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28화 (28/119)

028화

* * *

어떤 식으로 말아먹어도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 있다면, 과연 그 계획의 실행자는 어떤 기분일 것인가.

비록 일회용 치트키였으나 필립은 편안했다.

‘설마 드래곤이 있는데 실패를 하겠어?’

이번 상황은 꽤 특수했다.

만약 마족이 관련되지 않았더라면, 필립은 절대 그녀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먼저 원작의 설정을 알아야만 했다.

이 세상의 드래곤은 곧 대륙의 수호자였다.

그들은 단지 ‘이툰다’라는 대륙을 지킬 뿐이고, 그 구성원에 불과한 인간은 딱히 그들의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등장하는 일이 없었다.

필립은 드래곤과 마족 사이의 ‘협약’에 대해 알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와 마계 대공이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는 대신 맺은 약속.

‘너희는 인간을 멸종시킬지언정 결코 타락시켜서는 아니 된다. 그리하면 너희가 인간을 공격하는 것을 눈감겠다.’

‘그리하겠다.’

대단히 실리적이고도 효율적인 내용이었다.

드래곤의 시선에서는 인간이란 단지 대륙을 구성하는 일부분일 뿐. 딱히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설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다만 인간이 타락하여 마족의 편에 서게 되면 힘의 균형추가 무너지게 된다.

인간은 인신 공양이나 흑마법으로 바치는 제물을 통해 마족의 힘을 늘릴 수 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크레센트의 수장인 네펜은 인큐버스였고, 인큐버스는 인간을 타락시키기에 가장 알맞은 마족 중 하나였다.

프리비아의 눈에는 이사 온 집에서 등장한 바퀴벌레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녀에겐 발견하는 그 순간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만 하는 종류의 문제였다.

필립은 흑묘족의 족장인 스텔라의 연락을 기다리며 학사 일정을 수행했다.

신입 교관인 그는 사실상 저학년 교관이라기보다도 아카데미 전체의 일꾼이나 다름없었지만, 아직 학기 초반인 터라 그리 큰 일정은 없었다.

단지 귀찮은 잡일이 좀 많았을 뿐.

‘시키는 대로 곧잘 하니까 이것저것 떠맡기려고 드는군.’

그는 현재 검술 학부의 세 번째 평교수인 던머스 하슬란의 요청 때문에 안전 요원으로 불려온 상태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던머스 하슬란 교수는 30대 후반으로, 몰락 귀족의 후손이었다.

그는 밑바닥 용병으로부터 시작해 계승권이 없는 한 왕족의 검술 사범으로까지 활동했으며, 결국에는 20대 후반에 자신의 가문을 되찾고 명문 아카데미의 교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날 저런 눈으로 보지?’

필립은 하슬란 교수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짙은 경멸과 비웃음을 느꼈다.

“아, 예. 이렇게 처음 뵙는군요.”

그러나 초면부터 들이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필립은 불편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솔직히 자네를 이렇게 오래 볼 줄은 몰랐네. 그, 소문이 좀…… 자네도 알지 않는가?”

하슬란 교수의 농담 아닌 농담에 검술 교장에 모인 5학년 학생들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5학년 학생의 나이는 정상적으로 입학했다면 열아홉.

스물둘인 필립과 그리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그를 어느 정도 무시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하,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오래 버텨 보려고요. 혹시 압니까? 제가 교수님보다 더 오래 붙어 있을지.”

필립은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하슬란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무슨 뜻이긴요. 교수님께서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것 아닙니까? 평생 교수로 지내실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말입니다. 제가 혹시 실수라도 했습니까?”

하슬란 교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건방진 망나니 새끼가.’

필립의 말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어차피 명분은 자신에게 있다는 걸 하슬란 교수는 알았다. 그러나 대놓고 필립을 공격하자니 그건 체면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저건 이곳에 있을 자격도 없는 놈이지. 어디 살롱이나 다니던 개망나니 종자가 신성한 아카데미를 더럽히려 드는가.’

“날 그렇게 봐주다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오늘은 잘 부탁하네. 한창 혈기가 넘칠 아이들이라 조금 과열될 수도 있으니 자네가 신경을 좀 써 주게.”

“예. 그러겠습니다.”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 학부 5학년의 오늘 일정은 대련이었다.

열아홉쯤 되면 재능 있는 학생들은 보통 오러로 신체를 강화할 줄 알게 되고, 특출난 재능을 가진 학생은 미약하게나마 목검에도 오러를 흘릴 줄 알게 된다.

프리비아 아카데미에서는 4학년부터 수업에 진검을 사용했다.

따라서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최소 세 명의 교관이 참관해야만 했다.

승부가 결정된 순간 제때 나서지 않으면 학생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도록 하지. 베론, 렐베스. 너희부터 준비하거라.”

“네, 교수님.”

호명된 학생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이 뒤로 물러났다.

필립은 베론과 렐베스라는 학생들 사이에 뭔가 눈짓이 오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진검을 들고 서로를 마주 본 뒤,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면 시작하도록.”

하슬란 교수의 신호에 베론과 렐베스는 검을 들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와, 진짜 지루해요. 주인님.

삼십 초 정도가 지날 무렵 네리아가 속삭였다. 필립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동의했다. 그의 눈에는 학생들이 노리는 수와 그들의 특징이 훤히 보였다.

