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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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 새끼는?”
난데없이 끼어든 필립을 본 용병 몇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필립의 행색이 눈에 들어오자 그들은 머리가 차갑게 식는 걸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보통 잘생기고 예쁜 청년이나 여자가 검을 들고 있으면 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얼굴이 잘생기고 예쁘다는 건 잘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였고, 이 세상에서 예쁜 마누라나 잘생긴 남편을 얻을 수 있는 건 돈 많은 부자거나 귀족들.
검처럼 익히기 어려운 무기를 가르치는 건 귀족 가문에서나 할 일이었으니 보통은 가문에서 십여 년 동안 오러와 검술을 단련하고 나온 살인 병기라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눈앞의 미청년은 십수 명의 무장한 인원 앞에서 긴장한 모습조차 없었다.
‘…어?’
전투로 달아오른 머리가 차게 식기에 충분한 모습.
필립은 용병들이 얼어붙은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기에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딱히 다 죽일 생각은 없으니 괜히 저항하지 말고 무기 내려놓으세요. 저항하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번 크레센트 때와는 사정이 좀 달랐다. 암살자들은 사람을 죽여 돈을 버는 인간 백정들이었으나, 용병들은 합법적인 직업인이었다.
물론 그들 또한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은 같더라도 이 대륙의 상식으론 조금 난폭한 용역 직원 정도로 볼 수 있었기에 함부로 피를 보기 조금 꺼려졌다.
곧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부상자들이 내는 신음과 거친 숨소리가 들렸으나 필립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버틈 용병대와 상단의 짐꾼들은 거의 모두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쪽은 누구요?”
몸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며, 상대 용병대의 대장이 물었다. 필립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검을 들지 않은 왼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의뢰서.”
“뭐… 의뢰서?”
“팔다리 하나씩 잘린 채로 교수대에 매달리기 싫으면 얌전히 의뢰서 내놓으세요. 설마하니 의뢰서도 없이 여기까지 사람을 죽이러 온 건 아닐 테고,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용병이 아닌 도적이니 여기서 다 죽습니다.”
‘씨발. 뭐라는 거야?’
대장은 이를 악물고 손에 든 철퇴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버틈 용병대는 전투력을 거의 잃었고, 그의 용병대는 아직 전력이 꽤 남아있었다.
저 청년, 필립이 귀족에 검을 수련했다는 건 알 수 있었으나, 실전을 몇 번이나 겪은 용병 열을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러를 다룰 줄 안다고 해도, 열 명은 부담스러운 상대일 터였다. 그는 일단 허세를 부려 보기로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용병에게 의뢰서를 내놓으라는 건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다는 건 아시는지?”
필립은 대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시퍼런 오러의 칼날이 그의 검을 덧씌우기 시작했고, 네리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우으응… 주인님?
“죽이고 가져가라는 말입니까? 그리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래야만 한다면 어쩔 수 없죠. 직업 정신이 특출나시군요.”
존경받아 마땅한 프로 정신에 감탄하며 필립은 검기를 두른 채 대장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대장의 얼굴이 마치 저승사자를 마주한 병자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 그만큼 제가 진심으로 항복한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의뢰서 여기 있습니다.”
통짜로 된 판금 갑옷조차 버터처럼 가르는 게 바로 검기였다. 그 초인적인 기예 앞에서 배짱을 부릴 만큼 대장은 용감하지 않았다.
대장이 품에서 의뢰서를 꺼내어 필립에게 바쳤다. 필립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뒤 그것을 받아 펼쳤다. 명백히 무방비 상태로 보였으나, 대장은 자신의 운을 시험할 생각이 없었다.
“씨발… 살았군.”
몸 곳곳에 상처를 입으며 분전했던 버틈 용병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버틈은 즉시 어깨를 당한 마샤를 향해 숨을 몰아쉬며 달려갔다.
“아이고, 이 미친년아. 이게 무슨 꼴이냐? 밧줄을 풀었으면 몸부터 숨겨야지 왜 단검 같은 걸 던져? 내가 그렇게 가르쳤냐?”
마샤는 반쯤 우는 목소리로 킥킥댔다.
“…도와드려도 왜 지랄이세요? 그런데 대장. 저 팔에 감각이 없어요. 아까까진 정말 더럽게 아팠는데… 이거 낫는 거겠죠?”
버틈은 즉시 그녀의 부상을 살폈다. 어깨뼈와 슬개골이 완전히 조각나 다시 회복되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천금을 들여서 고위 성직자나 백색 마탑의 치유 마법사를 찾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그건 어지간한 귀족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간신히 사람 꼴은 갖추고 살겠군. 한동안은 병신처럼 살아야겠지만.”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버틈이 그렇게 말하자 마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의뢰서를 살피던 필립은 미간을 좁히며 상대 쪽 대장을 노려보았다.
“의뢰서의 내용이 산적 토벌인데, 이게 맞습니까?”
“아…아니, 그게….”
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단검에 당한 상처를 손으로 눌렀다.
“이 사람들이 산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테고, 같은 용병인 걸 뻔히 알았을 텐데 왜 공격했는지는 의문이군요. 뭐, 어차피 이유는 뻔하니 따로 묻지 않겠습니다.”
보나마나 델루안 유세프의 발악일 터였다. 이들 용병과 짐꾼 중 한두 명을 납치해 고문하여 정말로 엘프 노예를 사로잡으려 했다는 증언이라도 하게 하려고 했을 터.
물론 재판을 열 귀족은 멍청이가 아니었기에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겠지만, 증언이 나왔으면 수사를 해야 하는 게 이치였다.
