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아카데미 속 엑스트라 (6)
백삼영과 끝없이 검을 맞대던 마빈은 문득 이상한 경험을 했다.
마치, 부감하는 듯한 시야를.
이곳에 있는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듯한 전지적인 시점을 경험한 것이다.
‘방금 뭐지?’
마빈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너무 찰나의 순간 사라져 방금 느낀 감각이 진짜인지 착각인지 헷갈린 것이다.
‘착각이겠지.’
거듭된 대련으로 감정이 고양돼 뇌가 혼란을 일으킨 것이리라. 결론을 내린 마빈은 재차 검을 들고 백삼영과 싸웠다.
그리고.
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아.”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량이 마빈에게 쏟아졌다.
마빈의 눈이 풀렸다. 술을 몇 통 마신 것 같은 흥분감이 몸을 지배했다.
장담하건대 이런 경험은 여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눈이 풀린 마빈을 향해 백삼영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제정신이 아니든 맞든 그건 백삼영이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마빈은 고양된 기분을 유지한 채로 백삼영의 검 끝을 바라봤다.
쾌(快)의 묘리가 담겨 있는 백삼영의 검. 쾌의 핵심은 점과 점 사이에 이어진 최단 루트를 사용하는 것.
그렇기에 빠르지만, 그렇기에 움직임이 예상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챙! 백삼영의 검을 가볍게 쳐 낸 마빈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원래 내가 이렇게 호문쿨루스의 검을 쉽게 파악했었나?
원래 저렇게 상대의 움직임이 뻔했던가?
수십 가지의 검의 묘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탓에 머리가 터질 것 같지 않았던가?
분명 그랬는데, 대체 왜 이렇게 어설퍼 보이는 거지?
왜 이렇게 빈틈이 잘 보이는 거지.
콰아앙!
마빈이 쾌(快)의 묘리로 접근해 강(强)의 묘리로 후려치자, 호문쿨루스가 검을 놓치고 바닥을 굴렀다.
스스로도 결과가 믿기지 않았는지 마빈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
백한영이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마빈을 비롯한 아일라, 슈진이 백한영을 바라봤다.
백한영이 말했다.
“용사가 결정됐다. 모두 큰 박수로 맞이해 주도록.”
“네?”
“여기 성검이다. 앞으로 내가 가르쳐 준 검법 열심히 익혀라. 나중에 시간 나면 애프터서비스로 한 번 더 들를 텐데, 그때 수준 이하로 성장 했으면 가만 안 둔다.”
“어. 네.”
얼떨결에 성검을 받아 든 마빈인 주변을 둘러봤다.
너희 이래도 괜찮은 것 맞아? 이렇게 내가 용사로 결정된다고?
당연히 괜찮을 리 없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슈진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희는 아직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요?”
“그렇지?”
“벌써 용사가 결정 났다고요?”
“내가 말했잖아, 우리 시간 없다고. 빠르게 빠르게 진행해야지.”
사실 백한영은 진작 누구를 용사로 뽑을지 마음속에서 정해 둔 상태였다.
‘정안(正眼)의 소유자만큼 알아서 잘 성장하는 애도 드물지.’
정안이 모든 재능 중 제일이다, 이런 얘기가 아니다.
확실히 정안은 사기 능력이다. 모든 상황에서 옳은 길을 보게 해 주는 재능이라니. 그게 사기 능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정안이 그래서 모든 재능을 압살할 정도냐고 묻는다면, 살짝 애매했다.
그런데 왜 마빈이 정안을 각성하자마자 바로 용사로 선택했냐고?
그야, 정안을 각성한 이상 이제 관심을 꺼도 되니까.
‘정안이 최고의 스승이자 이정표인데, 굳이 다른 사람이 끼어들 필요는 없지.’
뭐 스승이 백한영이면 얘기가 살짝 다르지만, 그래 봤자 극적으로 다르진 않았다.
무슨 말이냐.
