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 * *
리즈리엘 유세프는 괴롭고, 지루했고, 무서웠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초유의 암살 집단이 자신을 노리는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을 터였다.
그녀는 낮엔 학장의 집무실에서 시간을 죽였고, 밤에는 에밀 파노이 수석교수가 묵는 기숙사 구석에서 쪽잠을 자며 며칠을 견뎠다.
에밀 파노이 수석교수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방에서 나는 홀아비 냄새, 그리고 담배 냄새는 조금 견디기 힘들었다.
‘대체 누가 날 노리는 걸까?’
다행히도 크레센트에 만들어 둔 인맥 덕분에 미리 경고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목욕 중이나 자고 있을 때, 혹은 화장실에 있을 때 기습을 당해 죽었을 게 뻔했다.
‘황금 인장이 내 손…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 쪽으로 왔는데, 그걸 써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어. 정보가 샌 건가?’
황금 인장에 대한 정보가 샜다면 그녀가 암살 대상이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보가 새었을 확률이 극단적으로 낮다는 건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황금 인장의 존재를 아는 건 세상에서 오직 유세프의 핏줄을 이은 직계와 필립뿐.
만약 필립이 일을 꾸몄다면 암살자들에게 의뢰 같은 걸 할 리가 없었다.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이 훨씬 많았으니까.
‘언니나, 오빠도 아니야. 그 사람들이 암살 청부처럼 증거가 남는 방식으로 날 공격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녀의 경쟁자인 다른 유세프들은 극도로 신중한 성격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터였다.
요 며칠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증거도 없이, 머릿속으로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을 조립했다가 다시 부수는 일의 반복.
소녀 시절에나 있었던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다시 나타났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눈 밑에 그늘이 생겼다.
“이대로는 안 돼.”
이런 식으로 숨어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유세프 상회 측에 자신의 상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기는 했으나 그쪽에서 일을 해결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터였다.
“아가씨. 잘 놀고 있었나?”
그때 학장실의 문을 열고 에밀 파노이 수석교수가 들어왔다.
“아, 교수님.”
리즈리엘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수석교수는 서론을 생략하고 다짜고짜 질문했다.
“막내 교관 하나가 어제 수업이 끝난 이후로 돌아오지 않더군. 아가씨와 친하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가씨와 관련된 일인가?”
“…막내 교관이라면, 필립 오스왈드를 말하는 건가요?”
“반응을 보니 아가씨도 잘 모르는 모양이군. 제기랄.”
수석교수는 웬 병신 같은 놈이 괜히 벌집을 들쑤셔 놓았다고 투덜거리며 품에서 잘 봉인된 편지 한 장을 꺼내 리즈리엘에게 건넸다.
“그건 그렇고, 유세프 상회에서 나온 사람이 이걸 전해 달라던데 어디 한번 읽어보게. 중요한 소식이라더군.”
“감사합니다. 교수님.”
수석교수나 되는 사람이 이런 심부름을 대신 해 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리즈리엘은 약간 감동하며 유세프 상회의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를 펼쳤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의뢰주를 조사하던 중 크레센트의 붕괴를 확인함. 잔존 인원은 세 명 이하이며, 조직의 유지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함. 전달받는 대로 업무에 복귀할 것.’
리즈리엘은 손을 떨며 편지를 다시 접었다.
“무슨 일인가? 아니, 비밀이면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고.”
수석교수의 질문에 리즈리엘은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대답했다.
“크레센트가 망했다는데요…?”
“…왜?”
“그건 저도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편지의 내용은 추측성이 아니었다.
상회의 인장까지 찍힌 공식 문서가 거짓일 경우, 목이 날아갈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정말로 크레센트라는 오래된 암살 조직이 사라진 게 확실하다는 이야기였다.
“…필립? 설마?”
그녀는 잠깐 필립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필립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건 사실이지만, 크레센트의 붕괴와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우연이겠지?’
자세한 건 곧바로 업무에 복귀해서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 * *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흑묘족 족장 스텔라는 몇 시간 동안 기절한 뒤 가까스로 깨어났다. 깨어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필립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었다.
겨우 피가 멎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파랬다.
“아니 뭐… 괜찮습니다. 딱히 그쪽을 도우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저도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필립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에는 작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흑묘족의 다음 대 족장인 타니아의 고양이 모습이었다.
필립의 초크로 인해 잠이 드는 것처럼 기절했던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발광을 해 댔다.
그러나 필립의 얼굴을 본 순간 잔뜩 겁먹어 꼬리를 다리 사이에 말아 넣곤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그를 자신의 위 서열로 인정한 것처럼 보였다.
초크에 걸렸을 때 느꼈던 죽음의 공포 탓인 듯했다.
“하아악! 하아아악!”
타니아는 스텔라와 얼굴을 마주하자 송곳니를 드러내며 앞발을 휘저었다. 당장이라도 할퀼 기세였다.
그녀가 보이는 영문 모를 적개심에 스텔라는 참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혼난다.”
“미야아옹….”
