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8화 (18/119)

018화

* * *

놀랍게도 긴장 같은 건 전혀 되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필립은 구종이 직구뿐인 야구판에서 혼자 모든 변화구를 던질 줄 아는 투수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지.’

그는 자신이 실베르 나이트 기사에게 패배할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그건 오직 자신을 철저히 숨겼을 때의 경우였다.

오직 이 세상에 통용되는 상식 안에서 싸웠을 경우의 이야기.

상식을 벗어나길 결심한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에밀 파노이와 페이언 블러셋 이외의 모든 인물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

“….”

필립은 흉갑만 착용한 채 건너편의 요슈아 프랄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구를 차는 순간에도 차분한 시선으로 필립을 관찰하고 있었다.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봐선 자기암시의 말이라도 중얼거리는 듯했다.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과거에 맞서려는 사람을 단지 본인의 사정 때문에 기만할 수 있을까.

‘사실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아니, 그건 아니지.’

잠깐 나쁜 마음을 먹었던 필립은 자신을 나무랐다.

어차피 언젠가는 자신을 드러내야만 했다.

그게 바로 지금, 하필 저 청년의 앞이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흉갑과 건틀릿, 그리고 부츠를 착용한 필립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요슈아 프랄린 또한 굳은 표정으로 필립의 앞에 섰다.

“…내가 이길 거다. 필립 오스왈드. 나는 북부 전선, 그 끔찍한 지옥에서 2년을 버텼다.”

“그건 대단한 일입니다. 요슈아 프랄린.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존중합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당신에게 져 줄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죠.”

필립의 말에 요슈아는 미간을 좁히며 이를 갈았다.

“져 준다고? 아직도 내가 우습나?”

분위기가 과열되자 페이언 블러셋이 요슈아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며 제지했다.

“잡담은 그만두고 성실히 대련에 임하도록.”

필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말했잖습니까. 당신이 우스웠다면 그냥 져 줬을 거라고. 하지만 미안하게도 정말로 최선을 다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네리아를 뽑으며 말했다.

시작 신호는 필요하지 않았다.

요슈아 프랄린이 번개처럼 검을 뽑으며 필립에게 달려든 탓이었다.

최대치로 끌어올린 요슈아의 검기가 마치 맹수의 발톱처럼 필립에게 날아들었다.

“흡!”

폐 속의 공기를 단숨에 뱉으며 필립은 오러를 끌어올려,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회전시켰다.

뒤이어 발생한 오러의 충돌에서 요슈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이게, 왜, 이렇게 되는…?’

필립의 회전검은 요슈아의 검기를 단숨에 박살 내고 그의 검을 할퀴었다. 마치 열 명이 넘는 검사의 일격을 한 번에 받아내는 기분이었다.

‘아니, 시발.’

경련이 일어날 만큼 꽉 쥐고 있던 검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곧 요슈아의 토막난 검 파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을 뒹굴었다.

“…?”

“뭘 한 거지?”

대련을 관전하던 검사들 중 필립이 뭘 한 건지 알아차린 사람은 몇 없었다.

예민한 기감의 소유자인 두 오러 마스터와 필립에게서 회전검을 배운 펠리시아, 그리고 디아나뿐.

페이언 블러셋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에밀 수석교수를 바라보았다.

‘오러가 저런 속도로 회전한다고? 저 괴물 같은 늙은이가…?’

그는 당연히 에밀 파노이의 작품이리라 생각했으나, 그 짐작은 곧 거두어졌다.

수석교수의 표정도 그의 표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저 표정이 연기가 아니라면, 저 오러를 회전시키는 운용법은 필립 오스왈드라는 교관이 직접 개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저런 게 가능했다고?’

오러 마스터라는 경지에 이른 그에겐 어쩌면 잔재주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제아무리 저런 걸 한다고 해도 검강은 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페이언 블러셋은 느끼고 있었다.

저 기술이 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필립은 별다른 행동 없이 그대로 선 채 생각했다.

‘이 땅의 검술은 기형적으로 발달했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의 몸이 할 수 있는 일보다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오러가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은데, 이곳의 검사들은 어째서 오러가 아닌 검술을 연구하는가.

