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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72화 (72/119)

072화

* * *

사룡 네게브.

그녀는 이천 년 전 태어난 블루 드래곤으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족들의 세상을 관찰하려다 마계 대공 중 한 명에게 붙잡혀 온갖 실험을 당한 뒤 세뇌당했다.

성체 드래곤이었다면 그렇게 되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으나, 당시의 그녀는 아직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도 못한 어린 개체.

백여 년에 달하는 고문과 육체 실험은 어린 해츨링의 정신을 완전히 망가뜨렸고, 블루 드래곤 대신 ‘사룡’으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그 강대한 힘을 이용해 자신을 실험하던 사령술사와 엘더 리치들을 쳐 죽이고 마계 대공으로 다시 태어났다.

물론 필립에겐 월간 행사나 다름없이 스쳐 지나가던 보스 중 하나였으나, 이 세상의 사람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준비물을 구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구하고 나면 그리 어렵지는 않아. 엘세우스가 역린을 한 번 찔렀다고 했나? 왜 게임에서 사룡이 약해진 상태였는지 알 것 같은데?’

그녀는 굉장히 클리셰적인 보스였다.

‘내 몸이 완전했다면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따위의 대사를 남기고 토벌당하는 그런 전형적인 악역.

세계관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필립은 게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은 최대한 수집하려 했기에 그녀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는 누군가에 의해 약해진 상태였고, 그것만으로도 필립은 그녀에게 꽤 고전했었다.

‘엘세우스. 당신이 세상을 한 번 구했었군.’

그는 눈앞의 악령에게 존경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게임 속에서야 죽어도 무한정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었으나, 엘세우스는 그냥 첫 도전에 그녀의 약점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마계의 사령술사들과 리치들은 드래곤 하트를 오염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라고 말입니다. 그 방법은 그녀의 몸에 달린 비늘 중 드래곤 하트와 가장 가까운 오직 하나를 극도의 사령술과 흑마법이 담긴 촉매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필립의 설명이 이어지자 프리비아가 그게 말이 되냐는 표정으로 필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가능한 게냐? 고작 비늘 하나로 드래곤 하트를 오염시킨다는 게?”

“아니죠. 고작 비늘 하나가 아닙니다. 그 비늘 하나로 인해 네게브의 몸을 경유하는 모든 마나가 마계의 그것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 비늘의 역할은 일종의 여과기거든요. 인간들이 마실 수 없는 물을 식수로 바꾸는 이치를 반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

설명이 부족한 것 같자 필립은 마땅한 비유를 찾기 위해 잠시 말을 골랐다. 프리비아가 멍청한 게 아니라, 여과기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기 때문일 터였다.

“드래곤 하트를 거대한 호수라고 생각해 봅시다. 소똥 한 수레를 그 호수에 쏟아붓는다고 해서 그 호수가 지독한 냄새를 풍기겠습니까?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저절로 분해되어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매일 한 수레, 혹은 몇 수레씩 백 년을 그렇게 한다면?”

“…그래. 그런 식이라면 가능하겠어. 아니, 생각해 보면 그 방법뿐이겠지. 드래곤이 스스로 타락해 사령술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면 말이다.”

생각을 마친 프리비아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너는… 아니다.”

필립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고 몸을 살짝 떨었다. 이전에 그녀가 필립을 오해해 몇 대 쥐어패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좀 곤란해졌을 터였다.

엘릭서 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프리비아가 필립에게 실수했기에 지금 무사한 것이었다. 물론 프리비아가 염치를 아는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래서 매도 미리 맞는 게 낫다고 했나.’

―그래서, 달라질 것이 있나? 그게 정말로 약점이었다 하더라도,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면 대현자는 결국 나와 내 형제들을 실험체로 소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게 배신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음… 그러니까….”

엘세우스의 반박에 잠깐 생각하던 필립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엘프들의 힘이 그 대현자라는 분의 생각보다 조금 약했던 게…….”

―뭐라고?

잠깐 개었던 하늘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우려는 기색이 보이자 프리비아가 짜증을 냈다.

“아, 좀 닥치라니까?”

―…….

필립이 급히 설명을 보충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대현자 아레올라라는 마법사가 딱 거기까지 알아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약점에 어떤 대비가 되어 있는지 몰랐던 거죠. 그리고, 엘세우스 님께선 반쯤은 성공하셨습니다.”

“반쯤 성공했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실제로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 타격은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군. 그 애는 본래 드래곤이기에 완전한 마족이 아니라 ‘서약’에서 자유롭지. 이 땅에서 활동하려고 하면 얼마든 그럴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어쩌면 단지 우리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악령 엘세우스는 심각한 표정이 된 채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원한을 놓고 승천할지도 몰랐다.

그런 기대와 함께 필립은 엘세우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내가 그를 이해해야 하나? 정령왕 한 명과, 오러마스터 한 명이 목숨을 걸었다. 그 일격으로 공략할 수 없는 약점을 약점이랍시고 내놓은 그놈을?

필립은 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뿐입니다.”

필립은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었다.

“왜 사룡한테 처맞고 인간한테 그러십니까?”

* * *

캐슬러 무르엘라가 무아지경에 빠져든 장소로 돌아온 필립은 곧 루아의 환영을 받았다.

