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 * *
아카데미로 돌아온 필립은 펠리시아에게 두 시간 정도 시달린 뒤에야 별장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오전 수업을 마친 루아와 마주쳤다.
“교관님, 많이 바쁘셨어요…?”
목소리가 조금 뾰족했다. 며칠이나 혼자 저녁을 먹고 혼자 시간을 보내다 잠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필립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바빴단다. 하지만 지금은 다 끝났어.”
필립이 그렇게 말하자 루아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곧 필립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거 찌찌에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니.”
루아의 여과 없는 단어 선택에 깜짝 놀란 필립이 급히 입고 있던 외투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얼마 전 함께 소풍을 다녀온 이후로 거리감이 많이 사라진 탓이었다.
“아! 고양이!”
필립의 외투 속에서 잠들어 있던 작은 고양이를 발견하자 루아의 눈이 커졌다.
까맣고 작은 아기고양이였다. 얼굴이 동그랗고, 다리도 짧은 데다 털도 아직 부드러울 시기의 고양이는 루아만 한 나이의 소녀를 홀리고도 남을 만큼 귀여웠다.
흑묘족 타니아는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눈을 떴다.
“하아아아악!”
“가만히 좀 있어라. 아무도 널 해치지 않으니까.”
낯선 소녀가 눈앞에 보이자 그녀는 곧바로 털을 바짝 세우고 이빨을 드러냈다. 필립은 손가락으로 타니아의 정수리를 톡톡 두드리며 나무랐다.
“그 고양이는 뭐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필립에게서 흑묘족에 대한 설명과 타니아가 이곳에 온 이유를 들은 루아는 금세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너무 불쌍해요….”
물론 고문을 당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뺐지만, 큰 충격을 받아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만으로도 루아는 눈물을 글썽였다.
“한번 안아봐도 되나요?”
“글쎄다. 한번 시도해 보렴.”
필립은 루아에게 짐승과 친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릴 때부터 산에서 자란 루아는 또래 친구들과 인형 놀이나 소꿉놀이를 하는 대신 다람쥐와 나무 타기 시합을 했고, 곰을 따라다니며 벌집을 나눠 먹는 삶을 살았기에 어쩌면 친해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필립의 생각대로 루아는 동물을 다루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타니아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손을 펼쳐 보이거나 갑자기 쪼그려 앉는 등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몇 번 반복했다.
그러자 필립은 바짝 서 있던 타니아의 털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애옹. 애오옹.”
공격성이 어느 정도 사라진 타니아가 몇 번 울자 루아가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입을 열었다.
“얘가 내려 달래요. 교관님.”
“음? 알아들은 거니?”
필립은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일단 루아의 말대로 타니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아무리 빨리 도망친다고 해도 다시 잡아 올 수 있었다.
그 고양이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루아는 성큼성큼 다가가 타니아의 바로 근처에 쪼그려 앉았다.
타니아는 꼬리를 바짝 세운 채 조그만 코를 킁킁대며 루아의 냄새를 맡았다. 루아는 타니아의 코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안녕. 타니아. 난 루아라고 해.”
소녀 특유의 높고 발랄한 목소리가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타니아는 루아의 접근을 허용했다.
‘저렇게 다가오는 사람이 처음이어서 그런가?’
본래라면 지금 당장 달려들어 할퀴거나 깨물어야 정상이었다. 스텔라를 향했던 공격성을 생각한다면 그게 맞았다.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사람 목숨을 돈으로 아는 이기적이고도 잔혹한 암살자들 사이에서 지내다가, 처음으로 예의를 갖추고 다가오는 사람을 만난다면?
“미야오옹.”
루아는 곧 타니아와 친해지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타니아를 안아 들었다.
“…대단하구나.”
“너무 예뻐요! 메이드 언니들한테 우유를 달라고 해서 먹일래요. 그래도 돼요?”
“그, 그러렴.”
필립은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저 난폭한 고양이가 순식간에 애완묘처럼 얌전해질 줄은 몰랐다. 루아는 필립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이 난 듯 타니아를 안은 채 식당으로 뛰어갔다.
“잠깐만, 같이 가야지.”
혹시나 타니아가 돌변해서 하녀를 공격할 수도 있기에 필립은 서둘러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대체 저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의외로 쉽게 해결되어 다행이었다.
* * *
다음 날 아카데미에 출근한 필립은 오후 일정을 마친 뒤 펠리시아에게 불려가 의외의 소식을 접했다.
“나보고 동아리 고문을 맡으라고?”
필립의 질문에 펠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교수님들이나 교관들은 모두 하나씩 동아리를 맡아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계시거든. 너도 아카데미 일에 진심으로 임할 생각이면 참여해야 할 것 아니니.”
“…확실히 그렇기는 해.”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동아리는 스무 개가 넘었다.
가장 많은 인원이 가입한 검술 연구 동아리나 마법 연구 동아리를 제외하고서도 산책, 독서, 토론, 혹은 원예나 티타임을 목적으로 한 동아리도 존재했다.
현재 1학년들은 아직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5월부터는 활동하게 될 터. 필립은 머리를 충분히 굴린 뒤 펠리시아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동아리를 하나 만들어도 되는 건가?”
그의 질문에 펠리시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되물었다.