지금껏 겪은 바로는 이들에게 오러란 검술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종의 현상에 불과했다.

‘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에너지에 대해 왜들 이렇게 무지한 건가.’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요슈아 프랄린.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십시오.”

“….”

요슈아는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곧 깨달았다.

“그래… 내가, 졌군.”

졌다기보다도 치워졌다고 말하는 게 맞을 터였다.

너무나도 일방적이고 간결한 패배였기에 화조차 나지 않았다.

‘난 지금껏 뭘 한 거지?’

그는 필립이라는 벽을 뛰어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건 벽 같은 게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나 다름없었다.

“계속 그러고 계실 겁니까? 아니면 돌아가서 절 이길 방법을 연구할 겁니까?”

필립이 그를 다그쳤다. 요슈아 프랄린은 힘없이 웃었다.

“…모르겠군.”

그가 물러나자 필립은 페이언 블러셋을 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몸풀기도 되지 않은 대련이라서요. 괜찮다면 나머지 두 분도 제가 상대하고 싶습니다만. 곤란하십니까?”

“허, 곤란하냐고? 당연한 걸 묻는군.”

페이언 블러셋은 헛웃음을 뱉었다. 예의 없는 말이었으나 그는 필립이 오히려 겸손하다고 생각했다.

“요슈아 녀석은 신참 중에선 가장 강했지. 몇 년 위 선배라는 놈들도 당해내질 못했어. 녀석이 그렇게 졌으면 다른 대련은 할 필요도 없어. 자네가 이긴 셈 치세.”

이기겠다고 대장급을 내보냈다가 만약 패배하기라도 하면 그만한 개망신이 없었다. 필립이 어느 정도 분전하기만 해도 실베르 나이트의 손해였다.

더는 대련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펠리시아 오스왈드의 경우 아카데미 교수라는 직함이 있었으니 상관없었으나 필립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늙은 기사는 판단을 마치고 항복을 선언했다.

“대련은 실베르 나이트의 패배로 하지. 그리고 이걸 받게. 내가 이걸 실베르 기사단이 아닌 다른 이에게 내밀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페이언 블러셋은 기사 정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 물건을 본 에밀 수석교수가 침음성을 내며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늙은이가 아주 안달이 나셨군. 젊은 놈 기술이 그렇게 탐나나?”

필립은 손을 내밀어 페이언이 내민 물건을 받았다.

작고, 얇은 그것은 검의 모양을 한 배지였다. 필립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도 열 번이 넘게 얻었던 아이템이였다.

이 배지의 이름은 ‘날카로운 초대장’. 이걸 가지고 ‘검신전’이라는 단체의 총본산을 찾아가면 몇 가지 시험을 치른 뒤 그곳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자네 같은 천재라면 자격이 충분하겠지. 나, 실베르 나이트의 단장인 페이언 블러셋은 명예로운 검신전의 백좌 중 한 명으로서 자네를 검신전으로 초대하겠네.”

그 말에 놀란 건 필립이 아니라 실베르 나이트의 기사들과 아카데미 측 교직원들이었다.

검신전, 검으로 신위에 이르고자 했던 최초의 오러 마스터 솔베인이 만든 단체.

창설 의도는 그의 제자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친목을 도모하려던 것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들이 소속된 집단이 되었다.

그곳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어떤 국가에서든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검신전의 일원이 소속된 가문은 왕족마저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니 그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검신전?’

필립은 잠시 당황했다. 이런 제안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필립은 그 배지를 페이언 블러셋에게 다시 내밀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싫습니다. 어차피 저와 친해지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그러시면 차라리 실베르 나이트가 보유한 아티팩트 중 ‘용의 뿔피리’를 제게 주십시오. 저는 그 대가로 제가 방금 보여드렸던 기술, ‘회전검’의 사용법을 기록한 문서를 넘기겠습니다.”

필립의 역제안에 페이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검신전의 일원이 되는 건 젊은 검사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일진대, 그걸 거부하고 ‘용의 뿔피리’와 같은 고작 아티팩트에 불과한 물건과 그 기술을 바꾸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대답했다.