마빈은 이대로 방치하고 지구로 돌아가도 백한영이 가르치는 것 같은 효과를 받으며 성장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백한영은 마빈을 용사로 뽑은 것이었지만.
그건 백한영의 사정이고, 슈진의 입장에선 순순히 넘어갈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저 녀석에게 제가 밀린다는 게 납득이 안 됩니다.”
백한영이 볼을 긁적였다.
‘역시 반발이 큰가.’
마음속으로 마빈에게 성검을 주기로 했다지만, 그렇다고 아일라와 슈진을 심심해서 데려온 건 아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게 보험이 사라져서 대비책을 만드는 거였나?
그렇게 치면 아일라와 슈진은 대비책의 대비책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라는 거다.
그런 만큼 이 둘도 원하는 만큼 성장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내가 가르친 애들이 어디서 맞고 다니는 걸 못 참기도 하고.
백한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너네는 내가 더 가르치긴 할 거야. 한 달 정도? 그 안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열심히 해 봐.”
“알겠습니다.”
완벽히 납득은 안 됐지만, 그래도 슈진은 일단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백한영이 아일라를 바라봤다.
“너는 할 말 없니?”
“없어.”
“그래.”
* * *
몇 주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슈진은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슈진은 자신이 있었다. 마빈에게 나름 재능이 있는 것 같았지만, 며칠간 지켜본 결과 압도적이지 않았고, 스스로와 비교해도 별로 차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지만.
“너는 저 수준의 호문쿨루스로는 안 되겠다.”
“그런가요?”
“바르세알, 적당한 것 없어?”
“죄송합니다. 저 이상은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이러면 내가 직접 상대해야겠네. 어휴.”
마빈이 호문쿨루스를 압살해 버린 탓이었다.
호문쿨루스로는 수련이 안 되는 탓에 백한영까지 직접 나서는 걸 보며 슈진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아직 쓰러트리지도 못한 호문쿨루스를 압살하다니. 정말 나와 마빈의 재능 차이가 그 정도였단 말인가?
사실 마빈이 호문쿨루스를 압살할 수 있었던 건 정안(正眼) 싸움이라는 게 원래 하나가 하나를 완벽히 잡아먹는 구도라 그런 것이었지만, 그런 걸 잘 모르는 슈진의 입장에선 재능의 차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재능의 차이가 있는 것도 맞긴 했다.
슈진의 재능도 나름 괜찮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안과 비교하는 건 좀.
아무튼 마빈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안 다음 슈진은 이를 악물고 수련을 했다. 덕분에 성과가 있긴 했지만.
“이야, 벌써 검기(劍氣)를 쓰네?”
“빠른 건가요?”
“그치? 원래 마법을 쓰면서 기운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거긴 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빠른 편이야.”
그것보다 마빈의 성과가 더욱 눈부셨다.
이제 막 검을 잡은 주제에 벌써 마나 블레이드, 검기를 사용하는 마빈.
슈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역시 마빈이 용사가 되는 게 맞나?’
거기까지 생각한 슈진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 뭐지.
설마 이 내가, 패배를 인정했다고?
승리자는 영원히 승리자다.
한번 패배를 인정하면 영원히 패배자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었다.
슈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인정할 수 없어.
슈진은 검을 들고 백이영과 마주 봤다.
지난 몇 주 동안 슈진은 백이영과 대련을 거듭하며 꾸준히 성장했다.
처음엔 이상한 기교를 부리는 백이영에게 당황했지만, 지금은 익숙해진 걸 넘어 파악을 전부 끝낸 상태였다.
‘저 녀석, 성장하지 않아.’
호문쿨루스는 인공 생명체. 때문에 일반적인 생명체가 당연히 누리는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다.
기교는 늘어난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강검(强劍)만 사용하던 녀석이 환검(幻劍)을 사용하는 식으로.
하지만 딱 거기까지.
호문쿨루스는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의 경지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다.
