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 * *
“이보게, 우리 이러지 말고, 조금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지. 날 요정에게 넘긴다고 해서 자네에게 이득이 될 게 없지 않은가.”
청색 마탑의 마법사 지올로 마트란은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필립을 설득해야만 했다.
“왜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지? 내버려 두면 무슨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르는 마법사 하나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건데?”
“잠시 잊은 모양인데, 나는 아직 죄를 짓지 않았어. 실질적으로 아무도 피해를 본 게 없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 보게. 만약 나를 놓아준다면 내가 가진 모든 아티팩트를 자네에게 넘기고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겠네.”
필립은 지올로의 제안에 코웃음을 치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크윽!”
“만티코어를 소환하려 드는 것, 요정을 분노하게 하는 것, 둘 중 하나만 시도해도 마탑의 공적이 되기에 충분한 악행이지. 그런데 내가 뭘 믿고 당신을 놓아줘?”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지올로가 시도하려 했던 것 중 하나만 성공했어도 기사단 하나가 투입되어야 해결할 수 있는 재앙이 발생했을 터였다.
“…그거야, 어차피 이젠 막지 못하기 때문이지. 날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네는 마법사라는 족속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군.”
지올로는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고통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필립이 되묻자 지올로는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내가 고작 내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 일을 계획한 것 같은가? 마법사의 존재 의의는 지식의 전승이기에, 단지 내가 관측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험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말일세.”
그러기 싫었지만, 필립은 지올로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 미친 마법사는 만티코어의 소환이 결국에는 이뤄지고 말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자네 학생들을 살리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할 텐데? 만티코어는 강력한 괴수가 아닌가? 프리비아 아카데미가 비록 명문이라지만, 만티코어를 당해낼 것 같지는 않군. 고작 교관 둘과 학생이 상대할 만한 놈이 아니잖은가? 크흐흐.”
이젠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듯 지올로는 킥킥대며 필립을 조롱했다.
“…아. 그러셔?”
필립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지올로를 한 대 더 걷어찼다. 무릎 뒤쪽을 정확히 가격했기에 탈구가 일어난 듯 지올로는 그 자리에 무너져 비명을 질러댔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만티코어 같은 건 애초부터 안중에도 없었어. 내가 걱정하던 건 요정의 분노였으니까.”
그렇게 말한 필립은 화가 치밀었는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지올로를 짓밟기 시작했다.
‘이 새끼 때문에 게임 난이도가 몇 배는 어려워졌지.’
설정상 이 세상의 요정들은 인간을 꽤 좋아했다. 그러나 여기서 지올로 마트란이 만티코어를 소환하면서 호감도가 수직하락하게 된다.
자연 현상에서 태어난 요정들은 마魔와 관련된 피조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사악하고도 끔찍한 괴수인 만티코어는 요정의 입장에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고, 그것을 소환해 낸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폭주한 요정은 근처 인간 마을을 공격하고, 결국 기사단과 마탑이 나서 요정을 토벌하면서부터 요정과 인간의 관계는 어그러지게 된다.
‘그걸 이 새끼 혼자서 해냈지.’
몇 년 후, 마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오래된 산과 호수, 그리고 강의 주인인 요정들의 도움이 필요해지게 될 터였다.
필립은 지올로의 경동맥을 압박해 그를 기절시킨 뒤, 눈에 보이는 자루에 지올로의 연구 자료로 보이는 것들을 모두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만티코어하고 싸우는 거예요?
네리아가 묻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되는 셈이지.”
―으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것 같네요. 주인님이 쓰는 월광검은 만티코어 같은 괴수한테 치명적이니까요.
“그 전에, 일단 이 빌어먹을 놈을 요정에게 데려가자. 만티코어하고는 얼마든지 싸우겠지만 분노한 요정과 싸우고 싶진 않거든.”
―그러면 애들이 위험한 거 아니에요?
“펠리시아가 알아서 하겠지. 뭐.”
필립은 펠리시아를 믿었다. 그녀 또한 한 세대에 겨우 한 번 나올 법한 검의 천재아였기에, 고작 만티코어 같은 마족도 되지 못한 괴수한테 쉽게 당할 리가 없었다.
“회전검도 가르쳐 놨는데, 어쩌면 이길지도 모르지.”
* * *
여행부 학생들은 호수의 경치에 푹 빠져 구경하기 바빴다.
“뭐, 확실히 경치는 괜찮네. 물비린내가 좀 나는 것만 빼면.”
신기루 호수는 나름대로 절경이라 불릴 만한 경치였다. 이름 모를 꽃들이 곳곳에 피어 있었고, 오래된 나무들이 하늘 높이 뻗은 데다 맑은 호수에는 얼굴이 비쳐 보일 지경이었다.
보는 사람만, 정확히는 스테판만 없었더라면 쟈니스는 셰릴에게 호수에 들어가자고 제안했을지도 몰랐다.
학생들은 호수 주변을 돌며 뭔가 특이한 점이 없는지 살폈다.
이런 신비한 분위기의 명소에선 심심찮게 유물이나 마법 물품 같은 게 발견된다는 걸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호수가 워낙 넓어서 한 바퀴를 수색하면서 돌려면 해가 지고 말 것 같습니다만.”
스테판이 문득 말했다. 확실히 수색이 목적이라면 네 명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건 효율적이지 않았다.
“그러면 조를 나누자. 스테판 너랑 셰릴이 같이 움직이고, 내가 1학년 후배랑 같이 움직일 테니 뭔가 발견한 게 있으면 하늘 위로 화염 화살 마법을 날리는 거야. 어때?”
