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귀환했다-7화 (7/117)

아르바이트(1)

침묵이 내려앉은 각성자 협회 회의실.

한 남자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야?”

남자, 이현진이 자신의 앞에 있는 서류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A급 12마리, B급 37마리, C급 74마리. 이것들을 단번에 전소시켰다고? 이게 말이 돼?”

“뭘 묻고 있어. 거기 적혀 있잖아. 설마 글 읽을 줄 몰라?”

이현진의 말에 대답한 건 살짝 히스테릭한 느낌의 여자였다.

여자의 짜증에도 이현진은 익숙하다는 듯 서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했다.

“이초아. 내가 설마 글을 못 읽어서 물었겠냐? 그만큼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적혀있으니까 한 얘기 아니야.”

“왜 안 돼?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데.”

네가 허접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야? 라는 의미가 담긴 이초아의 말에 이현진은 크게 반응하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그럼 네가 해결하지 그랬어. 저번 S급 게이트 때도 그렇고 이번 다중 게이트 사태 때도 그렇고, 어째 대한민국에 3명 밖에 없다는 S급 각성자님의 활약이 미미한 거 같다?”

“닥쳐.”

이초아의 붉은 머리카락이 천천히 공중으로 부유했다.

이초아의 분노에 마나가 응답한 것이다.

그런 이초아의 행동에 이현진은.

“그래서 백한영 이 친구는 등급이 어떻게 되지?”

태연히 말을 돌렸다.

화가 잔뜩 난 이초아를 상대로 말을 주고받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후우. 이초아가 화를 가라앉혔다. 밖이었다면 푸닥거리를 했겠지만, 실내다 보니 한번 참은 것이다.

“F라고 하던데요?”

“F? 진짜 F등급이라고?”

“네.”

협회 직원의 말에 이현진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백한영 얘가 저번 S급 게이트를 해결한 신비인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런 신입이 연달아 두 번이나 나올 리가 없잖아. 차라리 한 명이라는 쪽이 더 현실성 있지.”

“확실히.”

이초아가 이현진의 말에 공감했다

고위 각성자가 얼마나 희귀한지 누구보다 잘았기 때문인데.

물론 그러한 이현진의 추측에 모두가 찬성하는 건 아니었다.

“아닐 거다.”

“아니라고?”

“그래.”

게이트대책본부 본부장 김산호가 자신이 알아 온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번 S급 게이트를 해결한 사람이 평범한 S급 각성자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하나?”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데?”

“동의하지.”

차례대로 이초아와 이현진이 대답했다.

김산호가 말했다.

“그 정도의 힘을 이제 막 각성한 사람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여기에도 동의하나?”

“그거야 뭐 당연한 소리지.”

각성자는 얼핏 보면 그저 운이 좋은 사람으로만 보일 수 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각성자가 그렇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도 일정 수준 이하의 얘기고.

어떤 분야나 그렇듯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고위 각성자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그걸 깎고 또 깎은 후에 벽을 부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백한영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지 이제 일주일도 안 됐다. 즉 S급 게이트를 해결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지.”

“···그럼 각성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이 정도라고?”

경악스러운 김산호의 말에 이현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탐나네. 얘 특수대책반에 못 데려오나?”

“거길 누가 가고 싶겠어.”

“쯧.”

이초아의 말에 이현진이 작게 혀를 찼다.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흠.”

상석에서 터져 나온 협회장의 헛기침에 순간 분위기가 환기됐다.

모두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는 걸 자각한 것이다.

이현진이 재차 서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백한영 얘 등급을 어떻게 할 건데. S?”

“추정 등급이 S긴 하지만, 일단 A급을 주고 지켜보자는 게 협회의 의견입니다.”

“그냥 S급을 줘도 되지 않아? 안 그래도 요즘 뒤숭숭한데 고위 각성자가 늘어나면 좋잖아.”

“S급은 역시 좀 더 지켜본 다음에 주는 게 좋다는 의견이 많아서요.”

협회 직원의 말에 이현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무슨 등급이냐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현장에서 지원 요청을 자주 하는 이현진에게 중요한 건 백한영의 실제 실력이지 백한영에게 어떤 등급이 붙느냐가 아니었다.

