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 *
하르딘 온천은 칼라리아의 관광지 중 가장 유명한 장소라 할 만했다.
필립은 수도에 있는 리즈리엘을 통해 가장 좋은 별장을 예약해 두었고, 이곳은 돈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직 왕족이나 국가적인 귀빈을 위해 지어진 별장이니만큼 대단히 호화스러웠고, 이 안에 조성된 온천 또한 다른 곳들보다 더 좋은 물이 솟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으나, 가끔 인간에게 호의적인 드래곤들이 있지. 레드 드래곤 하르디아나는 그런 아이다. 어릴 적부터 인간을 좋아해 인간 세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 이 온천 또한 오백 년 전 인연을 맺은 가문의 어린아이가 병으로 죽어가자 자기 둥지에서 흐르는 온천수의 한 줄기를 허락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런데 여기에는 왜 있으신 겁니까?”
필립은 난데없이 나타나 설명하는 프리비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망쳤다.”
그녀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도망쳤다고요?”
“월랑족의 조그만 핏덩이가 자꾸만 내 젖을 빨려고 드는 통에, 차마 손을 쓸 수도 없어 몸을 피했느니라.”
필립은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쇠를 두부처럼 자를 수 있는 오러 마스터조차 드래곤을 도망치게 할 수는 없었는데, 고작 그 조그만 강아지가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게 놀라웠다.
“풉….”
그러나 웃음을 참지 못한 가련한 영혼이 있었다. 짐을 풀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린 펠리시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지금 웃었느냐?”
“아…아뇨.”
프리비아는 겁먹은 표정의 펠리시아가 제법 귀여웠는지 피식 웃었다.
“너무 겁먹지 말 거라.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구나. 물론 아주 오래전에는 인간들이 내게 산제물을 바치곤 했지만….”
“잡아…먹으셨나요?”
잔뜩 겁먹은 펠리시아의 질문에 프리비아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열린 결말을 예고했다.
“글쎄, 어땠을까?”
“….”
펠리시아는 말없이 침을 삼켰다. 프리비아는 쿡쿡 웃으며 그녀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귀여운 것 같으니라고. 이리 와 보거라. 좋은 걸 주마.”
그녀가 다가오자 프리비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뭔가 작은 구슬 같은 것이 두 개 나타났다. 엄지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작은 물체였다.
프리비아는 필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래 네놈에게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던 영약이니라. 재료가 남아 저 아이 것도 하나 만들었으니, 감사하며 먹도록 해라.”
필립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걸 언제 만들고 계셨습니까? 노는 게 질리시면 만드실 줄 알았더니.”
“영약이라는 건 재료도 중요하지만 연단 과정도 그만큼 중요한 법이다. 엘릭서는 재료와 제작 과정이 터무니없이 까다롭지만, 대신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지 않느냐? 그러나 이 영약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수천 년 전에는 제법 흔했다.”
“그렇군요.”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으로 변한 얼로이 백작과 싸운 보상으로 얻은 ‘천사의 눈물’이 들어간 탓인지 구슬은 영롱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방사능 나오는 건 아니겠지?’
“얼른 먹지 않고 뭐 하는 게냐? 특별히 애를 좀 썼으니 손실되는 마나도 거의 없을 게다.”
“…네? 저부터요?”
난데없이 낙수효과의 수혜자가 된 펠리시아가 당황하며 물었다.
“네 것도 만들었다지 않았느냐? 자, 어서.”
펠리시아는 떨리는 시선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필립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펠리시아는 공중에 떠 있는 구슬 중 하나를 집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건처럼 생기지는 않았기에 구슬을 집은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진짜 먹어요?”
이걸 먹어도 과연 무사하겠냐는 의미였으나, 프리비아는 감히 그런 호사를 누려도 되냐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것을 취한다면 네 동생도 분명히 기뻐할 거다.”
‘…정말?’
