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 * *
―…아프다……머리가….
원혼의 형체에서 팔 같은 형체가 솟았다.
―너는… 인간…이군….
“뭐 인간이죠. 절 보니까 막 화가 납니까?”
필립은 원혼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 행동에 프리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자아를 깨우려고 하는 건가? 무슨 생각이지?’
눈앞의 영체는 아직 원한을 가진 영혼에 불과했다. 그러나 필립이 저런 식으로 영혼의 자아를 깨우게 되면 거대한 힘을 지닌 악령으로 변화할 것이 분명했다.
‘엘세우스? 나도 아는 이름이지. 천 년 전엔 제법 유명했고.’
엘프 중 고대 혈통을 이어받은 하이엘프로서, 오러 마스터이기도 했고, 정령왕의 계약자이기도 한 영웅 중의 영웅.
오래 산 엘프들에겐 유명한 이름이었으나 인간에겐 수십 세대가 넘는 시간이었기에 지금은 잊힌 이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당시에도 마계의 대공이었던 마룡 네게브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프리비아가 아는 정보도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저놈은 대체 무슨 근거로 저 원혼이 엘세우스라고 단정을 짓는 건가.’
그건 그녀의 뛰어난 두뇌로도 판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세우스의 존재 자체는 알 수도 있다 해도 그것과 이것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프리비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필립의 이런 점을 좋아했다.
본래 한 땅에서 수천 년쯤 살다 보면 어지간한 일은 모두 손금을 읽는 것처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예측을 저렇게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선 필립뿐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 궁금해 죽겠구나.’
그리고 필립은 이번에도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당신의 이름은 엘세우스. 고귀한 하프 엘프이며, 오러 마스터이자 바람의 정령왕의 계약자였습니다. 천 년 전 네게브와의 전투에서 아군에게 배신당해 사망했습니다.”
―으… 으으… 머리가… 머리가 아프군… 나는… 그래… 그곳에서… 그렇게….
필립이 늘어놓은 정보를 들은 부정형의 원혼이 뭔가로 변할 것처럼 꿈틀거렸다.
필립의 뒤에 숨어 있던 쟈니스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게… 맞는 건가?’
나름대로 밝던 밤하늘에 시꺼먼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가 봐도 뭔가 큰일이 난 것 같은 상황에서 쟈니스는 문득 루아와 리즈리엘을 바라보았다.
리즈리엘은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돌아가는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리즈리엘의 속마음은 뻔했다.
‘내가 여길 왜 온다고 했을까?’
엘프 마을에 남아있자니 양심에 조금 찔렸을 뿐이었다. 갑자기 커진 사건의 규모는 그녀의 영민한 두뇌를 순간적으로 멈출 정도였다.
한편 루아는 언제나 그렇듯 필립이 하는 일을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냐면 필립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 원혼의 형태가 변했다. 마치 쪼그라드는 것처럼 압축되었으며, 곧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뾰족한 귀와 길고 정갈한 머리카락은 그가 생전에 분명히 엘프였음을 증명했다. 다만 부정한 안개와 희미한 영적 물질이 그를 감싸고 있어 그가 완전히 악령으로 변모하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래. 엘세우스… 엘프의 수호자이며… 왕족이었지. 배신당해 죽은 머저리이고….
그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더니, 잠시 후 몸을 일으켰다. 필립은 그가 일어나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듭니까? 엘세우스?”
엘세우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필립을 쏘아보았다.
―덕분에 아주 또렷하지. 인간. 오랜 세월 막연한 증오 속을 떠돌던 기분이었는데,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할 것들을 눈앞에 두니 마치 어제까지 살아있었던 것 같군.
“죽이다니, 누굴 말입니까?”
필립이 묻자 엘세우스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일행 전체를 가리켰다.
―당연한 걸 묻는구나. 너희 벌레 같은 인간들을 말하는 것이…… 흠?
거침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프리비아의 앞에서 멈칫했다. 그는 뭔가 보여선 안 될 걸 보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순간 프리비아가 급히 손을 들어 올려 엘세우스의 염화念話가 필립과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했다.
