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 * *
요슈아 프렌할은 4년 전까지만 해도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
성공해 돌아온 제자가 은사를 찾아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하필 이 시점이라는 게 문제였다.
‘염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프로 선수가 연습을 도와줄 아마추어를 염탐하러 오는 건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다.
‘단지 동생을 만나러 온 건가?’
그럴 확률이 가장 높았으나 근거가 빈약했다. 굳이 사람이 많은 수업 시간대를 노릴 필요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기까지 기다렸다가 불러내면 될 일이니까.
애니스 프랄린과 함께 학부실로 향한 필립은 안쪽이 소란스럽다는 걸 느끼곤 잠깐 분위기를 살폈다.
“그 요슈아 프랄린이 아카데미에 돌아오다니. 이거 별일이군. 이곳엔 그리 좋은 추억이 있지는 않을 텐데.”
에밀 파노이 수석교수의 목소리였다. 그가 학부실에 오는 건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에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겐 매듭지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수석교수님. 그 일을 극복하지 못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놈이 되는 겁니다.”
처음 듣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요슈아 프랄린인 모양이었다.
“7년 전 일이다. 요슈아. 그게 그렇게 끔찍한 경험이었던가?”
“교수님께선 상상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때 느꼈던 무력감과 절망은 비록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바꾸었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저는 제 두려움을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필립은 애니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회의 딸이라 그런지 그녀는 필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지금 들어가지 않는지 묻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기에 필립은 피식 웃으며 문을 노크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수석교수는 곧바로 허락했다.
“자네 일터인데 뭘 묻고 그러나? 들어오게.”
학부실에 들어서자 넓은 학부실에 수석교수와 흰색 기사 정복을 입은 청년이 있었다.
아무래도 수업 중간이라 다른 교직원들은 다들 바쁜 듯했다.
“오빠?”
애니스 프랄린이 젖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이상하게도 청년의 시선은 필립에게 꽂혀 있었다.
‘왜 날 보지?’
“오빠!”
애니스가 다시 부르고 나서야 청년, 요슈아 프랄린이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애니스. 사랑하는 내 동생. 아직 수업 중이라고 들었는데, 또 떼를 쓴 모양이구나.”
그가 팔을 벌리자 애니스 프랄린은 냉큼 달려가 그의 품에 펄쩍 뛰어들었다. 요슈아 프랄린은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뺨을 맞대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빠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도 참았어야지.”
요슈아는 그렇게 말하며 동생을 내려놓았다. 애니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서 수업을 준비해라. 수업이 끝난 뒤에 외출증을 제출하고 정문으로 나와.”
“…알았어.”
애니스 프랄린이 힘없이 돌아가자 필립은 요슈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난데없이 빠득,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맞지? 필립 오스왈드.”
“네. 맞습니다만.”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요슈아 프랄린이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날 기억하겠지?”
필립은 잠깐 생각한 뒤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는 직감했다. 그와 요슈아 사이에 아무래도 좋지 않은 과거가 있는 것 같았다.
곧 에밀 파노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학부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하핫! 으하하핫! 그렇지! 원래 때린 놈은 기억을 못 해. 맞은 놈만 몇 날 며칠을 끙끙대면서 괴로워할 뿐이지.”
‘이거 설마….’
필립은 수석교수의 말을 듣고서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예전 필립에게 맞은 놈인가?’
현역 망나니 시절의 필립과 싸웠거나, 혹은 필립에게 당했던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는 떨리는 눈동자를 요슈아 프랄린에게로 향했다.
분노로 거칠어진 숨소리와 핏발이 선 눈.
허리에 검을 찼다면 당장이라도 뽑을 것만 같은 기색이었다.
“날…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는 내게 한 짓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쫓겨났을 텐데. 저급한 수작을 부리는 건 예전과 달라진 게 없군.”
그 순간 필립의 머리에 벼락이 쳤다.
‘필립에게 죽도록 맞았다던 두 학년 위의 선배가 바로 저 사람이었어.’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걸 느끼며 필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쌓지도 않은 업보와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일 터였다.
‘내가 한 짓도 아닌데 괜히 미안하잖아.’
“잠시만요. 이제 기억났습니다. 요슈아 프랄린. 그때 그 일은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선 안 될 일이었는데.”
요슈아를 때렸던 필립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니 지금의 필립이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고? 그래. 미안해야지.”