필립은 펠리시아가 수의사의 손에 붙들린 강아지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걸 애써 외면했다. 펠리시아는 각오를 굳힌 뒤 구슬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구슬은 혀에 닿자마자 즉시 녹아내렸다. 식도를 타고 넘어간 정체 모를 액체는 곧 그녀의 온몸에 퍼졌고, 펠리시아는 자신의 몸에 오러가 충만해지는 걸 느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대단…이 아니라, 잠깐만…!”
그러나 그 충만함이 도를 넘었다는 걸 인지한 순간 펠리시아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비틀었다.
“프리비아 님?”
필립이 드래곤을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이런. 내가 실수했구나. 두 개 모두 네놈을 기준으로 만들고 말았느니라. 네놈이라면 별 어려움 없이 흡수했겠지만, 저 계집아이에겐 조금 버거웠던 모양이지. 어쩔 수 없이 내가 좀 도와야겠구나.”
프리비아는 펠리시아의 몸을 붙들고 누르더니 상의를 걷어 배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손으로 그녀의 드러난 맨살을 더듬으며 폭주하는 마나를 가라앉혔다.
‘저러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군. 성추행 드래곤 같으니….’
드래곤이라고 해서 실수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사소한 실수를 할 리는 없었다. 펠리시아의 표정이 편해지고 경련이 잦아드는 것을 보며 필립 또한 손을 뻗어 구슬을 집은 뒤 입에 넣었다.
필립은 곧 몸속에서 격렬한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본래 그가 가진 오러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기에 그는 단전에 쌓인 오러를 빠른 속도로 회전시켜 들어온 마나가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합류하도록 유도했다.
그 과정은 제법 고통스러웠고, 힘들었다. 그러나 큰 무리 없이 마나를 흡수해 낼 수는 있었다.
“이건…….”
“어떠냐? 제법 효과가 있지 않으냐?”
“확실히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엘릭서에 비하면 그따위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필립은 조금 덜 고마워하기로 했다.
* * *
생에 처음으로 온천이라는 곳에 와 본 루아와 셰릴은 반짝이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서로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관광지로 유명하다는 건 경치에도 매우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였다. 수건으로 몸을 가린 소녀들은 은은한 분홍색을 띠는 돌과 수증기, 그리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경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내…내가 이런 곳에 와도 되는 걸까?”
차냐 우제추는 감동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아직 여행부의 일원이 아니었으나, 가입 신청서를 내어 둔 상태였기 때문에 필립이 데려온 것이었다.
쟈니스와 카밀라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욕 준비를 마쳤다. 그녀들은 몇 번 정도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교관님하고 헤일리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스테판 선배님도요. 아, 펠리시아 교수님도!”
루아가 중얼거리자 쟈니스가 깜짝 놀라 말했다.
“교관님이라면 몰라도 남자애들은 안 돼. 루아.”
“응? 교관님은 왜 되는데?”
더 깜짝 놀란 셰릴이 묻자 쟈니스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러면 무슨 뜻인데?”
“그냥…에잇!”
쟈니스는 대답하는 대신 셰릴의 팔을 잡아 뜨거운 온천물 속으로 이끌었다. 셰릴은 깜짝 놀라 몸부림쳤으나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대로 물속에 잠겨야만 했다.
“꺄아악! 뜨거워!”
그걸 시작으로 다른 아이들도 온천에 몸을 담갔다. 루아는 몸을 감싸는 열기와 그 속에 은은히 녹아든 마나를 느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지내는 별장의 욕실의 물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물리적인 열이 아닌 뜨거운 뭔가가 느껴졌다.
금세 몸이 나른해지고 몽롱해졌다.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 편안함에 소녀들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밖이 소란스러워진 건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셰릴의 옆에 앉아 자본의 달콤함을 만끽하고 있던 차냐 우제추의 날카로운 감각에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잡혔다.
“잡아라! 귀빈들이 계신 곳에 들어가도록 둘 수 없다!”
“목숨을 걸고 막아!”
그리고 구역을 나누기 위해 세워진 고풍스러운 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깜짝 놀란 여자아이들은 즉시 온천에서 빠져나왔으나, 이곳에 침입한 괴한을 마주하는 것이 더 빨랐다.