―왜 드래곤이 인간들과 같이 있는 거지? 저 가증스러운 버러지들을 다시 지키기로 한 건가?
프리비아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필립을 바라보았다.
“뭘 할 생각이냐? 이놈은 제법 위험하다. 전생에 정령왕의 계약자였으니, 그 친화력을 이용해서 정령들을 타락시킬 수 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소멸시키는 편이 낫겠구나. 시간이 더 지나만 조금 버거워질지도 모른다.”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괜찮습니다.”
―저 말투, 저 목소리. 당신은 지혜로운 은룡, 프리비아겠군. 전장에서 당신에게 입은 은혜가 있지만, 인간을 보호하는 이상 내 적이라 할 수 있겠지.
프리비아는 엘세우스의 적대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라고 쫑알대는 거냐?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라. 네놈은 부끄럽지도 않으냐? 한때 대륙 십이성이라 불렸던 놈이 악령 같은 게 되어 있으니… 쯧쯧”
생전의 그였다면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조금은 고전했겠지만, 그에겐 성가신 바람의 정령왕이 없었다.
‘…저 사람. 생전에는 정말로 착했겠군.’
보통 악령이었다면 저렇게 말로 하는 법이 없었다. 분노를 유발하는 존재가 보이면 곧바로 있는 힘을 모두 써서 죽이려고 할 뿐이었다.
악령이 되어서도 먼저 말이 나오는 성격이라면, 생전에는 정말로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리라.
‘생각해 보면 마계 대공이 되어서도 꽤 젠틀했었지.’
다른 대공에게 동료 캐릭터가 완전히 죽는다면 몸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건 기본이고,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사망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엘세우스는 그의 애검인 ‘역성의 레이피어’로 깔끔하게 심장을 뚫어 죽이곤 했다. 시체를 어디 전시하지도, 다시 도전할 때 동료 캐릭터의 목을 보관했다가 능욕하지도 않았다.
주인공 동료의 시체로 암수 한 쌍의 키메라를 만들어 주인공의 눈앞에서 온갖 추태를 부리는 대공도 있는 판에 저 정도면 신사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프리비아의 몇 마디에 그는 평정심을 쉽게 잃었다.
―당신이 뭘 아는가? 나와 내 형제, 자매들은 역겨운 배신을 당해 죽었다. 그것도 저 천박하고 멸종해 마땅할 인간들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엘세우스가 손을 들자, 타락한 정령 몇 개체가 소환되었다.
‘정령 몇이 실종되었다고 하더니, 여기서 이렇게 되어 있었군.’
타락한 정령은 일반 정령처럼 자연력을 다루지는 못하나, 악령의 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필립은 일단 리즈리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애들 데리고 캐슬러 님과 신시아 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있어. 금방 해결하고 돌아갈 테니.”
“…네?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다고 그래?”
“아니… 그… 이게 이래도 되나? 아무튼 알겠어요.”
전투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전한 상황도 아닌 이 묘한 분위기에 리즈리엘은 적응할 수가 없었다. 뭔가 대단히 위험한 것 같기도 하면서도 필립과 프리비아는 그리 급해 보이지 않았다.
리즈리엘은 쟈니스와 루아의 표정을 살폈고, 곧 그녀들도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지?’
“저분들 방해하지 말고 우리는 가자. 얘들아. 응?”
쟈니스는 필립이 신경 쓰인 나머지 거절하려다가 안 가고 뭐 하냐는 듯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립을 발견하곤 급히 움직였다.
“빠, 빨리 가요. 언니.”
―누구 마음대로 가겠다는 것이냐?
엘세우스가 타락한 정령들을 움직여 리즈리엘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강한 저주의 힘이 깃든 정령들이 아이들을 덮치려는 찰나 프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내 마음대로다. 여기서 소멸당하기 싫으면 얌전히 좀 있거라. 한 번 허무하게 뒈졌으면 충분하지, 두 번 죽으면 더 억울하지 않겠느냐?”
