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37화 (37/119)

037화

* * *

토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여행부 학생들은 대광장에 모여 필립과 루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야영을 준비하라니. 너무 뜬금없는 거 아닌가?”

쟈니스 무르엘라는 등에 멘 배낭의 무게를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와 셰릴, 스테판은 필립의 공지에 따라 야영을 준비했다.

그들이 검술 학부의 3학년이었다면 야영에 제법 익숙했겠으나, 안타깝게도 마법 학부는 1년에 한 번 정도만 야외에서 밤을 보내는 법을 배울 뿐이었다.

“그래도 뭔가 재밌을 것 같은데. 깐깐한 교수님들도 안 계시고, 필립 교관님께선 우리가 뭘 하든 내버려 둘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벌레도 많고, 스테판도 있잖아.”

쟈니스가 반박하자 근처에 얌전히 서 있던 스테판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인 그가 불편하다는 건 그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으나, 하필이면 벌레와 같이 묶인 게 조금 서러웠다.

“혹시 제가 싫으십니까?”

“저것 좀 봐. 너야말로 내가 싫은 것 아니야? 말을 편하게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존댓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잖아.”

“평생을 아가씨라고 불렀는데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지 않습니까.”

스테판은 변명했으나 쟈니스는 언짢은 듯 콧방귀를 뀌며 쏘아붙일 뿐이었다.

“핑계 대지 마. 스테판.”

“아니, 그게 아니라….”

곤란한 상황에 빠진 스테판을 구한 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타난 필립과 루아였다. 셰릴이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저분은 검술 학부의 오스왈드 교수님 아닌가?’

마법 학부 학생이라면 검술 학부 교수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을 터였다. 그러나 펠리시아 오스왈드 교수는 달랐다.

프리비아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로 교수가 된 검술의 천재.

아카데미 시절, 그녀는 3학년이 된 순간부터 검술 학부의 최강이라 불리었다.

수많은 검술 명가 출신 학생들을 짓밟고, 오러 마스터인 에밀 파노이 교수가 수제자라고 평가한 여인.

셰릴은 펠리시아를 남몰래 동경하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그녀가 재밌게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들과 결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안녕. 얘들아.”

펠리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법 학부 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얼마 전 있었던 교무 회의에서 아카데미 외부 활동에 고작 신입 교관 한 명만 동행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

필립에게 받아먹은 것이 많은 펠리시아는 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다들 준비를 열심히 해온 모양이구나.”

학생들이 바리바리 챙긴 배낭을 본 필립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이라 야영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건량이나 주문서, 마법 도구도 챙긴 것처럼 보였다.

그들과 비교해 루아는 침낭과 옷 몇 벌을 챙겼을 뿐, 그리 챙긴 게 없었다.

“이야기는 마차에서 나누도록 하고, 일단 출발하자꾸나.”

“네. 교관님.”

학생들은 대답하며 아카데미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두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펠리시아는 사실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담당하는 학생에게는 꽤 좋은 대화 상대가 될 자신이 있었으나, 별로 접점이 없는 마법 학부 학생들과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나마 친한 루아의 옆에 앉아 그녀처럼 어색한 표정으로 교수의 눈치를 보고 있는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게 최선이었다.

자리가 비좁다는 이유로 마부석 옆으로 사라진 필립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쟈니스 무르엘라 또한 사정은 비슷했다. 오스왈드 백작 가문은 무르엘라 가문과 비교해 그리 밀리지 않는 명문가였고, 게다가 펠리시아는 그녀보다 훨씬 연상이었다.

평소처럼 내키는 대로 대화를 시작해도 되는 위치가 아니었다.

“저, 교수님. 교수님께서 아카데미를 졸업하실 때 오럼 나이트에서 입단 제의가 왔다고 들었는데….”

말문이 트인 건 셰릴이었다. 그녀는 동경하던 여교수와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아…그거, 물론 명예로운 일이었지. 하지만 그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었거든.”

한편 쟈니스 무르엘라의 시선은 루아의 머리카락에 박혀 있었다.

그 귀여운 소녀의 머리카락은 아주 섬세하고 예술적인 누군가의 손길을 거친 모양이었다.

예쁘게 땋은 머리에 리본까지 묶인 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구 솜씨인지 물어보고 싶은데.’

루아는 펠리시아의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생에 처음 떠나는 여행이 너무 기대된 나머지 밤새 잠을 자지 못했던 탓이었다.

마차가 크게 덜컹거릴 때 루아는 졸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벌리고 하품했다. 그러다 쟈니스와 시선을 마주치자 아무 생각 없이 방긋 웃었다.

그 순간 쟈니스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멍하니 루아를 바라보았다.

‘…귀여워.’

열네 살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루아는 그보다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체구가 작고 젖살이 빠지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저 애가 마법 학부였다면 좋을 텐데.’

쟈니스는 다시 잠든 루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서서히 눈이 감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어?”

그녀는 홀린 듯이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와 안개에 둘러싸여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호수가 눈앞에 있었다.

필립은 스테판과 함께 마차에 실린 짐을 내렸다. 학생들이 가지고 온 것들을 제외하고도 식량 같은 것들을 더 챙긴 듯 훈제한 고깃덩이나 빵 같은 것도 짐 사이에 섞여 있었다.

