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 * *
창의적인 발상이 꼭 좋은 결과로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는 법.
나무에 못을 박아 천막을 고정하자던 스테판의 계획은 꽤 창의적이었으나, 그걸 실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에는 보다 못한 펠리시아가 친절히 학생들에게 지지대 없이 천막을 설치하는 법을 강의해야만 했다.
“천막을 지지할 못을 박을 땐, 이렇게 매듭을 한 번 꼬아서 단단히 고정해야 해. 그래야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고 천이 팽팽히 당겨지거든.”
신문물을 접한 마법 학부 학생들은 그녀가 끼어든 지 고작 십여 분 만에 그럴싸한 천막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정말 대단해요!”
셰릴이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펠리시아는 부담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으며 제안했다.
“그러면, 이제 불을 피우고 뭐라도 좀 먹지 않을래? 아침을 먹지 않았더니 조금 배가 고파서.”
‘그나저나 얘는 어딜 간 거야?’
펠리시아는 어느새 사라진 필립을 원망하며 마른 나뭇가지를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세 명이나 되었기에 불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잠시 후 모닥불 위에 올라간 냄비에서 수프 끓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할 무렵, 필립이 되돌아왔다.
“어딜 갔다 왔어, 교관?”
필립은 대충 대답했다.
“잠깐 근처에 괴수 같은 게 있나 살펴보러 다녀왔습니다.”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였기에 펠리시아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스읍.”
짭짤한 육포와 품질 좋은 양젖 치즈, 그리고 으깬 감자가 들어간 수프는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은 그 환상적인 냄새 탓에 침을 꼴깍꼴깍 삼켜 댔다.
“이렇게 호화로운 수프는 처음 보는 것 같아. 수업 때는 야전 환경을 만든다면서 부츠를 넣고 끓인 맛이 나는 수프를 먹었던 것 같은데.”
곧 일행은 든든한 식사를 마치고 원기를 회복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뭘 해야 하죠?”
문득 스테판이 물었다.
“호수를 한 번 탐험해 보는 게 어떨까. 어쩌면 소문으로 들리던 이상 현상을 너희가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필립이 제안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그 제안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십 대 소년 소녀들에게 새로운 장소란 언제나 모험의 대상이기 마련이었고, 경치 좋은 호수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나와 교수님은 여기 있을 테니, 너희끼리 다녀오렴. 근처에 위험한 건 딱히 보이지 않았으니 너희끼리 가도 안전할 거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부르러 오고.”
“네. 그럴게요.”
학생들이 떠나가자 필립은 펠리시아와 단둘이 남았다.
“우리는 뭘 해?”
“글쎄. 누나는 잠이나 한숨 자는 게 어때? 어제 늦게까지 업무를 본 것 같던데.”
필립의 말대로 펠리시아는 요 며칠 제대로 쉬질 못했다.
학기 초반의 일정은 단련된 검사인 그녀마저도 지치게 할 만큼 살인적이었고, 오늘도 필립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아카데미에서 학사 관련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그러면 난 좀 잘게. 두 시간 정도만.”
펠리시아는 그렇게 말하곤 팔을 위로 쭉 밀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 다음에는 뭔가 베고 잘만 한 걸 찾는 모양인지 두리번거렸다.
“하아암. 꼭 깨워줘야 해.”
자기 배낭을 베고 눕자마자 펠리시아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필립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푹 자.”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펠리시아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야영지를 나섰다.
‘애들은 애들이고, 내 것부터 일단 챙기고 봐야지.’
슬슬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달성할 시간이었다.
필립은 배낭 옆에 매 두었던 네리아를 풀어 허리에 찼다.
―…하암. 어디 싸우러 가세요?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지 네리아의 목소리에 나른함이 섞여 있었다.
“뭐, 그런 셈이지. 더 자고 싶으면 다른 검을 차고 갈까?”
―맨날 그렇게 섭섭하게 말할 거예요?
* * *
“빌어먹을, 제기랄. 정말 어쩔 수 없나?”
‘신기루 호수’ 인근의 한 동굴, 파란 로브를 입은 한 사내가 마법 실험대에서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실험대 위에 놓인 건 하늘색의 반투명한 보석. 몇 년 전 그가 호수의 요정에게 선물 받은 물건이었다. 사내는 그 보석을 이용해 요정이 부리는 신비한 힘을 몇 년째 연구했다.
마법과도, 오러와도 전혀 다른 힘. 드래곤의 고유 능력인 ‘용언’처럼 오직 의지만으로 자연을 다루는 그 능력의 비밀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는 영원토록 마법 학계의 역사에 남을 수 있을 터였다.
‘요정의 장난은 대체 무슨 법칙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인가?’
소년 시절 숲의 요정이 친 장난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그는 스스로 연구를 시작할 능력을 갖춘 그 순간부터 요정의 흔적을 추적했다.
꽤 오랜 시간을 수색에 투자한 결과 이 ‘신기루 호수’를 찾아냈고, 몸담고 있던 황색 마탑에서 탈퇴하고 물을 다루는 마법을 깊게 연구할 수 있는 청색 마탑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호수의 요정과 친밀도를 쌓았고, 그녀의 장난에 몇 번이나 어울려 주며 현상을 연구하고 기록했다.
그러나 얻은 건 크게 없었다.
선량한 요정의 악의 없는 장난만으로는 충분한 자료를 수집할 수 없었다.
요정의 장난 또한 마법처럼 어떠한 힘을 다루는 것, 분명히 어떤 법칙이 존재할 터.
