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귀환했다-8화 (8/117)

아르바이트(2)

아침 일찍 일어난 백한영은 백은하와 함께 검은색 밴에 올라탔다.

“은하야 왔어?”

“네. 매니저 오빠.”

“근데 어···. 그분은?”

“제 친오빠예요.”

“친오빠?”

어리둥절해하는 매니저에게 백한영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은하야 이게 무슨 일이야?”

“대표님이 말 안 해주셨어요? 오늘 오빠랑 같이 촬영하러 간다고 말했는데.”

“그 인간은 진짜.”

한숨을 푹 쉰 매니저가 이내 백한영에게 말했다.

“일단 앉으세요. 바로 출발할게요.”

매니저의 말에 백한영은 백은하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검은색 밴이 출발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운전을 하던 매니저가 백미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백한영 씨 맞으시죠? 평소에 은하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대체 어떤 얘기를 들으신 거죠?”

“은하가 평소에 자기 오빠 얘기를 그렇게 했는데, 가장 많이 하는 소리가.”

“와아아아아―!”

백은하가 다급히 매니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말했다.

“매니저 오빠. 진짜 없는 말 지어내지 마.”

“내가 언제 없는 말 했다고 그래. 근데 확실히 백한영 씨가 네 오빠긴 하다. 인물이 다른데?”

“그죠?”

“칭찬은 내가 들었는데 왜 네가 좋아하는 거니 은하야.”

백한영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지만 백은하는 들리지 않는 척하며 매니저와 대화를 나눴다.

“내가 괜히 감독님한테 추천한 게 아니라니까요. 작가님도 사진 보고 바로 오케이 했다고요.”

“저번에 갑자기 사진을 왜 찍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된 백한영이 작게 중얼거리자 매니저가 말했다.

“백한영 씨 정도면 연예인 해도 되겠는데? 네 오빠라는 걸로 화제성 충분하지, 비주얼 되지.”

“오빠도 각성자라서요. 아마 안 할 거예요.”

“진짜 너네 집 유전자에 뭐 있나 보다.”

둘 다 각성자임과 동시에 연예인 비주얼이라는 것에 감탄한 매니저가 이내 빠르게 차를 이동시켰다.

현장에 늦지 않기 위해선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

백은하가 주연으로 들어간 <여름에 피는 꽃>은 VBS에서 편성된 수목 드라마로, 유명 작가인 권혜진 작가가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만큼 기대를 잔뜩 받는 작품이었다.

“하아.”

하지만 <여름에 피는 꽃>의 감독을 맡은 이상준의 입에선 한숨만 계속 나오고 있었다.

“접고 싶다.”

“감독님 무슨 일이에요. 작가님이 또 한 소리 하셨어요?”

“차라리 한 소리 하면 낫지. 이제 곧 크랭크인 하는데 아직도 대본이 마음에 안 든다니까 정신이 나갈 거 같아.”

“워낙 그런 쪽으로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조감독의 말에 이상준 감독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가, 흡연자의 인권이 바닥을 치는 사회라는 걸 상기하곤 그대로 반으로 쪼개버렸다.

“알지. 아는데,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더 심한 경우도 알려드릴까요? 아예 재촬영을 요구한 적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방영일에 맞출 수 있어?”

“전문가니까 아시잖아요. 사람 갈아 넣으면 불가능한 건 아닌 거.”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더니. 진짜 개판으로 돌아가는구나.

이상준은 생각했다. 얼른 커리어를 쌓아서 영화판으로 날라야겠다고.

“감독님!”

이상준 감독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바라봤다.

이상준 감독을 부른 건 연출팀의 막내였는데,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뛰어오느라 숨이 찼는지 헥헥대던 연출팀 막내가 자신의 손에 든 종이 뭉치를 흔들며 말했다.

“1화 대본 나왔어요.”

“나왔다고? 그래도 시간에 맞춰주긴 하는구나. ···그래서 이걸 이제 배우들한테 뭐라고 말하면서 줘야 될까.”

