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 * *
“상회 일은 이런 게 가장 좋단 말이지. 이렇게 중간중간 쉴 시간이 많거든.”
용병대장 버틈은 위스키를 홀짝이며 용병대의 막내인 오웬에게 말했다. 필립과 리즈리엘을 비롯한 일행이 엘페니아 숲 안에서 용무를 처리하는 동안, 용병대와 상단의 짐꾼들은 야영지에서 대기했다.
딱히 뭘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술과 식량을 축내며 빈둥거리는 일뿐이었다.
“그나저나 부럽네요. 지금쯤 그 귀족 도련님은 아름다운 엘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죠?”
오웬이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질투를 내비치자 버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러워만 해라. 부러워만. 질투하는 순간 네 인생은 망한다. 그 도련님이 어디 보통 도련님으로 보이냐? 내 평생 오우거를 두들겨 패서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나 아냐?”
‘아니, 씨발. 좀 질투할 수도 있지 왜 지랄이야?’
오웬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오우거에게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낄 만큼 강하다는 거다. 너 이 새끼야. 너는 길을 가다 다 뒈져가는 오우거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냐?”
“어…… 음… 글쎄요. 무섭지 않을까요?”
“그래. 평범한 놈은 그렇게 생각할 테고, 머리가 좀 돌아가고 약삭빠른 놈은 오우거가 완전히 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를 뽑거나 힘줄이나 가죽을 가져가겠지. 물론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놈은 보자마자 순식간에 내뺄 테고.”
버틈의 말에 오웬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도망가요? 오우거는 죽어가잖아요.”
“에라, 이 병신아.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생각을 해봐라. 오우거가 그렇게 죽어간다는 건 놈을 그렇게 만든 뭔가가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 아니냐?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일단 내빼고 봐야지. 어쨌든, 만약 죽어가는 오우거를 불쌍하게 여겨서 뭐 상처에 포션이라도 뿌려 주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겠냐?”
잠시 고민하던 오웬이 곧 대답을 내어놓았다.
“…미친놈이 아닐까요?”
버틈은 동의했다.
“미친놈이 맞기는 해. 하지만 정말로 정신이 훼까닥 돈 놈이 아니라면 오우거가 갑자기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서 자기를 공격하더라도 상관없는 놈이겠지. 대충 비교하자면 우리가 덫에 걸린 여우를 풀어주는 것과 비슷해. 그냥 불쌍한 거야. 그래도 되니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오웬은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버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도 글렀군, 칼질은 제법 하길래 잘 키워서 용병대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빨리 은퇴하고 싶었던 버틈은 다른 후계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보기에 오웬은 실력이 좀 쌓였다 싶을 때 어딘가에서 객사할 운명이었다.
“됐다. 이 새끼야. 마샤는? 어디 갔냐?”
유일한 여성 대원의 이름을 언급하자 오웬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뭐 꽃 따러 간다고 하던 것 같던데요.”
“꽃은 니미럴, 똥 싸러 갔겠지. 칼밥 먹고 사는 년이 자기도 여자라고 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알겠으니까 어디 가서 널브러져 있어라. 술 꼴아서 쳐 자지는 말고. 응?”
“예예.”
“에휴. 병신들.”
다른 두 명은 어중이떠중이였으나 오웬과 마샤는 똥오줌 못 가리던 애새끼 시절부터 버틈이 데리고 키운 용병이었다.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큼 아끼진 않아도 이왕이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게 버틈의 생각이었다.
위스키를 입에 가득 물고 입에서 굴리던 버틈은 문득 저 멀리서 어떤 한 무리의 집단이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씨발, 뭐야?’
도적 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고작 다섯 명뿐인 용병대라도 도적들과는 장비 수준이 달랐기에 두 배가 넘는 수라도 상대할 수 있었다.
대충 곁눈질로 봤을 때 저 집단은 동종업계 종사자였다. 제대로 장비를 갖춘 용병들이 상단의 야영지에 찾아온 것이었다.
숫자는 스물, 게다가 볼일을 보러 간 마샤가 묶인 채 그들에게 붙들려 있는 모습도 보였다.
버틈은 즉시 위스키를 내뱉고 그의 도끼를 잡았다.
“야, 개새끼들아, 니들 뭐냐?”
그는 적어도 아카데미 주변 지역에선 가장 이름을 날리는 용병이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숫자만으로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버틈의 질문에 상대 중 대장격인 사내가 앞으로 나오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리즈리엘 유세프에게 고용된 용병들인가?”
버틈은 도끼를 더 세게 잡으며 입을 열었다.
“뭘 묻고 싶으면 우리 애부터 좀 놔 주고 물어야지. 씨발아. 대가리에 도끼 꽂히고 싶으면 그대로 더 지껄여 봐라.”
용병 사내는 버틈의 으름장에도 피식 웃을 뿐이었다.
“시골 촌놈들이라 그런지 주둥이가 더럽구먼. 꼬락서니를 보니 뭐 캐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다 뒈져라. 병신들아.”
그가 칼을 뽑자마자 버틈은 번개처럼 허리춤에 손을 뻗어 투척용 손도끼를 집었다.
그대로 허리의 힘과 반동을 이용하기만 해도 충분한 살상력을 가진 투척을 해낼 능력이 있었다.
회전력을 잔뜩 먹은 손도끼가 사내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고, 사내는 기겁하며 옆으로 몸을 숙였다.
그를 지나친 손도끼가 용병 무리 중 하나의 목에 깊게 박혔고, 그걸 신호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 덮쳐. 이 병신들아!”
“뭉쳐! 뭉치라고! 내가 뭘 할 수 있게 해!”