“제가 싫은 걸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안 되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돌아가는 대로 ‘용의 뿔피리’를 바로 보내 주지.”

“감사합니다.”

페이언 블러셋은 만족스러운 거래를 마친 뒤 기사단을 이끌고 돌아갔다.

“…자네들은 잠깐 나 좀 보지.”

필립과 펠리시아, 디아나는 수석교수의 연구실로 끌려가야만 했다.

* * *

수석교수의 연구실이었다.

필립과 펠리시아, 디아나는 소파에 앉은 채 수석교수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본 수석교수는 자네들에게 매우 실망했다.”

에밀 파노이 수석교수는 단단히 삐진 중대장처럼 굴었다. 필립은 그의 반응이 의아했다.

‘…왜 저러지?’

“왜 아무도 내게 비장의 기술을 익혔으니 승리는 따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알려주지 않았지? 나는 2주 동안이나 페이언 그 빌어먹을 종자에게 질 거란 생각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단 말이다.”

그는 회전검 그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서운함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억지로 대련에 내보냈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말들 해 봐.”

그 말에 대답한 건 펠리시아였다. 그녀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수석교수를 째려보았다.

“진 것도 아니고 이겼는데 왜 그러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필립한테 그냥 항복하라고 할 걸 그랬네요. 그리고, 어차피 질 것 같았으면 저희는 왜 내보내셨어요?”

손녀뻘인 펠리시아의 반항에 수석교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필립 오스왈드.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그의 태세전환에 바보가 된 건 펠리시아였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이익!”

필립은 수석교수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 또한 펠리시아를 놀리는 맛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다시는 제게 이런 걸 시키지 마십시오. 학생들을 지도하고 보호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으나 만일 제가 다시 아카데미를 대표해 싸우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저는 최대한 추하고 비굴하게 패배하겠습니다.”

“…교관?”

옆에 서 있던 디아나 프렌할이 깜짝 놀라 필립을 불렀다.

다행히도 수석교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 필립을 재촉했다.

“그래서, 다음은?”

필립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2주 동안 고생했으니 휴가 좀 주십시오.”

수석교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 댔다.

“마지막으로, 저희끼리 술이나 마시게 돈 좀 주십시오.”

수석교수는 곧바로 작은 주머니를 필립에게 던졌다. 필립은 그것을 받아 열어 보았다. 누런 금화 몇 개와 꽤 많은 은화가 든 채였다.

“그 안에 든 것 다 써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게. 휴가는 계획서를 써서 보고하도록.”

그 반응을 본 필립은 확신했다.

이제 수석교수가 자신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먼저 연구실을 나섰다.

“어… 필립?”

펠리시아는 잠깐 수석교수의 눈치를 살피더니 디아나의 손을 붙들고 필립을 따라갔다.

젊은이들이 떠나간 연구실에서 에밀 수석교수는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피우는 건 몇 년 만이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건가.’

그는 자신의 수가 필립에게 모두 읽히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참이었다.

“그래… 성질머리를 건들지 말라 이거지. 확 무는 수가 있다고.”

필립을 교류 대련에 내보낸 건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제아무리 필립이 천재라도 실베르 나이트는 최북단의 전선에서 활약하는 기사단.

단지 그가 가진 재능의 편린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필립은 실베르 나이트의 기사를 그야말로 초살해 버리며 그의 예상을 뒤엎었다.

그리고 이어진 행동에서 에밀 파노이는 필립이 정치적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검신전의 초대를 거절한 것.

회전검으로 실베르 나이트와 거래한 것.

그리고 자신에게 휴가와 회식비를 달라고 한 것.

‘…얌전히 애들이나 가르치고 싶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거지. 돈과 휴가를 받아간 건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다는 신호겠고. 저 나이에 저렇게 할 줄 아는 놈이 없는데.’

저런 건 아군이 아닌 사람을 오래, 많이 만나본 이들이나 가질 법한 능력이었다. 수석교수는 필립을 한동안 건드리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잘못 건드렸다간 꽤 세게 물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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