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 * *
필립은 공중을 날다시피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낙하하던 검은 물체가 필립의 검에 걸렸으나 뭔가를 제대로 벤 감각은 없었다.
마치 오폐수가 뭉쳐서 만들어진 덩어리 같은 형태였는데, 필립은 그 물체의 정체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다크 슬라임? 잠깐, 이러면?’
반으로 갈라진 다크 슬라임의 절반이 쟈니스 무르엘라를 덮쳤다.
“꺄아아악!”
쟈니스는 시커먼 액체 덩어리가 얼굴을 덮치자 비명을 질렀다.
“읍! 흐으읍!”
물컹거리고 끈적이는 뭔가가 코와 입, 귀를 파고들기 시작하자 그녀는 순식간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아가씨!”
스테판과 셰릴이 비명을 질렀다.
필립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크 슬라임의 남은 절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진 다크 슬라임이 불결한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망했다. 저쪽에 핵이 있겠군.’
반으로 갈라진 다크 슬라임 중 쟈니스를 덮친 쪽에 핵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급히 달려온 페렉 교관이 쟈니스의 상태를 살폈다.
“……슬라임?”
그는 다급히 화염 손길 주문을 외웠다. 필립이 버럭 소리쳤다.
“멈추십시오!”
검의 옆면으로 페렉 교관이 든 지팡이를 후려쳤다. 마법사의 나약한 악력으로는 검사의 일격을 버텨낼 수 없었다.
설명을 바라는 듯한 페렉 교관의 시선에 필립은 빠르게 정보를 전달했다.
“마력을 흡수하는 놈입니다.”
페렉은 크게 당황했다.
“예?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불! 마력을 이용하지 않고 오직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피운 불이 필요합니다.”
필립은 다급해졌다.
다크 슬라임은 원작의 중반에나 나오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자연 발생한 몬스터가 아니라 마족의 손에 탄생한 종족으로 ‘마법사 분쇄기’라고도 불리며 대처법을 모르는 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
놈을 미리 제거하지 않으면 희생자의 뇌를 파먹고 그 지식과 경험을 흡수해 무한히 성장하게 된다.
그건 곧 쟈니스 무르엘라의 죽음을 의미했다.
가장 좋은 대처법은 발견 즉시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다만 마력을 흡수하는 특성 때문에 화염 마법은 금물이었고, 기본적으로 액체였기에 검기도 잘 듣지 않았다.
급한 대로 필립은 쟈니스를 덮친 다크 슬라임에게 손을 뻗었다.
숨을 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지 못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전 그녀의 숨이 끊어질 터였다.
“…어쩔 수 없지. 다들 내 곁에서 떨어지십시오. 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겁니까?”
페렉 교관이 물었고,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할 수 있습니다.”
다크 슬라임의 몸체에 손이 닿자 필립은 끔찍하리만치 부정한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오러를 한계까지 끌어올리자, 다크 슬라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나한테 와라.”
마족들은 다크 슬라임에게 오직 한 가지 본능만을 주입했다.
생존 본능.
어떻게든 살아남아 더 나은 존재가 되길 열망하는 본능에 지배당한 다크 슬라임은 곧 더 먹음직스러운 에너지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일 그것에게 이성이 존재했더라면 다 잡은 고기나 다름없는 쟈니스의 목숨을 끊었겠으나 지금은 단지 무기물 덩어리일 뿐.
필립은 다크 슬라임이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쟈니스가 다루는 마력보다 필립이 쌓은 오러가 더 먹음직스럽게 느껴진 탓이었다.
숨이 턱 막히는 공포와 끔찍한 불쾌감에 몸이 절로 떨렸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삐끗한다면 그가 쟈니스 대신 뇌를 파먹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자신이 있었다.
‘덤벼 봐, 이 새끼야.’