“어, 교관님이다! 교관님!”

루아는 재빠르게 다가가 한쪽 팔을 끌어안았고, 곧 필립의 반대쪽 손에 뭔가 주머니 같은 게 들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건 뭐예요? 열매라도 따 오신 거예요?”

“음. 아니, 이건….”

‘엘세우스의 악령이었던 것’을 손에 든 필립은 루아의 몸에 그것이 닿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이건 궁금해하지 않는 게 좋아. 좀 더럽거든.”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는 프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꽤 피곤하고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마법사 언니 어디 아파요?”

프리비아는 힘겹게 웃으며 대답했다.

“…좀 피곤해서 그렇단다.”

“그 귀신은요? 이름이 엘세우스? 아무튼 그 유령은 어떻게 됐어요?”

쟈니스가 질문했다.

“잘 해결됐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확히는 잘 갈려 손에 든 주머니 안에 영체가 담겨 있었으나 필립은 거기까지 설명하진 않았다. 그는 아직까지 깨달음의 황홀경 속에 있는 캐슬러를 힐긋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으면 캐슬러 님께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일단 마을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쟈니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쟈니스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도 새언니랑 오라버니를 돌볼 거예요.”

“그래? 그러면 날 따라와서 옷가지나 먹을 것 따위를 챙기는 편이 좋을 거다. 이리 오렴.”

그 말을 들은 신시아 무르엘라가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쩜, 아가씨께서 기특하기도 해라. 아, 그 상인 아가씨는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마을로 돌려보냈어요.”

“그렇군요.”

어쩐지 리즈리엘이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신시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뒤 쟈니스와 루아를 데리고 엘프 마을로 돌아갔다.

엘프 마을은 소란스러웠다.

“외곽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요.”

마을에는 첨탑이나 성벽 대신 높은 나무 위에 궁수 몇 명을 배치되어 있었는데, 무장을 갖춘 엘프 몇 명이 센티넬 유르실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정찰대가 나가서 확인해 봐야 해요. 외곽 숲에 문제가 생겼다면 외부인들이 뭔가 문제를 일으킨 게 분명해요.”

정찰대들의 요청에 유르실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분들은 그럴 분이 아니야. 너희가 오해하는 거야.”

다른 엘프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비록 유르실이 정찰대 하나의 대장이라곤 해도 엘프 사회에선 아직 젊은 엘프에 불과했기에 그들의 행동을 강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희는 임무를 수행해야 해요. 명령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끼리 나가서 확인할 수밖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정찰대 하나가 희생되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을 거야. 아, 저기 오셨네.”

유르실은 마침 돌아온 일행을 발견하곤 얼굴이 확 밝아졌다가, 곧 뭔가 숫자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다시 표정을 굳혔다.

“다른 분들은요…?”

그녀의 질문에 프리비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 바가 아니니 어서 비키거라.”

“네? 아, 네. 죄송합니다.”

겁을 잔뜩 먹은 유르실이 급히 길을 비키곤 엘프들에게도 어서 비키라고 손짓했다. 프리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필립의 오금을 발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왜 그러십니까?”

“날 좀 업어라. 성치도 않은 몸으로 무리를 했더니 눈이 자꾸 감기는구나.”

그녀가 솔직한 태도로 도움을 요청하자 필립은 살짝 놀라 되물었다.

“이젠 딱히 숨길 생각이 없으십니까?”

“어차피 알 만큼 아는 놈에게 이런 걸 숨겨서 뭐하겠느냐? 일단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너와 이야기해야겠다.”

필립은 그녀의 요청대로 프리비아를 등에 업었다. 그녀는 필립의 손이 엉덩이에 닿자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모든 걸 내려놓고 그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아픈 몸으로 용언을 남발했으니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랐겠지.’

필립은 엘세우스를 가루 신세로 만든 그녀의 위용을 떠올리곤 헛웃음을 뱉었다.

멀지 않은 미래.

드래곤이 마족과 인간 사이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이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할 때, 프리비아는 어쩌면 가장 강력한 아군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었다.

‘일단 몸보신을 좀 시켜줘야겠군.’

미래에 그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려면 그녀의 몸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겸사겸사 은혜도 좀 입혀 놓고 지금보다 더 친해지면 그녀는 싫은 척을 하면서 해 달라는 건 어지간하면 들어줄 드래곤이었다.

‘엘릭서부터 완성해야겠어.’

아카데미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그것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필립은 숙소로 쓰는 방까지 그녀를 업고 들어갔다. 그녀와 리즈리엘과 같이 쓰기로 되어 있던 방 안에는 이미 리즈리엘이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

“드르렁… 커으윽….”

몸이 안 좋은지 입을 벌리고 잠들었음에도 리즈리엘은 꽤 아름다웠다. 다만 코골이가 좀 심할 뿐. 그러나 프리비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필립의 등에서 내려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리즈리엘의 옆에 누워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흡… 흐으읍….”

리즈리엘이 물에 빠진 꿈이라도 꾸는 듯 팔다리를 휘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필립은 쟈니스와 루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어서 움직이자꾸나.”

쟈니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 둬도 되는 거예요?”

필립은 뭐라고 대답하지 않은 채 캐슬러와 신시아에게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 위해 자신의 배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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