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 * *
도움을 갈구하는 간절한 목소리에, 필립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너흰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예? 그게 무슨 말씀…… 캬아아아옹!”
필립은 그녀의 상처에 묶은 붕대를 최대한 세게 조였다.
“수작질을 부리려면 좀 치밀하게 부리던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애초에 너희 부족에 배신자가 있었다면 흑묘족이 그렇게 숨어 있을 수 있었겠냐고. 진작 크레센트에 발각당해서 개처럼 굴려졌겠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라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할 수 있으면 안 되지.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건 대비도 할 수 있었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고작 한 번 본 나를 찾아온 게 말이 안 돼.”
“하아악!”
라나는 하악질을 하며 털을 바짝 세웠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인간 모습으로 변신했다.
검은 머리칼을 질끈 묶은 여인, 라나의 눈이 요사스럽게 번득였다. 필립은 그 갈라진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마안이잖아.’
마안.
마주한 자의 영혼이나, 육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눈.
오직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거나 고위 마족에게 내려받아야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이거 보는 순간 걸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필립이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서 있자 순식간에 여유를 되찾은 라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가진 마안의 이름은 매혹의 마안. 그녀의 주인인 인큐버스 네펜에게 하사받은 능력이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지만,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겠어. 그렇지?”
그녀는 손을 뻗어 필립의 뺨을 쓰다듬었다.
“잘생겼네. 너와는 좀 재밌게 놀 수 있을 것 같아. 주인님께 청을 드려 목숨만은 붙여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질릴 때까지 데리고 있어 줄게.”
승리를 확신한 듯한 그녀의 말에 필립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다.”
“…뭐?”
그제야 필립이 마안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라나가 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필립의 주먹이 그녀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허윽!”
그녀가 털썩 쓰러지자 필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뭔가 좀 허술하다 했더니 믿는 구석이 있기는 있었군.”
마안 같은 사기 능력을 지녔으니 저렇게 밑도 끝도 없는 수작질을 부릴 수 있었으리라.
―그러니까요. 네리아도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네리아가 말했다. 필립은 그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속은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네.’
* * *
필립은 정신을 잃은 라나를 완전히 제압한 뒤 학부 건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난 왜 마안에 안 걸렸지?’
혼자 이리저리 고민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기에 속단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프리비아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학사 일정이 끝난 뒤 드래곤에게 라나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녀라면 저 건방진 고양이의 기억을 헤집어 일의 전말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이었다.
학부로 돌아오자마자 필립은 한 교무원과 마주쳤다.
“교관님? 오스왈드 교수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복귀하시면 곧바로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예? 벌써요?”
사고를 치고 나오기는 했으나 아직 수업 중일 테니 전달되려면 아직 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런데 벌써 자신을 찾는다고 하니 뭔가 이상했다.
곧 펠리시아의 연구실에 도착한 그는 문밖에서 하슬란 교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문제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을 걸세. 오스왈드 교수, 자네는 학생 시절부터 모범적이면서도 천재적인 학생이었지. 그러니 이 어린 나이에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 거고.”
필립은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화가 잔뜩 나서 수업도 때려치우고 펠리시아를 찾아왔군. 저런 양반이 어떻게 교수 노릇을 하고 있지?’
교관이라면 몰랐으나 교수까지 된 사람이 저렇게 생각이 없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잘됐지.’
“하아, 하슬란 교수님. 저는 오스왈드 교관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서 판단하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호감작을 잘 해놓은 덕분인지 펠리시아는 딱히 화가 나진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필립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연구실 안에는 얼굴이 붉어진 하슬란 교수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펠리시아가 있었다.
하슬란 교수는 필립을 발견하자마자 뭐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펠리시아가 먼저 나섰다.
“이게 다 무슨 말이야, 교관? 교수님 수업 중에 뛰쳐나왔다면서?”
“왜인지 이유는 못 들었습니까?”
“이유? 이유는 딱히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교관이 오면 물어보려고 했지.”
펠리시아는 그렇게 대답하며 하슬란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필립의 잘못만 들었지 앞뒤 사정을 듣진 못했다.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중간에 빠진 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수업까지 내팽개치고 여기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필립은 펠리시아가 아닌 하슬란 교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가족 앞이라고 내숭을 떠는 건가? 아까처럼 대들어 보게, 내 교육이 뭐 어쨌다고?”
그러자 하슬란 교수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필립은 그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감이 올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필립에겐 그와 투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제가 아까 뭐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교수님께서 가르친 제자가 대련 중에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고 교관을 공격했는데, 저를 탓하는 게 지금 맞는 일입니까?”
“그건 내가 나중에 해결할 일이지 자네 소관이 아닐세.”
“그러면 이건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입니까? 학생 서른 명을 교장에 내버려 두고서요? 그 아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둘의 말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펠리시아는 대화의 맥락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둘 다 잘못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필립의 표정을 보았다.
‘어?’
교관과 교수로 재회한 이후,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었다.
