지방이라든지, 오러가 움직이는 통로에 쌓인 탁기는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쌓이는 것들이었다.
그런 게 거의 없다는 건, 애초부터 그런 체질로 태어났다는 이야기였다. 수십만 명에 한 명쯤 나올까 한 체질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필립 또한 그렇게 태어난 듯했다.
‘필립, 이 빌어먹을 놈은 이런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그렇게 허망하게 죽는다는 거지?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군.’
열천의 물이 신기한지 물속에서 손을 휘젓는 루아를 보며 필립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 같은 걸 느낀 필립이 순간 몸을 긴장시키며 어느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 뭐 있어요?”
루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몸은 어떠니?”
“으음… 잘 모르겠어요. 조금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해요.”
“그래? 이제 된 것 같으니 교수님과 밖에 나가서 옷을 갈아입으렴. 교수님? 이제 나가도 됩니다.”
“……그래. 교관이 시키면 해야지.”
풀이 죽은 펠리시아가 투덜거리며 학생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녀와 학생들이 자리를 비우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필립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
“거기 누구십니까?”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균열이 생기더니 곧 붉은 털의 여우 수인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필립은 저 현상을 꽤 많이 구경했다.
‘포탈…?’
드래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포탈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