얼마 전 깨달은 마력의 성질 변환. 그걸 이용한다면 다크 슬라임쯤은 이겨낼 수 있을 터였다. 필립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액체를 억지로 무시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놈을 구성하는 부정하고 사특한 마력과 반대되는, 정화와 파사破邪를 상징하는 힘.
그것이야말로 비전서 ‘월광검’이 추구하는 방향성이었다.
곧 필립의 몸에서 옅은 빛무리가 떠올랐다. 마치 달빛처럼 창백한 색조의 은은한 빛이었다.
필립은 다크 슬라임의 비명과도 같은 몸부림을 감지했다. 곧 놈이 필립의 팔에서 떨어져 나가려 했다.
“교관님!”
마침 페렉 교관이 불이 붙은 로브를 던졌다. 기름이라도 먹인 듯 강한 화력이었다.
필립을 지나치며 날아간 그것은 셰릴 근처에 떨어졌다. 셰릴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 옷가지를 집어 필립에게 달려갔다.
“물러나렴. 이게 널 노릴 수도 있으니.”
필립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벗어나려는 다크 슬라임을 오히려 붙들었다. 셰릴이 몇 걸음 물러나자 필립은 이를 악물며 타오르는 불꽃 속으로 팔을 밀어 넣었다.
검고 더러운 연기를 내뿜으며 다크 슬라임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필립은 놈의 몸체가 완전히 타서 없어지기 전까지 팔을 빼지 않았다.
오러로 팔을 보호했음에도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가 불꽃 속에서 팔을 빼냈을 땐 피부를 가리던 소매는 이미 재가 된 후였다.
“후….”
필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던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교…관님?”
“다들 뛰어!”
필립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의 연마된 본능은 이 장소가 곧 무너진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건 페렉 교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필립을 바라보며 물었다.
“교관님도 어서 움직이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필립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쟈니스를 한쪽 팔로 안아 들고 셰릴의 손을 세게 붙들었다.
그러나 대처가 한 발자국 늦었다.
필립은 딛고 선 땅이 쩍 갈라지는 걸 느끼곤 다급히 셰릴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여기서 앞으로 뛰쳐나갔다간 땅이 무너질 게 분명했다. 세 명분의 무게를 견딜 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지반이 불안했다.
‘미쳐버리겠네. 진짜로.’
그는 한숨을 내쉰 뒤 페렉과 프리실라를 향해 외쳤다.
“당장 학생들을 데리고 여기서 나가십시오. 여긴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같이 나가야 합니다!”
페렉 교관이 목에 핏대를 세운 그 순간, 필립이 밟고 선 땅이 무너져 내렸다.
“꺄아아아아악!”
셰릴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필립을 끌어안았다.
* * *
쟈니스 무르엘라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숨이 쉬어져. 나, 살아있는 거야?’
몸이 움직였고 생각이 이어졌다. 비록 주변은 어두웠으나 눈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흑.”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드는 건 기절하기 전까지 느꼈던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절망이었다. 열여섯 소녀가 견뎌내기엔 죽음의 공포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흐윽… 히잉….”
그녀는 울먹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곧 근처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던 셰릴을 발견했다.
“아가씨?”
“셰…릴?”
“몸은 괜찮으세요? 다친 데는 없으시고요?”
“난… 훌쩍… 괜찮은 것 같아. 여기는 어디야?”
“던전의 지하요. 아가씨께서 정신을 잃은 사이에 땅이 무너졌거든요….”
쟈니스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셰릴이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던 탓이었다. 게다가 셰릴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드러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셰릴은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필립 교관님께서 저희를 지키려다 같이 떨어지셨어요. 교관님은 주변을 살펴보신다고 말하시곤 잠깐 저쪽으로 가셨고요….”
“어, 어차피 금방 사람들이 올 거잖아. 뭐가 문젠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통로가 다 무너진 것 같거든요. 아카데미에서 구조대를 보낸다고 해도 이곳을 금방 찾아낼 것 같지는 않아요….”