짜증이 극에 달해 일그러진 그의 표정에선 누나인 그녀마저도 섬뜩하게 만드는 뭔가가 느껴졌다.
“방자함이 도가 지나친데, 이러고도 멀쩡할 줄 아나? 이 일은 학장님께 보고하겠네. 더는 봐주기 힘들겠으니.”
하슬란 교수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 주둥아리 놀리기 전에 생각을 좀 더 해보십시오. 교수님. 교수님 바람대로 제가 여기서 쫓겨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내가 당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습니까?”
“뭐라고?”
필립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황당해진 하슬란 교수가 되물었다.
“내가 지금 교관 신분이라 당신 같은 병신이 지껄이는 말도 들어주는 겁니다. 교수님. 제가 이렇게 쫓겨나면 얌전히 하던 대로 술이나 마시러 다닐 줄 아십니까? 뭐 아카데미에 재직하는 교수님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겠지만, 교수님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어쩌시려고요?”
“지금 날 협박하는….”
“예, 협박 맞습니다. 씨발. 내가 협박 좀 하면 뭐 어쩌시게요? 칼 뽑아서 절 죽이실 겁니까? 못 하겠죠. 저 같은 망나니 새끼하고 칼부림이 나면 교수님도 여기서 얼마 못 버틸 테니까.”
“필립! 그게 무슨 소리니?”
필립의 말에 깜짝 놀란 펠리시아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필립은 그녀의 손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지금 가서 이르십시오. 일러서 절 쫓아내십시오. 전 여기서 나가는 그 순간부터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걸 이용해 교수님을 괴롭힐 겁니다. 제가 잃을 게 많아 보입니까?”
사람은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대부분 본성대로 행동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하슬란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밑바닥에서 올라온 사람이었고,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필립은 제아무리 망나니라도 강대한 백작 가문의 자식이었고, 그는 몰락 귀족 출신의 명예직 교수였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해도, 필립은 꽤 가까운 미래에 충분히 그를 파멸시킬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랬지?’
현실감을 되찾은 하슬란 교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필립을 건드려서 그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저 눈. 분노나 위협이 아닌 마치 자신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린 나무뿌리를 보는 것만 같은 눈이 불안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분노가 아니라, 죄인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 고민하는 듯한 시선.
물론 필립에겐 조금 다른 의미였겠지만 적어도 하슬란 교수는 그렇게 느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선 이미 적대감과 분노가 거의 사라진 뒤였다.
“할 말 더 없으시면 저는 가보겠습니다.”
“잠깐, 필립. 야! 임마!”
펠리시아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필립은 그대로 연구실을 나섰다.
하슬란 교수는 그를 붙잡지 않았고, 펠리시아는 필립이 사라진 문 너머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 * *
펠리시아의 연구실을 나온 직후, 필립은 곧바로 아카데미 뒷산으로 향했다.
필립은 프리비아와 만나기로 했던 장소 근처에 라나를 묶어서 매달아 두었다.
얼굴에는 작은 자루가 씌워져 있었고, 팔다리는 아예 힘을 쓰지 못하도록 관절을 한계 직전까지 꺾어 묶었다.
힘이 빠져 있던 그녀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급히 몸을 꿈틀거렸다.
“읍! 으으읍! 으으읍!”
“쟤 뭐라는 거니?”
―살려달라는 것 같은데요?
필립이 묻자 네리아가 대답했다.
“그래? 딱히 죽일 생각은 없는데.”
곧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포탈이 열리고, 프리비아가 그 너머에서 걸어 나왔다.
“저건 무어냐?”
그녀가 묻자 필립은 잠깐 고민한 뒤 대답했다.
“저를 찾아와 흑묘족이 기습당했다며 제발 도와달라고 빌더군요. 제가 안 속으니 마안으로 절 홀리려고 들던데요.”
현명한 드래곤인 프리비아는 필립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렸다.
“네펜이라는 놈이 보냈겠군.”
필립은 펄쩍 뛰어올라 라나를 묶은 줄을 잘라냈다. 몇 미터 높이에서 팔다리도 쓰지 못하고 떨어진 그녀는 충격을 그대로 몸통으로 받아야 했다.
“흐으으읍!”
라나는 고통으로 몸부림쳤고, 필립은 그녀의 얼굴을 가린 자루를 벗겨내었다. 재갈이 물린 그녀는 급히 마안을 발동했으나 필립은 물론이고 드래곤인 프리비아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잠시 비키거라, 기억을 뽑아야겠다.”
프리비아의 지시에 필립은 순순히 물러났다.
“기억을 뽑는다는 말입니까?”
“나 정도 되는 드래곤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지. 부작용이 조금 있겠지만.”
“부작용… 말입니까?”
“가끔 백치가 되는 놈도 있더군.”
“읍!! 으으읍!”
백치가 된다는 말에 라나는 거의 발광했다. 백치가 된다는 건 정신적인 죽음을 의미했고, 그건 육체의 죽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암살자인 그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필립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