촬영까지 1시간도 안 남은 시점에서 바뀐 대본을 주는 걸 좋아하는 배우는 없었다.

극단적인 경우 그런 식으로는 일 못 하겠다고 촬영을 거부하는 배우마저 있었다.

물론 그건 진짜 극단적인 경우고 보통은 그냥 싫어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것만으로 이상준 감독이 배우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이유론 충분했다.

도대체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하나 머리가 아파와 이상준 감독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을 때, 연출팀 막내가 말했다.

“굳이 양해를 안 구해도 괜찮을 거 같던데요?”

“괜찮다고?”

“네. 읽어보니까 내용이 많이 바뀌긴 했는데, 기존 배우들이 고생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게 돼?”

내용이 바뀌었는데 정작 기존 배우들은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게 말인지 막걸리인지 알 수 없어 이상준 감독은 대본을 받아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내렸다.

대본을 끝까지 읽은 이상준 감독이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네 말이 맞긴 한데, 이거 뭐냐?”

“대본이잖아요.”

“그걸 내가 몰라서 묻겠냐? 대체 이 여주인공의 오빠가 뭐길래 이렇게 갑자기 분량이 확 늘었냐는 거잖아.”

“그 배역은 원래도 분량이 꽤 있는 단역 아니었어요?”

“그래 봤자 단역치고 많은 거였지, 이젠 거의 조연급 분량이잖아.”

심지어 조연 수준을 넘어 1화 신스틸러를 담당하는 배역으로 바뀌어 버린 여주인공의 오빠를 보며 이상준 감독은 위가 쓰린 느낌이 들었다.

바뀐 대본을 확인한 배우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 지 눈에 선했다.

배우들은 하나 같이 욕심이 많았다.

그 욕심엔 연기에 대한 욕심도 있었고, 분량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분량은 대중의 관심을 뜻하는 말인 만큼, 이렇게 갑자기 대놓고 밀어주는 배역이 생겨난 걸 환영하지 않을 게 분명한 것이다.

물론 이상준이 지금 위가 쓰린 건 배우들의 신경전 때문은 아니었다.

촬영에 지장이 생긴다면 감독이 나서서 사과해야 할 일이었지만, 내용에 관한 부분이라면 그건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감독의 고유권한이었으니까.

그러한 이유로 이상준 감독은 분량에 가위질을 당해 불만을 토해낼 배우들이 약간은 걱정이긴 했지만, 엄청 신경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현재 이상준 감독에게 중요한 건 다른 거였다.

“바뀐 대본 좋네. 잘 빠졌어. 근데 이걸 누가 하는데. 이거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난 뽑은 기억이 없는데?”

“그 누구였지? 백은하 씨 친오빠로 정해진 거 아니었어요?”

“단역이랑 조연이랑 같냐. 은하 오빠면 그 있잖아. 이번에 깨어난 그분일 텐데 연기를 잘하겠냐고.”

“···그럼 저희 어쩌죠?”

연출팀 막내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준 감독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말했다.

“일단 진행시켜.”

“이대로요?”

“정 안 되면 기존의 대본으로 찍으면 되지. 감독이 그리하겠다는데 작가가 뭐 어쩔 거야.”

그랬다가는 작가 측에서 재촬영 안 하면 하차하겠다고 난리 칠 수도 있는데요, 라는 말을 집어삼킨 조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이번 촬영을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면서 말이다.

*

검은 밴에서 내린 백한영은 촬영 현장을 살펴봤다.

모두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걸 확인한 백한영은 백은하를 따라 촬영 현장의 책임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감독님!”

“어 은하야. 왔구나.”

“네 지금 왔어요. 오빠. 이상준 감독님이셔. 인사해.”

백은하의 말에 백한영은 바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백한영이라고 합니다.”

“은하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백은하 씨 오빠 역할로 출연하기로 했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여기 백한영 씨 대본 있으니 확인해 보세요. 조금 바뀌었거든요.”