그녀들이 있는 장소는 던전이 아닌 동굴이었다. 셰릴이 정신을 차린 이곳은 한쪽이 막혀 있었고, 깊은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반대편에 있었다.
“그래도… 교관님이라도 계시니까….”
쟈니스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필립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애초에 유력 가문의 영애인 그녀가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난 망나니인 그를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쟈니스의 말에 셰릴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필립마저 없었다간 무서워서 미칠지도 몰랐다.
그러나 셰릴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녀와 쟈니스가 다치지 않도록 필립은 스스로 맨 아래에 깔렸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움직여야 해. 나는 교관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마법사야. 내가 돕는다면 상황이 더 나아질지도 몰라.”
쟈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축축해?’
아랫도리가 이상하게 축축했다.
‘나… 나 설마? 아니지? 설마 내가? 무르엘라 가문의 쟈니스가?’
현실을 아무리 부정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코를 훌쩍였다. 평생 곱게 살아온 그녀에겐 감당하기 힘든 수치였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아…아니야. 아무것도.”
냄새 때문에라도 셰릴은 모를 수가 없었다. 쟈니스는 셰릴이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배려를 쟈니스는 얌전히 받아들였다.
“…가자.”
“네.”
쟈니스가 또래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셰릴 또한 동의했다. 두 학생은 조금 떨어진 채 필립이 걸어간 길을 따라갔다.
“이건, 피잖아?”
두 소녀는 통로 중간에서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 교관님께선 저희 두 사람을 몸으로 받아내시느라 다치셨어요. 아마 그래서….”
셰릴도 슬슬 울먹이고 있었다. 쟈니스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가능한 모든 분야의 마법을 익혔으나, 치유 마법만은 특화된 재능이 필요한 분야였기에 배우지 못했다.
소녀들은 걸음을 빨리해 결국 필립을 거의 따라잡았다. 필립은 통로 끝, 커다란 공동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뭔가와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쟈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어… 응?”
“저게… 뭐예요…?”
그때 필립이 자신을 쫓아온 두 소녀의 기척을 느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기 그대로 있지 그랬니.”
쟈니스 무르엘라는 두려움으로 몸을 벌벌 떨며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교관님. 저거, 저게 대체 뭐죠?”
필립과 마주하고 있는 건 사람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달고 있었고, 피부가 사람보다 훨씬 창백할 뿐이었다.
쟈니스는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뱀파이어… 마족이잖아….’
전설 속에나 나오는 마족의 일원, 뱀파이어였다.
쟈니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저게 정말 뱀파이어라면 필립도, 그녀도, 셰릴도 모두 죽을 것이었다.
뱀파이어는 작위를 가진 마족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오럼 나이트나 적색 마탑 같은 최고의 무력 집단들도 결코 단신으로 맞서려 하지 않을 수준의 괴물이라는 이야기였다.
“…키익.”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흡혈귀가 웃었다. 쟈니스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들었다.
‘골치 아픈데.’
필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뼈가 부러지거나 장기에 손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이곳저곳을 긁혀 출혈이 꽤 있었다. 그건 눈앞의 뱀파이어에게 급소를 모두 내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뱀파이어가 타고나는 능력인 ‘혈액 조작’은 출혈 중인 상대에겐 권능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검사에겐 그나마 덜 치명적이었으나, 혈액 조작 능력으로 필립의 출혈을 더 빠르게 하는 것 정도는 뱀파이어에게 쉬운 일이었다.
“쟈니스, 셰릴.”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필립은 검을 들었다.
장기전으로 이어지면 필패였다. 단숨에 승부를 내야만 했다.
순혈 마족인 뱀파이어는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절대 죽지 않을 터였다.
“날 돕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부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렴.”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그는 최근에야 입문한 월광검을 사용해야만 했다.
네리아 대신 들고 온 철검에서 본래 푸른색이었던 검기 대신 창백한 달빛을 머금은 검기가 솟았다.
머나먼 과거의 소드 마스터, ‘오템’의 비전이 세상에 다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