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 * *
“읍! 으으읍!”
라나는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쳤다. 그러나 단단히 묶인 그녀로선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었다.
프리비아의 손가락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닿자마자 그녀는 마치 영혼을 빨린 것처럼 고개를 툭 떨구었다.
“흐음.”
드래곤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도깨비불과 같은 반투명한 구형의 물체가 맺혀 있었다. 프리비아는 입을 살짝 벌려 그것을 빨아들인 뒤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잠시 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역겨운 일을 해 놨군.”
“예? 무슨 일입니까?”
필립의 질문에 프리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가보면 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포탈을 열었다. 이젠 익숙해졌기 때문에 필립은 조용히 그녀를 뒤따라 포탈을 넘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흑묘족 마을의 광장이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흑묘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과 각오가 함께 느껴지는 표정으로 마치 신병처럼 도열해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고, 필립은 곧 스텔라를 발견했다.
“…오셨습니까?”
족장 스텔라는 검게 물들인 가죽옷을 입고 두 자루 단검을 허리에 찬 채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우리는 마을을 나가, 네펜의 은신처를 공격할 예정입니다. 이곳에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마을의 한 창고인데….”
프리비아는 손을 들어 스텔라의 말을 끊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네?”
“봐라.”
그녀가 손을 휘젓자 곧 마을 주변을 감싸던 안개 결계가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백 년은 넘게 마을을 지키던 결계였다.
“어? 어어?”
족장인 스텔라는 깜짝 놀라 프리비아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차마 프리비아를 말릴 수 없었다.
단지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며 심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마을로 침입하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필립은 암살자 특유의 몸에 붙는 옷을 입은 이들이 순식간에 광장을 둘러싸는 모습을 보곤 탄성을 뱉었다.
“아.”
아무래도 어택땅을 준비한 이들은 흑묘족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그리 나쁜 계획은 아닌데.’
네펜이 흑묘족을 노리는 이유는 그들이 타고난 암살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마을을 뛰쳐나온 흑묘족들을 회유하고 세뇌하다가, 아카데미에서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직접 노리기를 결정한 듯했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두 번의 실패를 꽤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군. 가늠할 수 없는 변수로 일이 틀어지기 전에 리스크를 감수하는 판단이라.’
과감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만약 그의 옆에 암청색 머리카락의 드래곤이 없었다면 그는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을 터였다.
크레센트의 목적성은 확실해 보였다.
반항하는 이들은 죽이고, 투항하는 이들은 사로잡는다.
소속된 암살자가 대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인원이 수십 명이 넘는 것으로 보아 전력 중 대부분을 이곳에 끌고 온 것 같았다.
그리고 흑묘족 세 명의 호위를 받으며, 이 무대의 최종 보스가 등장했다.
보라색 피부에, 머리에 양의 뿔이 달린 악마적인 미모의 사내.
본래 인큐버스나 서큐버스 같은 몽마들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으나 네펜은 일부러 본신을 드러내길 택한 모양이었다.
인큐버스 네펜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네펜….”
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스스로 결계를 풀다니, 드디어 내 품에 들어올 결심이 선 건가?”
그는 광장을 가로지르며 스텔라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선 뒤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벌렸다.
“애완 고양이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특히 너처럼 예쁜 고양이라면, 특별히 오래도록 귀여워해 줄 수 있지.”
필립은 스텔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꽤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타니아는 어디에 있죠?”
“아, 네 조카딸을 말하는 건가? 그 귀여운 아이라면 여기 있지.”
인큐버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로브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 작은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천천히 스텔라에게 다가가 얼굴을 가린 모자를 벗었다.
“….”
스텔라와 닮은 소녀였다. 스텔라는 타니아의 손을 잡기 위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타니아…….”
그러나 감격적인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타니아는 그녀가 범위 안으로 들어오자 그 어떤 징조도 없이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휘둘렀다.
흑묘족의 손톱은 어지간한 금속보다도 단단했기에 단순히 손을 휘두르는 것도 치명적인 공격이 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상대의 목을 노리는 공격이라면, 단숨에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족장의 위치에 있는 만큼 다른 흑묘족들에 비해 무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급히 몸을 뒤로 빼었고, 동맥을 겨우 비껴간 타니아의 손톱이 그녀의 목 피부를 헤집었다.
격한 움직임 탓에 혈압이 높아졌는지 새빨간 피가 분무기처럼 뿌려졌다. 스텔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타니아를 향해 소리쳤다.
“타니아!”
그러나 타니아는 마치 고양이의 모습일 때처럼 송곳니를 내어 보이며 스텔라를 계속 공격할 뿐이었다. 스텔라는 차마 그녀를 공격하지 못하고 연신 뒤로 물러났다.
“너희 종족은 참 재밌더군. 하도 앙칼지길래 지하실에 가두고 몇 년 정도 고문했더니 글쎄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가 되어서 나오는 게 아닌가?”
네펜의 웃음소리가 필립의 신경을 긁었다. 프리비아를 살피자 그녀 또한 짜증이 치민 듯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버러지 주제에 건방지구나.”