대장들의 목소리에 용병들이 반응했다. 반응 자체는 숫자가 훨씬 적은 버틈 용병대가 빨랐다. 가죽 갑옷조차 입지 못한 오웬이 욕설을 뱉으며 검을 챙겨 버틈의 근처로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대장?”
“씨팔 나라고 알겠냐? 뒈지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라. 최대한 뭉쳐서 시간만 끌어, 내가 뭐라도 해볼 테니까.”
오웬이 알겠다고 대답하자마자 버틈은 허리춤과 허벅지, 그리고 망토에 숨긴 투척용 손도끼를 하나만 남기고 모두 던졌다. 여섯 개를 던지는 데 고작 몇 초가 필요할 뿐이었다.
두 개는 빗나갔으나 네 개는 적들에게 적중했고, 순식간에 네 명이 전력에서 벗어났다.
아까 하나를 눕혔으니 남은 숫자는 열다섯. 그래도 대단히 불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흔이 가까운 나이까지 용병으로 살아온 버틈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에휴, 씨발.”
그는 전투 도끼를 오른손에 든 채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애초에 쪽수로 압박할 생각이었는지 상대는 활을 이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했다.
몇 개의 창이 그의 옆구리와 심장, 그리고 어깨를 노렸다. 버틈은 도끼를 크게 휘둘러 그것들을 튕겨냈다.
“어어?”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난 버틈의 실력에 당황한 용병들은 이어진 공격에 둘이나 당하고 말았다. 무거운 전투 도끼의 강력한 일격이 그들의 갈비뼈를 부수고 폐를 찢어발겼다.
물론 그 과정에서 버틈 또한 완전히 무사할 수는 없었다. 어깨를 노렸던 창날 하나가 조금 비껴가 그의 뺨을 길게 찢었다.
“하, 씨할….”
그는 새는 발음으로 욕설을 뱉은 뒤 살기등등한 눈으로 남은 용병들을 노려보았다.
막내인 오웬 또한 평범한 용병보다는 수준이 조금 높았다, 그는 용병치곤 특이하게 창이나 도끼가 아니라 검을 사용했는데, 어디서 배우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다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비록 버틈처럼 다수를 뚫을 수는 없었으나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상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만했다.
“아니 씨발, 그냥 도적 쫓으려고 고용한 용병이라며?”
습격자들의 대장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 도망쳤겠지만, 이미 같은 편을 다수 잃은 상황에서 후퇴를 택할 수는 없었다.
“밀어! 쪽수로 밀어! 저 새끼도 다쳤잖아!”
그때 뒤에서 단검 한 자루가 날아와 그의 날개뼈 근처에 박혔다. 묶여 있던 여자 용병, 마샤가 어느새 밧줄을 풀고 어디선가 주운 단검을 던진 것이었다.
물론 그의 용병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후방에 자리한 용병 하나가 들고 있던 둔기로 마샤의 어깨를 내리쳤다.
“끄아아아아악!”
어깨가 완전히 박살나는 고통을 느끼며 마샤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비명을 들은 버틈이 몸을 움찔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흥분하면 상황이 어려워진다는 걸 알았지만, 사람의 감정은 마음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씨발롬들이!”
그가 흥분해서 날뛰기 시작하자 버틈 용병대에게로 넘어왔던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용병 둘이 더 죽었지만 버틈의 체력 또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의 숨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느려지자 열 명 남짓 남은 용병이 그를 둘러쌌다.
“으아! 대장, 뭐라도 좀 해 봐요! 이러다 죽겠네! 죽는다고!”
오웬이 죽는 소리를 내었다. 버틈은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끼며 한탄했다.
‘…요즘 너무 쉬운 일만 했나 보군.’
* * *
“…음? 이게 무슨 소리지?”
필립은 리즈리엘과 함께 용병들과 짐꾼들이 머무는 야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캐슬러와 프리비아가 당장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하루나 이틀 정도 더 엘페니아 숲에 머물러야 했기에 그들에게 이틀 정도 더 대기해야 한다고 전달할 생각이었다.
“왜 그래요? 당신?”
리즈리엘이 묻자 필립은 입맛을 다셨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좀 빨리 가야겠어.”
필립은 그녀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리즈리엘의 허리를 팔로 감아 자신의 옆구리에 밀착했다.
“어머?”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소리를 질렀겠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리즈리엘은 딱히 싫지 않았다.
필립은 평지를 달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숲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 상황에서도 뭔가 낭만을 느끼고 있던 리즈리엘은 곧 나뭇가지, 그리고 나뭇잎이 머리와 뺨을 때리자 비명을 질렀다.
“꺅! 잠깐만요, 필립. 조금만 천천히 가면….”
필립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거의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는 곧 야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전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리즈. 이 야영지를 아는 사람이 누구지?”
마침 리즈리엘도 병장기 소리와 비명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전장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여긴… 저희 상회 사람들밖에 모르는 곳인데…? 빨리 어떻게 좀 해 봐요.”
“델루안 유세프겠군. 저들을 잡아다가 뭘 할 생각이지?”
필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물론 그 검의 정체는 네리아였다.
―쿠우울….
그의 머릿속으로 귀여운 코골이 소리가 울렸다.
네리아는 요즘 하루의 대부분을 자는 데 쓰고 있었다. 걱정이 된 필립이 프리비아에게 질문하자 그녀는 에고 소드가 성장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대답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요즘 좀 허전하단 말이지.’
까불거리는 네리아가 없으니 삶이 질이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었기에, 필립은 그녀가 하루빨리 기운을 차리길 바랐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상황이 정리되면 오도록 해.”
“알겠어요.”
필립은 리즈리엘을 대기시킨 뒤 전장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