엘세우스는 원통한 표정으로 인간 셋이 저 멀리 사라지는 광경을 구경해야만 했다.
* * *
“그래서. 너만 한 놈이 왜 원혼이 된 거냐? 네가 배신당했다고는 들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프리비아가 먼저 질문했다.
―…나는 그렇게 잊힌 건가? 사룡 네게브와의 전투에서, 나와 내 형제자매들은 목숨을 바쳐 싸웠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처럼 지냈던 정령들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소멸을 각오했고, 우리 또한 그 자리에서 모두 죽을 작정으로 항전했다.
엘세우스가 대답하자 프리비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거야 나도 아는 일이다. 그러니까 누가 배신했냐고 묻는 게 아니냐? 이놈, 머리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그냥 소멸시키는 게 낫지 않겠느냐?”
마지막 질문은 필립을 향한 것이었다. 필립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곧 엘세우스는 분노 어린 목소리로 그를 배신한 범인의 이름을 말했다.
―대현자 아레올라. 놈이 내게 알려준 사룡의 약점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그 여자에게 역린 같은 건 없더군.
프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역린? 사룡에게 그런 게 있나?”
―그 가증스러운 놈은 사룡의 심장과 목 사이에 거꾸로 솟은 비늘이 있다고 했다. 그 비늘에 닿기 위해 이백 하고도 열두 명의 엘프와 다섯 명의 하이엘프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고, 내 자매 또한 목숨을 바쳤지. 그 끔찍한 희생 끝에 나는 그 비늘에 다다를 수 있었으나, 그 여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입니까?”
필립이 묻자 엘세우스는 짜증이 치민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인 필립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프리비아가 아니었다면 진작 덤벼들었을 터였다.
프리비아는 콧방귀를 뀌며 엘세우스를 타박했다.
“흥, 그 아레올라라는 놈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건지 모르겠군. 그런 개소리를 믿고 동족들을 꼴아박은 네놈이 잘못한 게다. 그런 주제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인간을 죽이네 마네 하는 헛소리를 하는 게냐?”
“아니, 좀….”
필립은 할 수만 있다면 프리비아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때리고 싶었다. 대체 저 예쁜 입술에서 어떻게 저런 밉살맞은 말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엘세우스는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비록 내가 이 자리에서 소멸당하더라도….
큰일이 벌어지기 전 필립이 먼저 나섰다.
“아니, 잠깐만요. 그 정보 사실입니다. 엘세우스 님은 제대로 된 정보를 들은 게 맞습니다. 사룡 네게브의 약점은 그곳입니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그 발언을 악령이 된 엘세우스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프리비아 또한 의문을 느끼며 질문했다.
‘한 다섯 번 잡아 봤으니까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필립은 근처의 나뭇가지를 찾아 땅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사룡 네게브는 해츨링 시절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계를 탐험하다 납치당한 드래곤입니다. 본래 드래곤에겐 사룡이라는 종족이 없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드래곤 하트 때문인데, 순수한 마나를 거의 무한정 생성해 내는 동력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호자의 업을 타고난 드래곤을 타락시키기 위해선 이 동력원 자체를 오염시켜야 하는데…….”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네놈이 그 대현자라는 놈보다 사룡에 대해 잘 안다는 말인가? 그 여자와 직접 자웅을 겨뤘던 아레올라보다도?
“…뭘 모르면 가만히 좀 쳐 듣거라. 아레올라라는 그 하찮은 인간 마법사가 드래곤인 나보다 드래곤을 잘 안단 말이냐? 아직까진 틀린 게 없으니 조용히 좀 하란 말이다.”
필립의 말을 듣던 엘세우스가 그의 말을 끊자 집중해서 듣고 있던 프리비아가 짜증을 냈다.
―…….
엘세우스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이미 죽은 영혼이라고 해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의 절대자는 프리비아였기에, 존재를 내걸고 싸울 게 아니라면 말을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