“좋은 생각 같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꽤 그럴싸한 계획이었기에 스테판과 셰릴 또한 동의했다. 그들이 진행하던 방향 쪽으로 사라지자 쟈니스는 루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너는 날 잘 따라와야 해. 여기서 길을 잃으면 큰일이니까.”
쟈니스는 루아를 바라보며 신신당부했고, 루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너무 좋아.’
그녀는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과 이런 식으로 외출하는 게 처음이었다. 비록 쟈니스나 셰릴, 스테판과 아직 친해지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리 와. 좀 더 가까이 붙어도 돼.”
쟈니스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손짓했다. 루아는 쟈니스과 팔이 맞닿을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교관님께서 한 번 돌아보셨다곤 하지만, 나무 위나 수풀 사이에 괴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해.”
“네. 선배님.”
“그런데 너, 혹시 머리는 누가 묶어 준 거니?”
“제 머리카락이요? 교관님이 묶어 주셨는데.”
루아의 대답에 쟈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 섬세하게 머리를 땋을 줄 아는 사람은 귀족 가문에서 오래 일한 유모나 하녀일 거라 여겼던 그녀는 남자인 필립에게 저런 솜씨가 있다곤 믿을 수 없었다.
“그래? 어쨌든, 이제 슬슬 출발하자. 별일이 없다면 셰릴과 반대편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두 소녀는 스테판과 셰릴이 향한 반대 방향으로 호수를 빙 둘러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걷자 쟈니스와 루아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산에서 아저씨라는 사람하고, 쌍둥이 남동생과 살았다고? 14년 내내?”
“네.”
“그러면 아카데미에는 어떻게 입학한 거니? 학비가 싸지는 않았을 텐데. 아, 널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쟈니스는 루아의 말투와 눈빛에서 세상의 더러움이 묻지 않은 순수함을 느끼곤 안절부절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루아는 쟈니스의 그리 길지 않은 삶에서 처음으로 만나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강아지와 같은 순진한 눈망울을 마주하자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그냥 아카데미로 가라고만 했거든요.”
“그래? 그러면 더 묻지 않을게. 어쨌거나, 심심하거나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하면 꼭 날 찾아오기야.”
“네에.”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다. 쟈니스에겐 루아가 그랬다. 위로 남자 형제만 세 명인 쟈니스는 처음으로 여동생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둘러보다가 뭔가 이상한 게 보이면 바로 나한테 말해야 해. 알겠지?”
쟈니스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돌려 다시 호수를 살폈다. 그러자 손에 묘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을 잡았나?’
루아가 손을 잡은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돌리려던 그녀는 그 감각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갗이 아니라 축축하고 미끈미끈하다는 걸 깨닫고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어?”
쟈니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귀여운 갈색 머리 소녀 대신 지느러미와 비늘이 달린 징그러운 물고기 인간이 있었다.
온몸이 파란색 비늘로 덮여 있었고, 징그러운 생선 대가리가 달린 인간.
뻐끔.
그 끔찍한 생물체가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자신을 바라보자, 쟈니스는 견디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끼야아아아아악!”
* * *
“도련님. 방금 비명이 들린 것 같아요.”
스테판과 함께 쟈니스와 반대 방향으로 걷던 셰릴이 문득 말하자, 스테판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쟈니스 아가씨의 목소리였는데.”
이미 꽤 걸었기 때문에 두 그룹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정 반대편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숨에 달려가기도,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
“…비행 마법으로 호수를 건널까요?”
“아니, 위험해. 저 먼 거리를 마법으로 날아가려면 정신력을 꽤 소모해야 할 텐데, 그러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 수 없으니까. 일단 상황을 확인해 보자.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천리안 마법으로 호수 반대편을 살피는 게 나을 거야.”
셰릴의 제안에 스테판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날카롭고 빠른 판단에 셰릴은 감탄하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천리안 마법은 제가 미리 준비해 뒀어요. 그러면 나무 위에 올라가서 한 번 볼게요.”
비행 마법을 시전한 셰릴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스테판은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가, 그녀가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자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헉!”
셰릴은 스테판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듣곤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자신이 치마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 올려다보면 안 돼요!”
그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이 치맛자락을 향했다.
다른 남자였다면 수치심으로 폭발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온 스테판이기에 그나마 부끄러움이 덜했다.
나무 위에 올라선 셰릴은 비행 마법을 해제하고 미리 외워 둔 천리안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곧 그녀의 눈앞에 사람 얼굴 크기의 반투명한 구슬 같은 것이 생겨났고, 셰릴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구슬이 공중을 날아 호수 반대편으로 향했다.
“어?”
그리고 셰릴은 구슬로부터 제공된 시야를 통해 호수 건너편이 아닌 호수 한가운데에서 이상 현상을 발견했다.
수면 아래에서 뭔가 기분 나쁜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본 것이었다.
곧 잔잔히 일렁이던 호수 표면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파도가 일었고, 수면을 가르며 뭔가가 날아올랐다. 그 뭔가의 정체를 확인한 셰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녀는 다급히 나무에서 내려오며 소리쳤다.
“쟈니스가 위험해요. 도련님. 빨리 저쪽으로 가야 해요!”
“뭐? 무슨 일인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스테판이 묻자 셰릴은 공포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다시 소리쳤다.
“만티코어! 호수에 만티코어가 나타났다고요!”
“뭐? 만티코어? 여기 그게 왜 나타나?”
스테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으면서도 재빨리 비행 마법을 준비했다. 그가 아는 셰릴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만티코어가 나타났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셰릴, 지금 즉시 야영지로 돌아가서 교관님과 교수님에게 알려야 해. 아가씨와 루아한테는 내가 가볼게. 우리가 같이 움직여 봤자 의미가 없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그는 자신이 위험한 쪽을 맡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