“…규정상 안 될 건 없어. 교직원이 학업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만든 동아리가 바로 검술과 마법 연구부거든. 그런데 무슨 동아리를 만들 생각이야?”
“카드 게임 동아리.”
“야!!”
펠리시아는 필립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필립은 잠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눈물을 훔치곤 다시 정정했다.
“농담이고, 여행 동아리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여행? 외부 활동이 주가 되면 좀 곤란하기는 해. 비용도 많이 발생하고, 애들은 주말에 푹 쉬어야 하는데 휴식 여건이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필립은 펠리시아의 걱정에 고개를 내저었다.
“비용 같은 건 걱정 안 해. 그리고 외부 활동은 한 달에 두 번 정도로 생각 중이고, 일요일 아침이면 복귀할 거야.”
동아리에 대해선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필립이 그렇게 말하자 펠리시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 돈 많았지. 그러면 일단 신청서부터 작성해. 어차피 허가를 내 주는 건 내가 아니니까. 새 동아리가 만들어지려면 최종적으로 학장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하거든.”
“내 돈 써서 애들 좋은 일 시켜준다는데, 그분이 거절하실 리가 없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새로 만들어질 동아리에 가입하겠다는 학생이 최소한 세 명은 있어야 해. 1학년은 아직 가입할 수 없으니 2학년부터 가능해.”
“…그건 좀 어려운데.”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세 명은 어떻게든 모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올해 막 교관이 된 필립이 고학년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서라도 외부 활동이 가능한 동아리의 고문을 맡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자연스럽게 루아와 미래에 루아의 동료가 될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성장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곧바로 연구실을 나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장 꼬드기기 쉬운 학생을 먼저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앗, 교관님?”
셰릴은 필립이 도서관을 방문하자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녀에게 필립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셰릴. 몸은 괜찮니?”
던전에서 뱀파이어를 만난 이후 셰릴은 며칠 정도 요양해야만 했다.
“네! 그땐 정말 감사했어요. 저는…정말이지 그때 죽는 줄만 알았거든요. 오랜만에 엄마 얼굴을 보니까 마음도 좀 괜찮아졌고요.”
“다행이구나. 쟈니스 무르엘라는 좀 어떻고?”
“쟈니스는… 아차, 아가씨도 괜찮으세요.”
셰릴은 그렇게 말하곤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교복에 실례를 한 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라고 야단이시지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킥킥 웃었다. 필립은 그녀와 쟈니스 무르엘라가 생각보다 더 가까워졌다는 걸 깨닫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구나.”
“그보다 어쩐 일이세요? 한동안 도서관에 안 오시더니.”
“네게 부탁이 하나 있어서 왔단다.”
셰릴은 필립이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드릴게요!”
그녀의 호언장담에 필립은 감동하며 본론을 꺼냈다.
“사실 내가 동아리를 하나 만들 생각인데, 설립을 허락받으려면 가입하겠다는 학생이 세 명 필요하다고 해서. 그러니까 한 달에 두 번 정도….”
필립이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셰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들어갈래요!”
“아니, 아직 무슨 동아리인지 말도 안 했는데.”
“교관님께서 만드시는 동아리라면 뭐든 좋아요.”
셰릴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과 쟈니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뱀파이어와 맞섰던 필립의 뒷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중간에 정신을 잃어 그 결과는 보지 못했으나, 필립이 극도로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쟈니스 아가씨와 스테판 도련님도 제가 설득할게요. 스테판 도련님은 제 말을 잘 들어 주시니 당연히 가입할 테고, 쟈니스 아가씨는…정 안 되면 협박하면 되겠죠?”
무엇으로 협박할 것인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필립은 일부러 모르는 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준다면 정말 고맙겠구나.”
“별말씀을요.”
* * *
한 시간 뒤, 셰릴은 스테판 브레이와 쟈니스 무르엘라의 서명을 받아 필립을 찾아왔다.
필립은 그것들을 받아 펠리시아에게 내밀었고, 펠리시아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마법 학부 학생들 아니니?”
“맞아. 마법 학부 학생들이지.”
“하지만 너는 검술 학부 교관이잖아.”
“저번에 실습에 따라가면서 친해진 애들이야.”
“아, 그 애들.”
펠리시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있었던 사건 탓에 그녀 또한 가슴을 졸였었다.
“학생들 서명도 받았으니, 학장님께 설립 계획서를 전달해야지. 같이 갈 거니?”
펠리시아의 제안에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학장과 그리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필립은 그녀의 도움을 받아 계획서를 꼼꼼히 작성했다.
“혹시나 설립이 거부된다고 해도 너무 속상해하지는 말고.”
펠리시아는 그렇게 말한 뒤 학장 로셀로 그레이엄을 만나기 위해 학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되돌아온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필립. 학장님께서 너와 면담하고 싶다고 하셔. 네가 직접 와야 허가서에 도장을 찍어 주신다는데.”
“…뭐라고?”
필립은 머리를 굴려 교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이유가 너무 많잖아.’
그가 자신을 부를 이유는 많고도 많았다. 마법 학부 실습부터, 이번 암살단 사건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는 몰랐지만,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설마 드래곤에 대해 눈치를 챈 건 아니겠지.’
다른 건 모두 상관없었지만, 드래곤의 존재를 눈치챘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