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22화 (22/119)

022화

* * *

필립은 뱀파이어의 자세를 살폈다.

검사의 시선으로는 그야말로 빈틈뿐인 자세.

언제 어디를 노리더라도 공격을 허용할 것처럼 급소를 훤히 열어두었으나 필립은 방심하지 않았다.

본래 모든 무술의 출발점은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것.

태초부터 강자로 존재하던 마족은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뱀파이어는 송곳니를 드러낸 채 필립이 아닌 쟈니스와 셰릴을 바라보았다. 놈에게 있어 출혈이 일어난 일개 검사 정도는 장애물도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래. 방심해라.’

안개화, 혈액 조작, 높은 수준의 흑마법. 오러 마스터에 근접한 신체 능력.

이 모든 것들을 가진 뱀파이어를, 필립은 오래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가능한지도 의문이었다.

유한한 체력의 인간과는 달리 마족의 체력은 거의 무한에 가까웠고, 필립의 체력은 뱀파이어와 맞부딪히기도 전에 절반 이상 소모되어 있었으니.

필립은 오러를 검에 휘감았다. 두 갈래로 갈라진 창백한 오러가 나선을 그리며 필립의 검을 감쌌다.

‘이걸 벌써 쓸 줄은 몰랐는데….’

이건 지금 시점에서 필립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이었다.

그 이름은 ‘나선검’. 회전검과 오러 채찍, ‘위프 소드’를 융합한 것이었다. 필립은 현세대의 그 어떤 검사도 몇 년 안에 이 기술을 익힐 수 없으리라 장담했다.

물리학을 모른다면 원리 자체를 깨달을 수 없으니까.

문득 뱀파이어의 시선이 필립의 얼굴로 향했다. 필립은 그 순간 오러를 최대 속도로 회전시키며, 몸 전체를 이용해 회전력을 최대로 높였다.

그리고 섬광 같은 찌르기가 뱀파이어의 가슴을 갈랐다.

그야말로 회심의 일격. 이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필립의 운명은 불투명했다.

‘…걸렸나?’

뭔가 걸린 느낌이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선검’을 이용한 찌르기가 가슴을 꿰뚫는 그 순간 뱀파이어가 ‘안개화’ 능력을 발동한 것이었다.

붉은 안개로 화한 뱀파이어는 순식간에 뒤가 아닌 앞으로 이동했다.

그 형태는 필립이 아는 것보다 불안정했기에 필립은 놈이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안심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스스로를 지켜라! 쟈니스, 셰릴!”

그가 소리치지 않아도 쟈니스와 셰릴은 이미 방어막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붉은 안개가 그녀들을 감싸기 직전 반투명한 보호막이 안개의 진입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진 마력의 질이 달랐다.

“교관님! 제발!”

다급하고 간절한 외침에 필립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으나 그의 공격은 붉은 안개를 조금 증발시킬 뿐이었다.

그나마 ‘월광검’에 사악한 것을 부정하는 힘이 있어서 공격이 통하는 것이었고, 본래라면 필립은 놈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아…아아! 교관님!”

쟈니스가 시전한 주문이 먼저 박살이 났다. 남은 건 셰릴이 시전한 방어막 주문. 쟈니스에 비하면 철 방패와 나무 방패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이런 식으로 필립을 무시하고 학생들을 노린다면 답이 없었다.

붉은 안개에 휩싸인 셰릴의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엄마.”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고, 필립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도박수를 내는 방법뿐이었다.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뭐가 되었든 아이들이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의 검에서 철을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나기 시작했다. 나선으로 회전하는 오러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오러와 강철의 마찰로 인해 검신의 온도가 순식간에 상승했다.

그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자 뱀파이어가 변한 안개가 필립의 검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고온에 안개가 증발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돌아보지 말고 뒤로 달려라. 지금 당장, 여기서 최대한 멀어져.”

“…네, 네!”

필립의 지시에 쟈니스는 셰릴의 손을 붙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 저주받을 존재와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들이 충분히 멀어지는 걸 본 필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철검이 온도를 버티지 못하고 형태가 변하는 것이 손으로 느껴졌다. 이제 이 검은 그의 오러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었다.

필립은 철검을 멀리 던졌다. 땅에 부딪힌 검이 ‘ㄱ’자로 구부러졌다.

스스로 무기를 던지자 뱀파이어가 즉시 몸을 재구성했다.

“사람 인생 진짜 모르는구나.”

필립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다리를 벌렸다.

“살다 살다 흡혈귀와 권투를 하게 될 줄이야.”

뱀파이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필립은 그 여유 넘치는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왜 애들을 안 따라가지?’

흡혈귀 뱀파이어의 지능은 뛰어났다. 필립이 뱀파이어의 입장이었다면 그를 내버려 두고 쟈니스와 셰릴을 뒤쫓을 것이었다.

“키익!”

뱀파이어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필립의 어깨를 노린 공격이었다.

허리를 숙여 가까스로 피해낸 필립이 뱀파이어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오러로 강화된 일격이 제대로 뱀파이어의 턱을 강타했으나 그리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애초에 신체의 내구도가 인간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번에는 뱀파이어의 눈이 붉게 빛났다. 필립은 하체에 입은 상처에서 피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혈액 조작’ 기본적인 저항 능력이 없는 이라면 맨몸에서 모든 혈액을 뽑아낼 만큼 강력한 능력에 필립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뱀파이어를 공격했다.