젊은 실베르 나이트는 가까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성공한 듯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필립은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어디선가 많이 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군. 극복한 줄만 알았는데, 네 얼굴을 본 그 순간 화가 치밀더군. 사실, 나는 네게 고마워해야 해. 네 덕에 나라는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요슈아 프랄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네가 날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자만에 빠져 살았겠지. 다만 내 바지 끈을 자른 것만은 평생 용서할 수 없겠어. 덕분에 한동안 놀림감이 되어야 했으니.”
필립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짓을 당했는데 저럴 수가 있나?’
요슈아 프랄린은 부정할 수 없는 대인배였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필립의 사과에 요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교류 대련을 앞두고 너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필립 오스왈드. 대련에서 널 꺾기 전에, 한 번쯤은. 너도 꽤 변했군.”
“아무래도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그렇지. 7년은 긴 시간이니까.”
요슈아 프랄린은 그렇게 말하곤 에밀 수석교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교수님.”
수석교수는 손을 휘적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그러던지.”
요슈아가 학부실을 나가자마자 수석교수는 필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저놈, 자네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더군.”
“예?”
“저 녀석이 왜 왔을 것 같나? 불안해서야. 검을 들고 자네를 마주하면 겁먹어서 제 실력을 내지 못할까 봐, 미리 자네를 만나러 온 거란 말일세.”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까지 말했습니까?”
“그럴 리가. 겁쟁이들 생각이야 뻔하지. 물론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저 모자란 놈은 결국 꼬리 내린 개에 불과해. 무난히 1승을 챙겨가겠군.”
수석교수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경쾌한 걸음으로 학부실을 나섰다.
‘…생각보다 더 빡세게 준비해야겠군.’
필립은 조용히 결심했다.
* * *
실베르 나이트와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교류 대련은 꽤 큰 행사였으나, 안타깝게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을 행사였다.
아카데미 측은 상관없었으나, 실베르 나이트 측에서 소속 기사들의 무력 수준이 널리 퍼지는 걸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아카데미 측에서는 학장을 비롯한 믿을 만한 교수 몇 명, 실베르 나이트에서는 단장과 대장급만이 대련을 참관하기로 했다.
교관들과 평기사들로 인해 출입이 통제된 검술 교장에서 필립은 실베르 나이트와 마주했다.
“오랜만입니다. 수석교수. 마지막으로 본 게 5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실베르 나이트의 단장이자 오러 마스터 중 하나인 페이언 블러셋 단장이 에밀 수석교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현역에서 뛰는 놈들 데려다가 교육자들을 이겨 먹으려 들다니, 내가 못 본 사이에 변죽이 많이 좋아졌군.”
수석교수는 이 상황 자체가 불만인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자존심 때문에 수락하기는 했으나 그 또한 교직원들이 불리하다는 것 자체는 인지하고 있었다.
“제가 요즘 젊은것들을 어떻게 다루겠습니까?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그래라 그래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젊은이들끼리 좀 부대껴 보라고 하시지요.”
페이언 블러셋은 가벼워 보이는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그러나 에밀 파노이 교수가 그렇듯 그 또한 검강을 다룰 줄 아는 검의 달인일 터, 그가 가르친 기사단원들이 약할 리가 없었다.
“누구부터 내보낼 텐가? 오랜만에 늙은 몸을 이끌고 나와 겨루는 건 어떤가?”
수석교수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페이언 블러셋은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십 년 동안 전쟁터에서 검을 다듬었습니다. 그런데 십 년을 편하게 보낸 당신을 이길 자신이 없군요.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건 젊은 놈이 할 일이지, 저 같은 늙은이가 할 일이 아닐 겁니다.”
“그러다 늙어 죽겠군. 노환으로 뒈지기 전에는 날 한 번 이겨봐야 할 것 아닌가.”
수석교수가 재차 도발했으나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한 이십 년 정도 더 기다리면 당신도 슬슬 뼈마디가 시리지 않겠습니까? 그때 도전하면 될 일이지요.”
필립은 예순을 넘긴 노인들의 유치한 싸움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을 느끼며 옆자리에 선 펠리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부끄러워서 못 살아. 진짜.”
그녀 또한 필립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컴벨 교수, 자네가 먼저 나서겠나? 원래 이런 일에는 연장자가 먼저 나서는 법이지.”
수석교수가 호출하자 대기하고 있던 프레이저 컴벨 교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수석교수님.”
페이언 블러셋은 잠시 고민하더니 한 기사를 불러냈다.
“브리안.”
“예.”
“컴벨 경은 현장에서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이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도록.”
“유의하겠습니다. 단장님.”
기사는 앞으로 나섰다. 기사 정복에 푸른 견장이 달린 것으로 보아 평기사들을 이끄는 대장이었다.