“아. 네.”

이상준 감독의 말에 백한영은 별생각 없이 대본을 받아 펼쳤다.

이미 어제 대본을 숙지하고 온 상태였기도 했고, 단역이 바뀌어봤자 얼마나 바뀌겠냐는 생각이었는데.

“······.”

“오빠 왜?”

“나 단역 맞지?”

“살짝 분량이 많긴 한데, 단역이지?”

백은하의 말에 백한영이 재차 대본을 읽었지만, 대본엔 아무리 봐도 단역이라고 할 수 없는 분량의 배역이 있을 뿐이었다.

“저, 감독님?”

“네. 백한영 씨. 무슨 일이죠?”

“그, 제 분량이 원래 이랬나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원래 드라마 대본이라는 게 휙휙 바뀌고 하는 겁니다. 대본 숙지할 시간 드릴 테니 세팅 받으면서 준비하시죠.”

“뭐 때문에 그래 오빠.”

오빠가 대체 왜 저러나 궁금해 백은하가 그렇게 물었지만, 백한영은 설명하는 대신 동생에게 대본을 넘겼다.

백한영이 말했다.

“의상이나 분장 같은 건 어디로 가면 되나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옆에 있던 조감독을를 따라 백한영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촬영장 구석에 있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간 백한영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백은하 씨 오빠 역할을 맡으신 분인데, 잘 좀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배우분 여기에 앉아주세요.”

조감독의 말에 스타일리스트가 빠르게 대답하더니 백한영을 빈 의자에 앉혔다.

살다 살다 이런 일도 겪어보는구나 싶어 신기한 표정을 짓던 백한영은 이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걸로 대화가 끝났다.

백한영이 사람과 대화를 하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닌 것에 더해 여자가 소심한 성격이기까지 했으니 대화가 이어질 리 없는 것이다.

“오빠! 오빠 분량 엄청 늘어났어!”

그새 대본을 다 본 건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온 백은하가 방방 뛰었다.

분량이 는 건 백한영인데 왜 백은하가 좋아하는 걸까.

그건 백한영 본인도 몰랐다.

“근데 이러면 오빠가 잘해야 되는데 잘할 수···아 유림 언니도 있었네. 언니 안녕하세요?”

“안녕.”

“유림 언니 이 사람이 저번에 말했던 제 친오빠예요. 이름은 백한영.”

“···백한영 씨 안녕하세요.”

졸지에 인사를 한 번 더 하게 된 백한영이 뻘쭘하게 고개를 숙였다.

“머리 움직이지 마세요!”

“아. 죄송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정신없던 헤어 밑 의상 세팅이 끝났다.

백한영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체크했다.

“뭔가 이상해?”

“이상하긴 하네.”

“원래 촬영 복장이 다 그래. 안 익숙해서 기분이 이상하다니까?”

“그러게.”

물론 백한영의 기분이 이상한 건 안 익숙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너무나 익숙한 복장에 묘한 향수를 느끼는 중이었던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놓고 향수를 느끼다니. 내가 거기서 오래 있긴 했나 보네.’

백한영이 말했다.

“근데 그, 한유림 씨? 유명해?”

“유명해. 사실 우리 드라마에 서브 여주로 나온 게 이해 안 될 정도로.”

“그래?”

백한영은 조금 전 한유림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뭔가 소심한 느낌이던데. 신기하네.”

“뭐가?”

“배우는 다 활발할 줄 알았어.”

“오히려 배우 중에 소심한 사람이 더 많아. 연기는 가면을 쓰는 일이라 실제 성격은 상관없거든.”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된 백한영은 거울 앞에서 벗어나 촬영 현장으로 돌아갔다.

백한영이 돌아오자마자 조감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대본은 다 외우셨어요?”

“일단 다 외우긴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촬영하면서 확인하죠.”

백한영과 대화를 마친 조감독이 메가폰을 들고 촬영장 전체에 들리게 말했다.

“숏 들어갈게요! 모두 준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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