오러를 두른 공격을 뱀파이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받아냈다. 타격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위력이 너무 모자랐다.

‘…내 힘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지켜볼 생각이군.’

무력감과 절망이 엄습했다.

“그래. 이 새끼야.”

그러나 필립은 주저앉지 않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그의 혈액을 섭취한 뱀파이어가 즉시 쟈니스와 셰릴을 쫓아갈 게 뻔했다.

“어디 한번 내가 죽을 때까지 맞아봐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필립은 죽음을 각오했다. 남은 모든 생명력을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타격을 줄 작정이었다.

“…골치 아픈 아이구나.”

그리고 그때 제삼자의 목소리가 필립의 폭주를 멈췄다.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시야에 암청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보였다.

“인간이라는 종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 그만한 재능을 가졌으면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몸을 사리는 게 마땅하거늘 터럭만큼의 가치도 없는 의무에 목숨을 내던지다니?”

‘뭐라는 거야?’

필립은 눈을 깜빡였다.

“키이이익!”

뱀파이어가 몸을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놈은 현재 가장 위험한 상대가 누구인지 판단을 마친 듯했다.

“…타서 죽어라. 버러지 같은 것아.”

여인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뱀파이어를 가리켰다. 그러자 뱀파이어의 몸으로부터 불꽃이 솟구쳤다.

“키익? 키이익! 키이이이익!”

흡혈귀의 퇴화한 성대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었다. 서늘한 톤의 살가죽이 녹아내리고, 살점이 타서 고기 굽는 냄새가 동굴에 퍼졌다.

“키에에에엑!”

고작 숨 몇 번 내쉴 시간 만에 흡혈귀의 몸은 재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필립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하아,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서 뭘 묻느냐? 조용히 잠이나 자려무나.”

여인은 그렇게 대답하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정신을 잃은 필립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땅에 쓰러졌다.

* * *

“윽.”

정신이 들었을 때 필립은 자신이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무릎을 빌려준 사람은 마침 필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필립이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프리실라?”

“괜찮아, 필립?”

프리실라는 걱정 섞인 목소리로 필립의 상태를 살폈다.

“별로 괜찮지는 않은데, 네가 어떻게 여길?”

그녀는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이다가 필립이 몸을 일으키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내가 온 게 아니라… 잠깐만?”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눈을 감았다. 필립은 그녀의 존재감이 점점 짙어지는 걸 느꼈다. 눈앞의 그녀는 그대로였으나 마치 산과 같은 거대한 뭔가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곧 프리실라의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었던 맹한 기색은 간데없었고 지독한 권태와 귀찮음이 그 자리를 대신 메웠다.

거의 본능적으로 필립은 그녀가 프리실라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걸 알아차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감이 좋은 꼬맹이구나.”

그녀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좋은 감으로 이곳을 피했어야지. 벌레처럼 약하면서 자기 주제도 모르고 어디를 들쑤시고 다니는 거냐?”

“….”

“오백 년 만에 나타난 계승자라는 놈이 이런 부나방 같은 놈이라니….”

‘계승자’라는 단어에 필립이 흠칫했다. 그가 계승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계승자라 하면, 월광검을 말하는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월광검. 네놈이 그걸 계승했잖느냐.”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필립은 상대의 정체를 확신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께선 드래곤이시겠군요.”

그녀는 필립을 똑바로 바라보며 씩 웃었다.

“재밌구나. 어떻게 알았느냐?”

“프리비아 아카데미를 설립한 이가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월광검’을 아카데미에 숨겼다면, 그걸 관리할 존재는 오직 드래곤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재주가 제법 좋구나. 그래. 내가 바로 ‘지혜의 은룡’이라 불리는 ‘프리비아’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인간 놈의 맹약에 묶인 가련한 드래곤이지. 그리고 방금 네놈 때문에 또다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낼 뻔했구나.”

‘…진짜였군.’

필립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드래곤 프리비아는 매우 화가 난 듯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필립을 가리키자 필립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오백 년. 오백 년이다. 그 빌어먹을 인간이 월광검을 얼마나 잘 숨겼는지, 오백 년이 지나도록 그걸 발견하는 놈이 없었다. 그런데 네놈은 아카데미에 나타나자마자 잘도 찾아내더군. 나는 생각했다. 이제 내 의무가 곧 끝나겠노라고.”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자 필립은 온몸의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헌데, 네놈은 은인자중하며 월광검을 익히는 대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대기 바쁘더구나. 삼백 년 전이었다면 네놈이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들 대신 목숨을 바치건, 겁도 없이 마족이 만든 던전에 발을 들이건 상관하지 않겠다만 이제 내 인내심은 바닥났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필립이 묻자 드래곤 프리비아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나대다 뒈지기라도 하면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좁은 땅덩이에 묶여 있어야 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구나.”

그리고 그녀는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네놈을 외딴섬에 가둘 것이다. 너는 월광검을 대성하기 전에는 결코 나오지 못하리라. 고작 인간 때문에 마음을 졸이지는 않겠다.”

프리비아가 아무렇게나 손을 내젓자 필립의 머리 위에 포탈이 열렸다. 거기서 느껴지는 강한 흡입력을 느낀 필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 잠시만요! 타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