필립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타니아는 다시 꼬리를 말며 불쌍한 소리를 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합니다. 벌써 하루가 지났으니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길을 재촉해야 하죠. 당신은 지금부터 어쩌실 겁니까?”
필립의 질문에 스텔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그녀로서는 앞길이 막막했다. 고작 수십 명뿐인 구성원 중 열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대로 세상에 나가 봤자 제2의 크레센트가 흑묘족을 노릴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필립이 문득 제안했다.
“고민이 많으실 것 같은데, 제가 한 가지 선택지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딱히 계획이 없으시다면, 제가 당신들을 고용하겠습니다. 누굴 죽일 필요도 없고, 딱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림자를 넘나드는 당신들 능력을 써먹기 좋은 직업이 있거든요.”
“…그게 뭔가요?”
스텔라의 질문에 필립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정보 수집이죠. 제가 원하는 정보를 물어다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외에는 편지 전달 정도? 위험하다 싶으면 거부해도 그만이고, 그것만 해주신다면 당신들 종족이 인간 사회에 자리 잡도록 돕겠습니다.”
필립은 몇 분에 걸쳐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스텔라에게 설명했고, 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평생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드래곤을 뒷배로 두고 있는 사람이 내민 제안을 거절할 용기도, 이유도 그녀에겐 없었다.
족장인 그녀가 다친 지금이라면 필립은 혼자서도 남은 흑묘족들을 몰살시킬 만한 강자였다.
그녀는 필립의 아량에 종족의 운명을 내맡기기로 했다.
스텔라는 다친 몸을 일으켜 필립에게 무릎을 꿇어 보였다. 필립은 깜짝 놀라 그녀를 다시 앉혔다. 잠깐 움직였다고 그녀의 몸에 감긴 붕대에 피가 맺혔다.
‘프리비아가 치료 마법 한 번 걸면 저 정도는 금방 나을 텐데, 그나저나 진짜 안 오나?’
필립은 투덜거리며 타니아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얘는 대체 어떻게 할 겁니까? 데리고 있을 겁니까?”
“제가… 어떻게든 책임지겠습니다.”
“뭐 어떻게 책임지시게요? 제가 놓으면 감당할 수 있어요? 그렇게 다쳐서는…….”
필립은 말을 잇던 도중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이 잊을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은 프리비아의 그것이었다.
“잘 해결했구나. 역시 월광검의 계승자다워.”
그녀는 스텔라가 쉬고 있는 방으로 들어서며 필립을 칭찬했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필립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프리비아를 흘겨보았다. 물론 그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 버러지 같은 마족 놈을 고문하고, 로드께 그 내용을 전달했다. 결과에 따라 마족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도 있으니 네놈이 공을 세운 셈이다.”
네펜을 고문하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해소한 듯 프리비아의 표정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그러니 저런 정보도 알려주는 것이리라.
‘이 정도면 뭐 하나쯤 부탁해도 되겠는데.’
결심을 마친 필립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혹시, 제 부탁 좀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거라. 과한 게 아니라면 들어주마.”
프리비아는 필립의 질문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해결하며 그녀가 얻은 게 꽤 많기도 했고, 필립이 남은 일을 깔끔하게 해결한 것이 기특하기도 했다.
필립은 타니아를 프리비아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이 흑묘족의 정신을 원래대로 되돌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에 흠칫 놀란 스텔라가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필립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 뒤 말을 이었다.
“겸사겸사 이분 상처도 좀 낫게 해 주시고.”
프리비아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스텔라를 가리켰다.
“나아라.”
그러자 스텔라는 갑자기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신체가 제멋대로 상처를 재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앗… 아아앗!”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필립은 프리비아가 펼친 용언 마법에 다시금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개사기였다.
“저 흑묘족 계집은 사흘 후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히 나을 것이다. 허나 이 작은 고양이는… 잠깐 줘 보거라.”
프리비아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필립에게서 타니아를 넘겨받았다. 한동안 고양이를 살피던 프리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이성이 망가진 것은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미치광이가 제정신을 차리도록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보살펴야지. 운이 좋으면 몇 년 안에는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네놈, 안 돌아갈 테냐? 아카데미에서 네놈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다.”
“예?”
필립이 당황했다. 고작 교관 한 명이 출근하지 않았다고 소란까지 일어날 리는 없었다.
“네 누나라는 계집애가 온 아카데미를 들쑤시고 다니던데.”
“아뿔싸.”
펠리시아라면 그럴 만했다. 갱생한 줄 알았던 동생이 하슬란 교수와의 마찰로 잘못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러고도 남았다.
“빨리 돌아갑시다.”
“그래. 이 고양이는 어떻게 할 테냐?”
프리비아가 포탈을 열었다. 필립은 잠시 망설이다가 검으로 바닥에 글을 몇 줄 남겼다.
“뭐 잠깐 데리고 있죠. 지금 여기 내버려 두는 건 못 할 짓이니.”
현재 흑묘족 마을에는 타니아의 발광을 제어할 사람이 없었다. 필립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포탈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