“햇빛이 드는 곳에 야영지를 만들고, 그 이후로는 자유 시간이다.”

필립의 선언에 학생들과 펠리시아가 의문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 여기까지 왜 온 거냐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까지가 농담이고. 이 호수에선 늦은 밤에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더구나. 요정을 본 사람도 있다고 하고, 정령을 봤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 어쩌면 너희들이 그 소문의 진상을 밝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필립은 학생들의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는 이 호수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걸 대놓고 밝힐 생각은 없었다.

“점심을 여유롭게 먹으려면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다. 나도 도울 테니 어서 준비하자.”

야영지를 만드는 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일단 불을 피울 공간이 필요했고, 새벽이슬을 맞기 싫다면 천막 같은 걸 세워야 했다. 다행히 주변에 나무는 많았으나 생나무를 지지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좀 도울까?”

펠리시아가 필립에게 속삭였다. 그녀라면 혼자서도 몇 명이 묵을 만한 야영지를 만들 수 있을 테지만,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들끼리 해 봐야 그게 다 경험과 추억이 되는 거지.”

뭔가 나이 많은 교수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을 들으며 펠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이 동아리의 담당 교관은 필립이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저는 뭘 해요?”

바쁘게 움직이는 선배들을 향해 루아가 물었다.

두 살 어린 소녀에게 뭘 지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3학년은 없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좀 모아 줄래? 불을 피워야 하거든.”

스테판이 그녀가 할 일을 정해 주자 루아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빽빽한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길을 잃으면 큰일이니까!”

셰릴이 다급히 외쳤다. 필립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는 이미 루아와 숲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저 애를 한국에 데려다가 캠핑 영상을 찍으면 천만장자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닐 텐데.’

산이나 숲 같은 자연 속에서 루아는 마치 엘프처럼 움직였다. 어쩌면 같은 나이의 엘프보다도 더 빠르고 능숙하게 움직이는지도 몰랐다.

신출귀몰한 루아의 솜씨로 인해 순식간에 마른 나뭇가지가 쌓였다.

그러나 바쁘게 움직이는 것에 비해 야영지를 만드는 작업은 더디게 흘러갔다.

“…마법으로 나무를 벨까?”

쟈니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여기서 바람 칼날 마법 같은 걸 잘못 썼다간…….”

셰릴이 불안한 표정으로 위험성을 상기시키자 쟈니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말대로 바람 칼날 마법은 그리 편리한 게 아니었다. 다른 나무를 잘못 건드렸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천막을 세울 지지대로 쓸 만한 게 없었다.

“굳이 지지대를 안 세워도 될 것 같습니다. 나무 사이에 못을 박아서 천을 고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스테판이 문득 제안했다. 듣고 보니 꽤 그럴싸한 방법이었기에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필립은 혼자 호수를 빙 돌아 일행의 건너편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이 호수의 주인에게 볼일이 있던 참이었다.

수풀과 나뭇가지를 비집고 움직이던 필립은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수 건너편, 안개에 둘러싸인 나무 사이 비밀스러운 어딘가에 쓸쓸히 서 있는 동상 하나.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한 그 동상의 정체는 바로 이 호수에 사는 요정을 조각한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 대고 필립이 인사하자, 곧 호수에서부터 물안개가 퍼지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엉덩이까지 길러 내린 머리카락으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린 여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물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순진한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호수에서 밤을 보내고 싶은 방문객이죠. 이곳은 당신의 영역이니 먼저 방문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요.”

필립이 대답하자 여인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예의 바른 분이시네요. 저는 예의 있는 손님을 좋아한답니다.”

그리고 곧 아쉽다는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유일한 즐거움은 포기해야겠네요. 여러분을 놀렸다간 제가 한 짓인 줄 다 알 테니까요. 부디 편히 지내다 돌아가시길.”

‘신기루 호수’의 요정에겐 취미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방문한 이들에게 안개를 이용한 환상을 보여주며 반응을 즐기는 것.

물론 선량한 요정인 그녀는 단지 놀리기만 하지는 않았다.

즐길 만큼 즐긴 뒤엔 오직 그녀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을 그녀와 놀아준 대가로 선사하곤 하는데, 그 보상 중 꽤 중요한 물건이 있었다.

“아뇨. 아이들에겐 비밀로 할 테니 내키는 대로 실컷 즐기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군요. 저 아이들은 나중에 온갖 사악한 환영과 끔찍한 환상과 마주하게 될 텐데, 그 전에 미리 겪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필립의 말에 요정은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대신, 아직 어린 학생들이니만큼 너무 심한 장난은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물에 빠트리는 것처럼요.”

“히히. 좋아요. 요즘은 매번 나무꾼들만 와서 재미가 없었는데, 어린 여자애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원래 어린아이들을 놀리는 게 가장 재밌거든요.”

그렇게 호수 요정과 교관 사이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러면 어떤 장난이 가장 재밌을지 고민을 해 봐야겠어요. 비밀은 꼭 지켜 주셔야 해요!”

요정은 그렇게 말하고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

필립은 조금 걱정이 드는 걸 느꼈다.

‘너무 신난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뭐, 괜찮겠지?”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