그 증거로 녀석은 저렇게 압도적인 재능을 가졌음에도 슈진이 조금씩 다음 경지로 나아가고 있을 때, 제자리에 머물며 여러 잡기술만 잔뜩 늘리고 있었다.
그런 상대를 쓰러트리는 법은 간단했다.
‘다음 경지로 넘어간다.’
슈진의 정신이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내면에 있는 거대한 성문 앞에 선 슈진은 천천히 문에 손을 올렸다.
이건 슈진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핏줄에 대한 자부심이 형상화된 것이었다.
자신이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긍지.
공작가의 일원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 슈진의 삶이었고, 그의 검 또한 그랬다.
슈진의 검을 오러가 가득 채웠다.
마나 블레이드, 오러 블레이드를 넘어선 오러 웨폰. 강기검(罡氣劍)이었다.
오러 마스터, 화경(化境)의 초입에 올라선 슈진이 백이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충격파가 터지며 백이영이 나가떨어졌다.
그걸 본 백한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쟤도 상당히 빠르네.”
가진 바 재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내면에 품은 열망이 커다란 케이스였다.
이래서 재능이라는 건 한 가지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다니까.
어떻게 보면 정안을 가진 마빈보다 슈진이 승천경에 오를 가능성이 높을지도 몰랐다.
둘 중 한 명만 제자로 삼을 수 있다면 마빈을 고르긴 하겠지만, 그만큼 승천경에 오르기 위해선 재능 외에도 다른 요소가 중요히 작용했다.
‘심상을 다루는 단계에 입문만 해도 그 밑의 경지는 손도 못 쓰고 당하는 게 일반적인… 어라?’
생각하다 말고 백한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이상했다.
바닥에 나가떨어진 백이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이영의 검은 이미 산산이 조각난 지 오래였다.
당연했다. 고작 강기(罡氣)만을 두른 검으로 강기 다발로 이루어진 강기검(罡氣劍)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백이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의 손은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검을 놓치지 않겠다고 발악한 결과 손아귀가 찢어진 것이다.
피가 흐르는 두 손을 한참을 내려다보던 백이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우웅―!
백이영의 손 위에 무언가 생겨났다.
그것은 화경에 이른 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였다.
그것은 의념과 심상을 재료로 만들어진 무기였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심상을 제어하는 데 성공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심상병기(心像兵器), □□□.
심상병기를 굳세게 잡은 백이영의 몸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졌다.
“뭐?”
고양감에 잠겨 있던 슈진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급히 검을 들었다.
저 녀석 뭐야. 이게 무슨―.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잠시 후.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사라지고 그 안에서 백한영이 나타났다.
심상병기를 가볍게 막아 낸 백한영이 이내 입을 열었다.
“바르세알아.”
“부르셨습니까.”
“호문쿨루스는 성장 못 하는 것 아니었냐?”
“…그렇습니다.”
“그럼 저건 뭔데.”
백한영은 현재 어이가 없는 상태였다.
‘호문쿨루스인가 뭔가는 성장하지 못한다며.’
호문쿨루스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인공적으로 영혼을 완벽히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둘째, 때문에 심상 또한 불안전할 수밖에 없다.
높은 경지로 가기 위해선 심상의 진화가 필수 불가결이었다. 심상이 없는 호문쿨루스에겐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다.
인공적으로 제작된 영혼과 거기에 입혀진 반쪽짜리 심상으로 평생 살아야 되는 것이다.
그게 상식이었다.
상식이었는데.
지금 그 상식이 깨졌다.
바르세알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원인을 알 것 같습니다.”
“뭔데.”
“백한영 님의 재능을 이식한 것이 특수한 작용을 했다고 판단됩니다.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그래?”
흐음.
백한영이 백이영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거 잘하면 자동 사냥 인간 양산되는 것 아니야?’
지금도 승천자를 양산 중이긴 하지만, 잘하면 진짜 공장에서 찍어 내듯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꿈에 부푼 백한영이 바르세알에게 명령했다.
“자세한 원인을 조사해. 당장.”
“알겠습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백한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르세알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재현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