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 * *
학장실 앞에 선 필립은 침을 꿀꺽 삼켰다.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장 로셀로 그레이엄은 그야말로 주인공의 활약을 위해 임명된 학장 그 자체였다.
매우 강력한 힘을 가졌고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아카데미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마법사.
필립 또한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중 그를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지.’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학장실 문을 두 번 노크했다.
“필립 오스왈드입니다. 학장님.”
그러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 왔다.
“들어오게.”
필립이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는 학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 늙은 마법사는 뭔가 중요한 서류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것 같았다.
“그래. 오스왈드 군. 동아리를 설립하고 싶다고?”
학장의 질문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렇습니다.”
“자네 소식은 잘 듣고 있네. 마법 학부의 실습에선 큰일을 해냈다지. 그곳에 마족이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이벨린 교수의 실책이 크다네.”
“…뭐,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필립이 그렇게 대답하자 학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자네는 잘해 주었네. 그러나 자네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몇 가지 충고를 해도 되겠나?”
“새겨듣겠습니다.”
필립은 긴장한 표정으로 학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먼저, 마족과 너무 엮이지 말게. 자네가 가진 그 보물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말일세.”
‘헉.’
필립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학장의 표정인 인자하면서도 여유로웠으나 필립은 마치 명치를 칼에 찔린 기분이었다.
‘최소한 월광검에 대해서는 안다고 봐야겠는데.’
“그리고 드래곤과 되도록 잘 지냈으면 좋겠군. 그녀는 홀로 아주 오랫동안 외로운 시간을 보냈으니 자네라면 충분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동아리는 설립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네.”
필립은 입을 쩍 벌렸다.
뛰어난 책략가는 책상에 앉아서도 만 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다고 하더니, 지금 상황이야말로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필립의 질문에 학장은 헛웃음을 뱉었다.
“허, 아카데미 안에서 공간 이동 포탈을 그렇게 열었는데도? 마법 학부 교수들은 그만한 포탈을 열려면 사흘 밤낮을 마법에 매달려야 한다네.”
“아….”
듣고 보니 그랬다. 마법사가 아닌 필립은 프리비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는 포탈에 흔적이 남는다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질 좋은 찻잎을 사 들고 그녀를 찾아가 보게. 그러면 자네에게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곧 축객령이 내려졌고 필립은 허탈한 표정으로 학장실을 빠져나온 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행적이 모두 드러난 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들킨 건 차라리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겠어.’
학장이 무슨 이유로 필립을 불러 저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나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거나, 혹은 순수하게 충고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학장이 아군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그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필립은 앞으로 뭔가 일을 벌일 때 조금 더 몸을 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설립 허가를 받은 뒤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학장 로셀로 그레이엄은 일을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정식 허가가 내려왔고, 그 소식을 전달받은 펠리시아가 필립에게 말했다.
“이제 여행부가 정식으로 부실로 사용할 공간이 필요할 거야. 하지만 학부 근처나 대광장 근처에 지어진 건물들은 이미 다 찼거든? 신설 동아리는 아마 기숙사 외곽이나 뒷산 근처에 부실을 구할 수 있을걸.”
필립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부지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학부 건물이나 대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활동하는 동아리들은 그리 인기가 없었다.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돌아가는 데 걸어서 이십 분이나 걸린다면 누구든 부담스러워할 것이었다.
“봐둔 곳이 있어. 예전 비품 창고인데, 지금은 버려진 곳이더라.”
“뒷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창고를 말하는 거니? 거긴 적어도 몇 년은 버려졌던 곳인데?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서 멀쩡히 쓰려면 며칠은 청소해야 할걸?”
“오늘부터 조금씩 하다 보면 금방 되겠지.”
사실 필립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건 단지 그 건물 지하에 존재하는 공간 때문이었다. 부득불 동아리를 만들려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네가 알아서 잘 해 봐. 그렇다고 학사 일정에 소홀하면 안 돼. 알았지?”
펠리시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곧바로 부실로 쓸 창고 건물로 향했다.
오래전 아카데미 뒷산이 교장으로 쓰였을 때 지어진 비품 창고였다.
외관은 평범한 창고나 다름없었다. 조금 낡고 먼지가 쌓인 데다 외벽 색이 조금 바랜 정도.
필립은 문을 막은 자물쇠를 검기로 잘라낸 뒤 안에 들어섰다.
―꺄아아악! 주인님! 거미! 거미! 네리아 검집에 거미 앉았어요! 빼애애액!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네리아의 비명이 들렸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검집에 매달린 거미를 손으로 잡아 밖으로 던졌다.
내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뭔가를 덮었던 천이나 빈 상자, 술통처럼 보이는 반파된 오크통들이 굴러다녔고, 바닥 타일이 깨져 조각이 채였다.
“거미가 싫으니?”
―징그럽잖아요!
필립이 묻자 네리아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소리쳤다.
“거미 형태의 몬스터와 싸울 수도 있는데, 그러면 그럴 때는 어떻게 할까?”
―네리아 말고 다른 검을 쓰면 되잖아요.
“언제 그런 괴물과 싸울지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다른 검을 들고 다녀야겠군.”
―…주인님은 바보 멍청이예요. 왜 네리아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네리아가 울먹거렸기 때문에 필립은 그녀를 놀리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거미가 싫다는 건 진심인 듯했다.
“미안하다. 네가 귀여워서 그랬지.”
―하나도 안 기쁘거든요!
필립은 네리아가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는 걸 느끼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필립은 네리아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녀는 에고 소드라기엔 사람과 같은 점이 너무 많았다. 일단 사고방식부터가 조금 이상했다.