발놀림만 봐도 어느 정도 감이 왔다.

그리고 삼십 초가 더 지났다. 필립은 학생들이 숨죽이고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빈틈이 보일 때까지 저러고 있을 생각인가 봐요. 검술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 네리아 답답해 죽어요!

네리아가 가슴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필립은 웃음을 참으며 뭔가가 일어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아마도 베론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학생이 먼저 상대의 허벅지를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

렐베스는 그 검을 쳐내며 뒤로 세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왜 나한테 오지?’

그쪽은 필립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가 물러난 방향을 따라 베론이 달려들었다.

‘아니, 왜 나한테 오냐고?’

물론 필립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검도 뽑지 않고 있던 필립은 렐베스가 땅을 굴러 그 돌진을 피해내자 난데없이 베론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베론이 든 검이 필립의 상반신을 향해 쏘아졌다.

“엥?”

필립은 당황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오러를 입힌 손으로 베론의 검을 옆으로 비껴내며, 베론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그의 다리를 걸었다.

“으아악!”

불쌍한 베론은 검을 놓치고 잠깐 공중을 날아 대련을 구경하던 애꿎은 학생과 충돌해야만 했다.

“…?”

필립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베론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에서 5년이나 고급 교육을 받은 학생이 이렇게 초보적인 실수를 한다는 건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베론과 렐베스의 표정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다.

베론만이 아니라 렐베스 또한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 엿먹이려고 했구만.’

필립은 피식 웃으며 베론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니?”

베론은 필립의 손을 붙잡지 않고 스스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는 하체 단련을 좀 더 해야겠구나.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눠서 어떻게 적을 이기겠다는 건지. 교수님이나 교관님들께서 지적하시지 않았니?”

필립은 그답지 않게 조금 비꼬는 말투로 지적했다. 그리고 하슬란 교수와 5학년 교관들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 말도 안 하나?’

그들 정도면 베론과 렐베스가 대련에 제대로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숨에 눈치챘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별말이 없는 걸 보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 만했다.

아마 베론 또한 저렇게 형편없는 실력은 아닐 터였다. 단지 필립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렐베스와 사전에 작당했을 뿐.

필립은 기분이 나빠지는 걸 느꼈다.

사람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는 하슬란 교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외람된 말씀이지만. 베론 학생은 대련보다는 기초 단련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오늘따라 좀 긴장한 모양이군. 원래 저런 학생이 아닌데.”

“그렇다면 명상하는 법을 좀 가르치셔야겠군요. 긴장 때문에 저런 실수를 한다면 목숨이 오고 가는 실전에선 어떻겠습니까?”

필립이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하슬란 교수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내 교육 방침이 잘못됐다는 건가?”

“잘못이고 자시고, 결과가 이렇잖습니까. 참관하는 교관을 공격하는 건 제가 가르치는 1학년 학생들도 안 하는 짓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 의견이 중요합니까?”

학생들이 순간의 치기로 자신을 놀리려 드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교수인 하슬란은 저래선 안 됐다.

저런 걸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건 필립의 교육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슬슬 진심으로 짜증이 치솟았다. 빙의한 순간 사라진 줄 알았던 망나니의 혼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이 보고 있건 말건 필립은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자네 말은 알겠네. 하지만 내 학생을 판단하는 건 내 역할이야. 그러니 일단 맡은 일을…….”

―주인님. 저기요! 저기! 왼쪽 수풀에!

순간적으로 하슬란 교수와 네리아의 호출이 겹쳐서 들렸다. 물론 필립에겐 네리아의 목소리가 더 중요했다.

필립의 시선이 네리아가 말한 방향을 향했다.

‘엥?’

상처 입은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수풀을 헤집고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필립은 스텔라의 전언을 떠올렸다.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싸울 수 있는 모든 흑묘족을 모으고, 유효한 계획을 세울 테니.’

그 목소리와 저 다친 고양이를 보자 필립은 일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급히 소리쳤다.

“잠시만요! 제가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자네는 주제 넘게…… 뭐라고?”

필립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자 당황한 하슬란 교수가 소리쳤다.

“뭐 하는 건가?”

당황한 필립이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자세한 문의는 디엠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는 수풀 속에서 다친 고양이를 주워든 뒤 빠르게 검술 교장을 벗어났다.

‘뒷일은 맡길게, 누나.’

* * *

“필립… 님… 맞으십니까?”

다친 고양이는 분명히 모르는 고양이였으나, 흑묘족임에는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선 야옹거리는 울음소리 대신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나지는 않을 터였다.

“예. 맞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다친 건 아니었으나, 필립은 일단 피로 얼룩진 그녀의 앞다리와 반쯤 잘려나간 꼬리에 응급처치부터 했다.

“저는 스텔라 족장님의 사촌 자매인 라나라고 합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만….”

“괜찮으니 말하십시오. 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순간 다급해졌으나 어차피 드래곤이 아군이었으니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피해가 좀 커지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어진 흑묘족 라나의 말에 필립은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흑묘족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족장님께서는 크게 다치셔서 급히 몸을 숨기셨고, 침입자들에 의해 저희 종족은 마을을 버리고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미치겠군.’

짜증이 치민 필립이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라나의 젖은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먹거리는 눈빛에 필립은 할 말이 없어졌다.

“저희 종족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부탁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