곧 그녀의 손가락이 네펜을 가리키자 허공에 강한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필립이 낼 수 있는 전력의 수십 배가 넘는 힘이었다.
마력들은 곧 긴 창의 형태를 갖추었고, 만들어진 세 개의 창이 화살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쏘아져 곧바로 네펜의 몸을 꿰뚫었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내가 특별히… 흐억!”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던 네펜이 작살에 찔린 물고기처럼 마력의 창과 함께 땅에 박혀 버렸다.
“네놈을 찾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나와 주니 참으로 기특하다.”
프리비아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곧 그녀의 양손에서 온갖 종류의 마법이 숨 쉴 틈도 없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얼음 기둥, 벼락, 불덩이, 독안개 등등 마족에게 치명적이지는 않으나 충분히 고통을 줄 만한 마법이었다.
주문도, 수인도, 지팡이도 없이 의지에 따라 즉발적으로 발현되는 파괴마법들. 그 어떤 현자도 이런 걸 따라 할 수는 없었다.
현시점에서는 오직 드래곤만이 가능한, 곡예에 가까운 마법에 인큐버스의 신체는 착실히 파괴되어 갔다.
“크아아아악!”
“벌레 타는 소리가 듣기 좋구나.”
만신창이가 된 네펜의 몸뚱이에 마지막으로 발현된 마법은 시간 정지였다.
인큐버스 네펜은 마치 얼음 조각상이 된 것처럼 걸레짝이 된 그대로 굳어 버렸고, 프리비아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 길게 숨을 뱉은 뒤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네놈에게 맡긴다.”
“예?”
멍하니 프리비아의 마법을 구경하고 있던 필립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귀가 막혔느냐? 뒷정리는 알아서 하란 말이다. 저 암살자들이나 흑묘족들은 마족이 아니니, 내가 뭘 해줄 수도 없느니라.”
염력으로 네펜의 몸을 들어 올린 프리비아는 그대로 포탈을 열어 사라졌다.
‘아니, 진짜 가네?’
프리비아가 사라지자 필립은 잠깐 분위기를 살폈다.
스텔라는 타니아라는 소녀에게 붙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크레센트의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수장이 어이없게 패배해 납치당하자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만약 저쪽 지휘관 중에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이가 있다면 선공을 지시할 게 뻔했다.
드래곤이라는 비대칭 전력이 사라진 이상 해볼 만한 싸움이었으니까.
필립은 천천히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오러를 끌어올리며 크레센트의 잔당을 향해 뛰쳐나갔다.
채찍처럼 유연한 오러가 반경 삼 미터가 넘는 공간을 순식간에 난도질했다.
“아아아악!”
순식간에 몇 개나 되는 팔과 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갈라진 복부에서 피와 내장을 흘리는 암살자도 있었고, 옆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쪼개진 이도 있었다.
암살자는 애초에 일대일의 대인전을 훈련하지 않는다. 상대가 무방비일 때 효과적으로 죽이는 기술이 뛰어날 뿐.
필립의 범위에 들어온 이상 단순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를 도와라!”
눈치가 빠른 흑묘족 몇 명이 재빨리 합세했다.
크레센트의 암살자들 또한 정신을 차리고 대응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필립의 일검을 버텨내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지위가 높아 보이는 암살자 몇 명이 가까스로 그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여기서 다 죽여 놔야 한다.’
모조리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모여서 복수할 생각을 하게 두면 안 된다.
필립이 아카데미의 교관이라는 정보는 이미 크레센트에 넘어간 상황.
그에게 복수한답시고 학생들을 납치하거나 해칠 수도 있었다.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그럴 바엔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필립은 문득 날카로운 살기를 느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헛!”
낯익은 흑묘족 사내가 필립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그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케인이었다.
그는 본래 뛰어난 암살자였던 듯 필립이 내뱉는 호흡의 틈을 정통으로 찌르는 데 성공했으나, 필립은 처음 흑묘족과 마주한 그 순간부터 그림자 사이를 넘나드는 그들의 능력을 경계하고 있었다.
독이 발린 단검을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 필립이 길게 뽑아냈던 오러를 검기의 형태로 변환했다.
케인은 짧은 순간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한 듯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
깐만, 이라고 말하려 했던 걸까.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짧고 빠르게 그 목을 베어냈다.
남의 피로 먹고사는 암살자 따위에게 베풀 동정은 없었다. 필립은 입술을 깨물며 다음 상대를 찾았다.
“이봐, 미쳤어? 우린 이웃사촌이었잖아!”
“왜 이러는 거야? 왜 암살자를 돕는 건데?”
크레센트 소속의 흑묘족들은 동족에게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동족의 목덜미와 심장에 아무 망설임 없이 단검을 꽂았다.
전투 훈련을 받은 흑묘족과 그렇지 않은 흑묘족 사이엔 넘기 힘든 벽이 있어 보였다.
마을에서 사냥과 농사로 삶을 영위하던 흑묘족들은 망설임 없는 크레센트 소속 흑묘족들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필립이 상대의 수를 벌써 여섯이나 줄여 놨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치 정도는 할 수 있어 보였다.