에고 소드가 자아을 각성하는 건 본래 매우 힘든 일이었다.
전설적인 검사의 손에서 주인과 함께 신화적인 업적을 이뤄내고, 주인과 깊은 교감을 나눠야만 가능한 기적.
그렇게 깨어난 자아는 보통 주인의 성격을 닮기 마련이었다.
필립이 듣기로 네리아의 첫째 주인은 대단한 검사임엔 틀림없었지만, 필립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 프리비아가 보인 반응도 좀 이상했지.’
드래곤 프리비아는 마치 네리아를 본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때는 경황도 없었고 따져 묻기 곤란한 상황이었기에 그냥 넘어갔으나, 지금부터라도 알아봐서 나쁠 건 없었다.
어쩌면 네리아에게 숨겨진 뭔가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네리아, 너는 원래부터 검이었니?”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리아는 당연히 처음부터 검이었죠.
“아닐 수도 있지. 사실 원래는 쟁기나 쇠스랑 같은 농기구였을 수도 있잖아.”
―네리아는 주인님이 아팠으면 좋겠어요. 너무 크게는 말고, 설사나 불면증 같은 거 말이에요.
아무래도 네리아에게서 뭔가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학장의 말대로 프리비아와 친해질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는 일단 이곳에 온 목적을 먼저 달성하기 위해 창고 내부를 뒤졌다.
눈에 보이는 방해물들은 밖으로 던지거나 한쪽으로 치워 놓으며, 의심스러운 곳에서는 발로 땅을 세게 구르거나 타일을 자세히 살폈다.
―뭘 찾으시는 거예요?
“비밀 통로. 아, 여기네.”
―아, 그러세요.
필립은 곧 빈 상자 두 개를 치운 뒤 조금 부자연스럽게 솟은 바닥 타일을 발견했다.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아주 조금 솟은 타일이었다. 필립은 그것이 암호로 사용되는 네 개의 타일 중 하나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게 동남쪽 타일이군.’
순서에 맞게 타일을 밟으면 숨겨진 통로가 열리는 구조의 히든 피스였다.
‘순서가 12143213이었던가?’
기억이 조금은 희미했기에 필립은 몇 번의 실패를 거쳐야만 했다. 한 변의 길이가 40cm 정도 되는 타일을 번갈아 가며 밟다 보니 그 모습이 마치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네리아는 킥킥대며 필립이 고생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풉킼.
“….”
곧 순서를 기억해 낸 필립이 정답을 맞히자 밟고 있던 타일이 갈라지더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매번 느끼지만, 주인님은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몰라요.
“그냥 그러려니 하렴.”
―눼.
필립은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체감상 지하 2층 정도를 내려가자 곧 마법으로 밝혀진 조명이 닫힌 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다란 공동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동굴과도 같은 구조였는데, 닫힌 문이 세 개가 보였고 공동 한가운데 제단이 있었다.
‘왜 아무도 없지?’
필립이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습니까?”
―대충 봐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네리아가 대답하자마자 공동 가운데 자리한 제단에 위에서 갑자기 녹색 불꽃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사라진 불꽃 뒤로 반투명한 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이곳에 방문자가 나타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제 주인이신 대현자 아슬라 님을 대신해 방문자님을 환영합니다.”
그 반투명한 갈색 곰은 마치 인간 귀족처럼 다리를 살짝 굽히며 정중한 자세로 인사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그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으나 필립은 내색하지 않았다.
―고, 곰이 말을 해요. 주인님!
필립은 네리아의 놀란 목소리를 무시했다. 검도 말을 하는 세상에 곰이 말 좀 한다고 놀랄 것도 없었다.
“이곳 ‘성취의 전당’에 관한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곰이 정중한 말투로 권하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로운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3대 학장이셨던 아슬라 님께서는 당신께서 평생 모은 진귀한 마법 물품과 마법서들이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어른들 대신 순수하고 영민한 학생들의 손에 들어가길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이곳을 만드셨습니다. 비록 이곳을 찾아낼 단서를 만들기 전에 돌아가시긴 하셨지만요.”
“…사실 저도 우연히 찾은 겁니다.”
이곳 ‘성취의 전당’은 오직 필립만이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
필립은 예전에 자신이 이곳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기억해내고 혀를 내둘렀다.
‘게임을 하던 중 전화를 받느라 의미 없이 창고 안을 돌아다녔지. 갑자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어.’
정말로 우연이었다. 이곳에 관한 단서는 게임 내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의미 없이 타일 네 곳을 왔다 갔다 돌아다니다가 난데없이 비밀 통로가 열렸을 때 필립은 무슨 버그에 걸린 줄만 알았었다.
필립은 곰을 바라보았다.
곰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곰은 분명히 필립을 보고 갈등했다. 이마에 내 천川자를 그리고 고민하는 표정이 꽤 볼만했다.
“사실… 이곳은 어린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제 주인님께선 뛰어난 재능과 잠재력을 지닌 학생들이 이곳에 잠든 훌륭한 비밀과 아티팩트를 바탕으로 대륙에 이바지할 인재로 자라나길 바라셨죠. 정말 실례입니다만, 혹시 방문자님의 나이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필립은 곰의 질문에 대답했다.
“스물둘입니다.”
“아……아슬아슬하게 그 정도는 제 재량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문자님께선 이곳에 마련된 시험을 통과하시고, 성취에 따른 보상을 받아가실 수 있습니다. 저쪽 문을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필립은 곰의 안내에 따라 세 개의 문을 바라보았다.
‘용맹’, ‘지혜’, ‘지식’이라는 단어가 문 표면에 떠올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