“….”
컴벨 교수는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관자놀이 부근에 혈관이 솟은 것으로 봐선 적잖이 화가 난 듯했다.
퇴물 취급을 받고 좋아할 검사는 드물 터였다.
수석교수는 컴벨 교수에게 지시했다.
“죽이지만 말게.”
분노를 눌러 삼키며 컴벨 교수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진검 대련이었기에 두 검사는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실베르 나이트 측의 기사, 브리안은 은색 흉갑과 견갑, 부츠, 그리고 건틀릿을 찼고, 컴벨 교수는 현역 때 쓰던 장비를 가져온 듯 금색 장비를 착용했다.
점검까지 마친 그들은 검을 들고 연무장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어디까지나 대련이니 본인이 진 것 같으면 깔끔하게 인정하도록.”
페이언 블러셋의 말에 두 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시게.”
그가 시작을 알리자마자 컴벨 교수가 먼저 공격했다.
왼쪽 가슴을 노리는 찌르기였고, 브리안은 몸을 틀어 피했으나 그의 견갑을 고정하는 끈이 찌르기에 살짝 걸리고 말았다.
고작 한 수만에 방어구 중 하나가 날아간 셈이었다.
우연처럼 보였으나 필립은 알 수 있었다. 저건 상대가 피할 걸 예상하고 노린 것이었다.
“흡.”
기사 브리안은 꽤 놀란 듯 눈썹을 꿈틀했다. 그리고 컴벨 교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검기가 덧씌워진 교수의 검이 그와 브리안 사이의 공간을 몇 번이나 헤집었다.
브리안 또한 검기로 맞받아쳤고, 검끼리 맞부딪힐 때마다 묵직한 굉음이 터졌다.
‘…대단한데.’
필립은 컴벨 교수에게 감탄했다. 그의 수가 브리안보다 한 수 더 앞서 있었다.
본래라면 몇 합도 되지 않아 끝날 승부였으나 기사 브리안은 놀랍게도 거의 모든 공격에 반응했다.
‘저건 알고서 막는 게 아니라, 느껴서 막는 건데.’
타고난 것이든 학습된 것이든 브리안의 위기 감각은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반사신경을 비롯한 육체적인 능력은 그가 컴벨 교수보다 오히려 뛰어났다.
그리고 수십 합의 공방이 이어졌다.
“흐으읍!”
이대로는 체력에 밀려서 지고 만다는 걸 예상한 컴벨 교수가 오러를 끌어올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고작 2주 동안의 특훈으로는 예전과 같은 체력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승부수를 던질 생각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컴벨 교수의 검극이 몇 번이나 흔들렸다.
브리안은 다음에 날아올 공격이 찌르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대체 어디를 노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본래라면 어디를 노리던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이번 공격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교수의 검극은 그가 팔을 노린다고 속삭였고, 어깨는 가슴팍을 노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수의 발끝과 골반은 마지막 공격이 분명 하체를 향할 것이라 확언했다.
배우고 익힌 모든 것들이 각자 다른 정보를 전하는 와중, 젊은 기사는 차라리 눈을 감기로 마음먹었다.
어둠 속에서 마족들을 베던 감을 믿길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호흡에서 승부가 결정되었다.
“…제가 졌습니다.”
참담한 표정으로 컴벨 교수가 손을 들어올렸다.
승리는 기사 브리안의 몫이었다.
그의 검은 컴벨 교수의 명치에 닿아 있었고, 컴벨 교수의 검은 브리안의 허벅지를 얕게 베었을 뿐이었다.
“쯧, 들어오게.”
수석교수는 혀를 차며 컴벨 교수를 불러들였다.
“할 만큼은 했으니 욕할 수도 없겠군. 그건 운이 없어서 진 걸세. 저 기사 놈, 자네 공격을 결국 못 읽었어. 재수 좋게 걸린 거지.”
“동의합니다. 교수. 하지만 운을 빼놓고 어떻게 승부를 논합니까?”
“그 주둥이 닥치게, 페이언. 다음 순서에 내가 나서서 자네 기사를 반병신으로 만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실베르 나이트의 단장은 에밀 파노이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입을 다물었다.
“다음은 자네가 나가도록. 오스왈드 교관.”
대련을 구경하던 필립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싸우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이긴 다음에 싸우고 싶었는데.’
“알겠습니다. 교수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몸을 풀며 대련을 준비했다.
지난 2주간 준비는 충분히 했다. 그게 통할지 아닐지는 직접 검을 맞대어야 알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