전황을 살핀 필립은 곧 한 암살자를 발견했다.
삭막한 인상의 중년 사내, 그는 근접 전투에도 일가견이 있는지 벌써 마을의 흑묘족 둘을 처리한 뒤 필립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광장에 자리한 구조물들 사이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필립은 재빨리 그를 따라 땅을 박찼다.
저렇게 몸을 숨기게 두면 매우 성가셔질 게 뻔했다.
“…빌어먹을!”
암살자는 그렇게 소리치며 광장 한편에 자리한 창고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를 잡기 위해선 필립 또한 창고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안 가, 이 새끼야.”
물론 필립은 암살자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어두운 실내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 오러의 형태를 다시 바꾸었다. 채찍처럼 유연한 오러가 나선형으로 검을 감싸더니,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선검. 현재 필립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기술이었다.
비록 오래 방치되었다지만 남작급 마족인 뱀파이어마저도 상처를 입을 만큼 강대한 오러가 벽돌로 지어진 창고의 외벽을 저항 없이 파고들었다.
돌이 갈리는 소리와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힘을 주어 휘두르자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외벽이 갈려 나갔고, 햇빛이 암살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잠깐, 잠깐만! 너, 리즈리엘 유세프 때문에 이 일에 끼어든 것 같은데, 의뢰주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나?”
중년 암살자는 다급히 필립에게 소리쳤다.
“몰라도 돼. 이 새끼야.”
어차피 리즈리엘 유세프는 이 사건에서 거의 제삼자나 다름없었다. 필립은 단지 앞으로 그를 무척이나 괴롭힐 ‘크레센트’라는 암살단을 미리 치워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지 리즈리엘의 암살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일 리 없었다.
필립은 나선검을 휘둘러 중년 암살자의 상체를 완전히 분쇄했다. 벽돌마저 갈려 나가는 위력에 암살자의 상반신은 고기조각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지워졌다.
가장 강해 보이는 적을 죽였으니, 이젠 흑묘족들끼리도 알아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필립은 스텔라를 돕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제발… 정신 차려. 타니아.”
스텔라의 몸놀림은 필립의 기준에서도 꽤 뛰어났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타니아의 공격을 반격 한 번 하지 않고 피해내며, 타니아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이 보기엔 스텔라가 먼저 지칠 게 뻔했다. 타니아에겐 출혈이 없었고, 스텔라에게는 있었다.
이대로 몇 분만 상황이 이어진다면 스텔라는 결국 타니아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 것이었다.
필립은 타니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꽤 예뻤을 그 눈동자에선 이성의 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본능대로, 주입된 적개심대로 움직일 뿐.
대체 저 소녀를 어떻게 세뇌했는지 필립은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문과 세뇌를 번갈아 가며 당한 것일 터, 그렇다면 어린 타니아의 정신이 버텨낼 리 없었다.
필립은 그녀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조금 험한 방법을 쓰더라도 확실히 제압해야만 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타니아에게로 움직이자 그 모습을 본 스텔라가 극도로 놀라 소리쳤다.
“해치지 마세요! 제발!”
필립은 그녀와 스텔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으나, 그 간절하고도 처절한 외침은 잠시 그의 걸음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스텔라는 안타깝게도 빈틈을 파고든 타니아의 공격을 제대로 피해내지 못했다.
타니아의 날카로운 손톱이 스텔라의 목을 스쳤다. 길고 날카로운 손톱은 근육으로 보호되고 있는 동맥을 건드리고 지나간 듯했다.
출혈량이 순식간에 배로 늘었다.
이미 꽤 많은 피를 흘린 그녀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려는 순간, 필립이 타니아를 덮쳤다.
“제발… 해치지 마세요… 제발.”
바동거리는 타니아의 팔과 다리를 순서에 맞게 제압하며, 필립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깐 재울 뿐입니다.”
타니아의 왼손을 무릎으로 누르고, 다른 손을 그녀의 무릎에 깔리도록 누르자 곧 텅 빈 목이 필립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 목을 팔로 감고 힘을 준 채 타니아가 기절하기를 기다리자, 몇 초 동안 발작하듯 날뛰던 타니아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맹수인 사자도 못 견디는 초크를 고양이가 섞인 흑묘족이 견딜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필립은 타니아가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윗옷을 벗어 스텔라를 지혈했다.
급하게 지혈하기는 했지만,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으나 지금부터라도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필립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열 명 남짓 남은 암살자들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채 일 분이 지나기도 전에,
몇몇은 도망쳤고, 몇몇은 항복했고, 몇몇은 사로잡혔다.
필립은 난장판이 된 마을 광장을 보며 숨을 골랐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줘.”
바닥에 엎드려 비는 크레센트 소속이었던 흑묘족이 보였다. 저들을 살릴지 죽일지는 흑묘족들에게 달린 것이었다.
상황이 끝난 이상, 더는 누군가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사람을 죽여 돈을 버는 암살자이든, 혹은 그의 적이든.
‘집에 가고 싶은데.’
그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곧 자신이 프리비아의 포탈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