“…자료가 모자라. 조금 더 많은 현상을 관측해야 하는데.”
본래 마법사가 요정의 힘을 연구하는 것은 금기였다. 마탑은 변수 그 자체인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함부로 자극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극하지 않으면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 법.
사내의 시선이 실험대 옆에 둔 수정 구슬로 향했다. 수정 구슬 표면에 어린 소년 소녀들이 웃으며 떠드는 모습이 떠올랐다.
교복을 보니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
‘너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본래 진보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그는 언젠가 다가올 이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준비를 해 왔다.
‘호수의 요정을 분노하게 만들어 그 힘의 근원을 관측할 수 있다면…….’
물론 그 대가는 수정 구슬 속의 학생들이 치르게 되겠지만, 사내는 마법을 위해 양심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가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호수 근처에 숨겨 둔 소환 술식이 발동할 것이었다. 오래전 거래한 고대의 괴수, ‘만티코어’를 소환하는 술식이었다.
‘비밀 탐식자’라 불리는 만티코어는 요정의 영역에서도 날뛸 만한 마법적인 능력을 지녔으니 사내가 잘만 보조한다면 요정이 지닌 능력의 밑바닥을 볼 수도 있을지 몰랐다.
“미안하다. 날 용서해라.”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지팡이를 들었다. 그 순간 오두막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냐!”
사내는 외우려던 주문을 취소하고 즉시 침입자를 요격하기 위한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청색 마탑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얼음송곳 마법이 사내의 주변에 떠올랐다.
“나? 네가 훔쳐보고 있는 학생들의 선생이지.”
사내는 침입자의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저절로 질투가 날 만큼 잘생긴 외모에, 묘하게 고압적이면서도 차가운 눈빛. 사내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교관 정복을 입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볼 수 있었기에, 사내는 일단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청색 마탑의…….”
“알아. 청색 마탑의 지올로 마트란. 능력도 재능도 없는 주제에 감히 금기를 어기려고 드는 병신이라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도 맞춰 볼까? 호수에 만티코어를 소환하려고 했지? 분노한 요정이 내 학생들을 모두 죽이고 주변 마을을 쓸어 버리는 모습을 보려고.”
침입자, 필립이 사내의 말을 잘랐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청색 마탑 마법사고, 금기를 어길 생각이 없는데.”
사내, 지올로 마트란은 발뺌하며 왼손을 뒤로 돌렸다. 문 근처에 새겨 둔 마법진을 발동하려는 것이었다.
“아,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필립은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았다.
―저게 사실이에요? 주인님?
대화를 듣고 있던 네리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필립이 서 있는 곳 주변에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오면 너는 얼음 동상이 된다. 네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해치지 않겠다. 감히 마법사의 공방에 함부로 들어와 놓고 무사히 나가는 걸 고맙게 여기도록.”
청색 마탑의 마법사 지올로 마트란은 마법진을 완전히 발동한 뒤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그 고압적인 태도에 필립은 혀를 찼다.
‘그냥 죽여야 하나?’
지올로 마트란은 이미 그의 간격 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었다. 그는 그리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죽이려고 든다면 쉬운 일이었다.
다만 이 기회에 마법사와의 전투를 경험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필립은 지올로 마트란의 자세를 살폈다.
대놓고 수인을 숨기기 위해 손을 등 뒤로 돌린 모습이나, 트랩 마법을 쓴다고 광고를 하는 듯한 마법의 흔적을 본 그는 지올로를 통해 경험치를 쌓으려던 계획을 전면 폐기했다.
필립에게 지올로는 잔챙이 그 이하였다. 저렇게 허접한 실력으로는 미래에 있을 마법사들과의 전투에 참고가 되기도 힘들어 보였다.
순식간에 오러를 끌어올린 필립은 지올로 마트란이 반응하기도 전에 채찍처럼 긴 검기를 휘둘렀다.
지올로가 몰래 시전한 방어 마법이 검기를 한 번 막아냈으나, 그 충격만큼은 상쇄하지 못했다.
“허어억!”
튕겨 나간 지올로의 허약한 몸이 오두막 벽에 처박혔다. 나동그라진 지올로는 내장에서 솟구친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애초에 별다른 준비 없이 필립을 마주친 순간부터 그에게 승산은 없었다.
전투를 완벽히 준비한 마법사는 제아무리 경지가 낮다고 해도 성가시기 그지없었으나, 마법사란 인종은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임기응변에 약했다.
‘마법진은 조심해야겠는데.’
저렇게 쓰러져 있는 동안 막타를 쳐야 했다. 필립은 검기를 움직여 지올로의 목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마치 목덜미를 깨물려고 드는 독사처럼 꿈틀거리는 검기를 보자 지올로의 눈빛에서 전의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나도 너처럼 막 나가는 마법사는 들어본 적 없으니까, 비긴 걸로 치자. 그보다 당장 마법진 해제해라. 셋을 셀 때까지 내 주변에 마법이 남아있으면… 뭐, 알아서 상상하고.”
필립은 정말로 지올로를 죽일 셈이었다.
성공을 위해 어린 학생들을 희생시키려는 건 그의 가치관에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씨발….’
지올로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어쩔 수 없이 마법진을 해제했다. 필립은 주변에 내려앉은 서리와 냉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걸 느끼고 지올로에게 다가갔다.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지올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필립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건 네가 엿먹이려고 했던 요정 아가씨한테 물어봐야지. 네가 뭘 하려고 했는지 네 입으로 전부 설명해야 할 거야. 그 아가씨, 꽤 착하던데 잘만 하면 목숨은 살려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