검은 천으로 얼굴과 몸을 가린 누군가였다. 외관은 마치 암살자처럼 보였으나, 검술이든 무술이든 사람을 해치는 데 조예가 있는 이라면 괴한에게서 풍기는 기세를 읽을 수 있을 것이었다.
“북부에는 마족이 창궐하여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고, 온갖 괴수와 사악한 것들이 도사리는 이때 귀족이라는 것들은 제 배를 불리기 바쁘니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남녀를 판단할 수 없는 목소리로 세태를 비판하던 괴한은 문득 눈앞의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냐. 너희는? 웬 젖비린내 풍기는 꼬맹이들이…?”
급히 수건으로 몸을 가린 쟈니스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구시죠? 이게 무슨 짓이에요?”
괴한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분노를 표출했다.
“…빌어먹을 체펠드 공작, 그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가 아직 솜털도 안 가신 어린 것들을 데려다 주지육림을 즐기는구나. 그 저주받을 작자는 어디 있나?”
쟈니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는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생들이라고요. 체펠드 공작님이 왜 나오는 건데요? 열 살 이후로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분인데!”
“여긴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너희 중 하나는 날 따라와야겠다. 그래야 체면 때문에라도 날 찾으려 들 테니.”
쟈니스는 같은 공용어를 쓰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에 말문이 막혀버린 그녀는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숨을 삼켰다.
그때 괴한이 쟈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네가 좋겠군. 생긴 걸 보니 귀족 출신인 모양인데… 음?”
괴한은 쟈니스의 어깨를 붙들려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기세를 느끼곤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당신 누구야?”
소란을 접하자마자 달려온 필립과 펠리시아였다.
필립은 곧바로 괴한과 마주했고, 펠리시아는 놀란 아이들을 챙겼다.
“너는… 체펠드 공작의 호위기사인가?”
괴한이 묻자 필립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체펠드 공작이 여기서 왜 나오지? 네가 누구냐니까?”
“농민들의 피를 빨고 살점을 잘라 모은 돈으로 너 같은 실력자를 고용했다는 말이냐? 그는 정말 죽어 마땅하구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답답함을 느낀 필립이 갑자기 치민 짜증을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묻는다. 너는 누구냐?”
“시간을 끌면 기사단이 도착할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구나. 돈에 팔려 주인을 잘못 택한 네 운명을 탓하라!”
괴한은 무장하지 않은 맨몸으로 필립에게 덤벼들었다. 필립은 그의 발놀림을 보며 가볍게 놀랐다. 무술을 정말 제대로 익힌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수건 한 장으로 하체를 겨우 가린 필립은 스텝을 짧게 밟으며 괴한의 주먹을 팔로 받아냈다. 분명히 가드를 했음에도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오러를 신기하게 쓰는데?’
마치 무협 소설에 나오는 침투경처럼, 필립은 괴한의 오러가 자신의 내부에 침투하는 것을 인식했다.
물론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필립은 괴한의 무릎을 짧게 끊어 찼다. 공격이 제대로 적중하자 괴한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윽!”
그 뒤로 이어진 건 치열한 수 싸움이었다. 두 사람은 상대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직접적인 충돌을 자제했다.
괴한이 판단하기에 필립은 상당한 고수였다. 저렇게 짧고 간결하면서도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공격당한 무릎에서 상당한 고통이 느껴졌다.
“너는… 대체 누구냐?”
필립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먼저 묻지 않았나?”
“체펠드 공작과는 무슨 관계냐?”
“…미치겠군.”
필립은 분노로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수증기 탓인지 화가 더 빨리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짜증과 분노 덕에 필립은 저 괴한이 누구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답답한 새끼가 세상에 두 명일 리는 없지.’
원작 ‘아카데미 히어로즈’에서 가장 유명한 민폐 캐릭터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필립은 걸어다니는 재앙 덩어리와 엮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단단히 결심했다.
‘두들겨 패서 쫓아내야겠군.’
두 번 다시는 그와 마주칠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흠씬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