말하자면 다음 행동을 할 시간을 끌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었다.
‘그러려면 누군가가 이 현장을 조작해야 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필립은 문득 하나의 기척을 느꼈다.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 꽤 강한 이가 숨어서 이쪽의 상황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필립은 다시 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이번에는 뭘 달라는 말씀이신지….”
필립이 말없이 턱끝으로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철퇴를 가리키자, 대장은 공손한 태도로 그것을 들어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것을 몇 번 휘둘러 본 필립은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철퇴를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북서쪽으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란 활엽수 위였다.
“흐어업!”
다급한 기합 소리와 함께 검기가 쇳덩어리를 가르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공격을 방어해 낸 누군가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한 중년 사내였다. 얼굴이 칼자국으로 가득했고, 인상 또한 날카롭고 냉막하기 그지없었다.
“어린놈이 제법 감이 좋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운은 없구나. 네가 날 알아채지만 않았더라도 이미 망한 판은 버릴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중년 사내에게선 전문가의 냄새가 났다. 어떤 전문가냐고 묻는다면, 사람을 찌르거나 베고, 혹은 죽이는 데 아주 익숙한 전문가라고 대답할 수 있을 터였다.
밑창이 얇은 신발부터, 두껍지 않은 장갑, 그리고 왼쪽 어깨에만 착용한 견갑 같은 것들은 살인에 최적화된 장비였다. 괴수를 상대하는 데 저런 것들은 거의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필립이 던진 철퇴를 가른 건 분명한 검기였다.
‘델루안이 증거 인멸을 위해 보낸 사람이겠군.’
중년 사내는 비웃음이 담긴 시선을 필립에게로 향했다.
“…필립 오스왈드.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교관이라지? 그 명문의 교관이라면 제법 검을 쓸 줄 알겠군. 그래 봤자 샌님들 칼싸움 놀이겠지만 말이다.”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절 압니까?”
중년 사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 곧 죽게 될 놈의 신상을 조사하는 건 그리 효율적이지 않으니까.”
그때 습격자들의 대장이 중년 사내를 알아본 듯 힘이 풀린 다리를 무릎으로 짚었다.
“…그 씨발년이 날 속였군. 사검蛇劍을 뒤에 딸려 보내? 우릴 다 죽일 셈이었어.”
‘사검’이라는 별명은 용병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듯 버틈 또한 그 이름에 반응했다.
“저 중늙은이가 그 유명한 사검이라고?”
중년 사내는 뱀의 검, 사검이라 불리는 용병계의 전설적인 검객, 비스트로였다. 필립에게 있어선 별 영향력이 없는 엑스트라였으나 용병들에게 있어 그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군가가 뒤가 구린 의뢰를 용병들에게 맡겼을 때, 의뢰의 흔적을 뒷탈 없이 지우고 싶다면 고용하는 사람이 바로 사검 비스트로였다.
‘용병제일검 뭐 그런 건가?’
그의 정체에 대해 딱히 큰 관심이 없었던 필립은 그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델루안 유세프가 보낸 겁니까?”
중년 사내, 사검 비스트로가 헛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 그년이 보냈지.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너희는 여기서 다 죽을 텐데.”
필립은 그의 말을 대충 흘려넘기고 요점만 말했다.
“혹시 재판에서 그 내용을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의사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죽이고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살 만큼은 사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아직 죽기는 싫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비스트로는 필립이 그를 무시한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반평생을 공포의 상징으로 살았던 그는 피식, 하고 웃음을 작게 흘리더니, 곧 목청을 높여 껄껄 웃기 시작했다.
“하하, 으하하하! 으하하하하핫!”
몇 초 정도 그렇게 웃던 그의 발 근처에서 갑자기 펑, 하는 폭음이 터졌다. 곧 흙먼지가 솟아올랐고 그의 몸이 아주 잠깐 사라졌다.
필립은 자신의 목을 향하는 살기를 느끼곤 검을 뽑았다. 가장 중요한 정보인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하는 것은 달인 수준으로 검을 연마한 검사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아주 쉽게 자신의 왼쪽 무릎 옆을 노리는 공격을 간파해 내었다.
사라졌던 비스트로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고, 검기를 두른 그의 일격이 빈자리를 갈랐다. 필립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공간이었다.
‘…아니?’
젊은 검사가 이렇게 쉽게 피할 만한 게 아니었다. 어지간히 훈련된 기사라도 방심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비기였다.
비스트로는 경악하면서도 다음 수를 펼쳤다.
어쩌면 평범한 횡베기로 보일 수 있는 공격. 필립이 뒤로 크게 물러나거나 검을 맞받아쳐야만 하는, 이지선다를 강요하는 수였다.
딱히 피할 이유가 없었던 필립은 침착하게 그의 공격을 방어했다. 그 순간 비스트로의 견갑에서 녹색 안개 같은 것이 분사되었다.
바람을 마주한 탓에 그 안개 중 일부가 필립의 몸에 닿았고, 비스트로는 그 순간 승리를 확신했다.
‘이게 뭐야?’
필립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이름 모를 꽃향기와 같은 냄새였다. 딱히 몸에 이상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비스트로는 분명히 자신이 승리했다는 듯 도취된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필립에게 다가갔다. 필립은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으로 대충 마비당한 척을 했다.
“진짜 싸움이라곤 모르는 애송이 새끼가, 감히 어디서 거들먹거려? 카아악~”
‘아니, 이건 선 넘었지.’
그의 편도에서 끔찍한 액체가 연성되는 순간 필립은 재빨리 그의 턱을 올려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