“결정된 거 같군요.”

협회장의 말에 모두가 회의실의 상석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협회장이 이내 나직이 말했다.

“그럼 백한영 씨를 A급으로 승급시키는 걸로 하고 회의를 마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백한영.

A급 승급 확정.

*

“오빠.”

“응.”

“각성했지.”

“···각성자긴 해.”

백한영의 말에 백은하가 소리를 빽 내질렀다.

“각성 안 했다며! 거짓말 아니라며!”

“그렇게 됐어.”

“진짜 오빠는. 하아.”

백은하가 고개를 내려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은행 어플이 떠올라 있는 스마트폰을 조작한 백은하는 자신의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19억 7743만 원.

7743만 원은 백은하가 원래 가지고 있던 돈이었기에 문제가 안 됐지만, 19억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저 19억이 눈앞에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백한영이 입금한 돈인 탓이었다.

계좌번호를 물어보길래 아무 생각 없이 알려줬는데, 그 자리에서 19억을 입금할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은행 어플을 꺼버린 백은하가 백한영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몰래 각성자가 된 건 그렇다 쳐. 근데 19억은 도대체 무슨 수로 번 거야. 대출이라도 받았어?”

“일 잘했다고 포상금으로 주던데?”

“대체 일을 어떻게 잘해야 포상금으로 19억이 나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진짜 포상금을 받은 걸 어떡해.”

백한영은 자신이 포상금을 받은 과정을 떠올렸다.

무협의 ㅁ자도 모르는 김태식을 보며 한탄하던 백한영은 문득 자신의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태식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에만 집중해, 모든 몬스터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걸 뒤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각성자의 수익 대부분이 몬스터의 부산물을 판 돈이라는 걸 생각하면 진짜 어마어마한 실수가 아닐 수 없었는데.

다행히 백한영이 돈을 벌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태의 긴급함을 감안해 정부에서 몬스터의 등급에 맞춰 시세대로 포상금을 줬기 때문이다.

심지어 딱 20억에 맞춰서 포상금을 주기 위해 약간의 보너스까지 줬으니, 이것보다 쿨할 수가 없었다.

이상. 회상 끝.

“잠깐. 최근 큰 사건이라고 해봐야 다중 게이트 사태밖에 없는데, 설마 그거 오빠가 해결한 거야?”

“혼자는 아니고.”

“···내가 그냥 쉬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오빠.”

백한영이 다중 게이트 사태에 관련됐었다는 얘기를 들은 백은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8년 만에 깨어난 오빠가 자꾸 위험한 일을 하려고 드니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그걸 본 백한영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자 이것 봐.”

백한영이 백은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각성자등록증이었다.

백은하가 백한영의 각성자등록증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A?”

“실적이 인정돼서 바로 승급했어. 오빠가 이 정도라니까?”

각성자등록증에 적힌 알파벳을 확인한 백은하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이번에 막 각성한 자신의 오빠가 무려 A등급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것이다.

“은하 너는 등급이 몇이더라?“

“···C인데 실제 실력은 B급이야.“

“왜 내 주변엔 실제 실력이랑 등급이 다른 사람이 많은 거 같냐. 아무튼 오빠가 너보다 2단계 높은 A등급이야.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응···.“

“알았으면 일단 내가 준 돈으로 빚부터 갚아. 그거 자꾸 신경 쓰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좀 안 좋더라.“

백한영의 말에 백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닦아낸 백은하가 어디론가 5억을 보내더니 통화를 시작했다.

“돈 보냈어요. 확인하세요. 네. 맞아요. 그러니까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띡.

말을 쏟아낸 백은하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런 백은하에게 백한영이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서 오빠 진짜 각성자 일 할 거야?”

“하지 마?”

“안 하면 좋겠지만, 오빠는 그럴 생각 없지?”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는 백은하에겐 미안했지만, 백한영은 각성자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백한영에게 각성자 일만큼 잘 맞는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알았어. 대신 조심해야 해.”

“걱정마.”

“근데 이러면 괜히 이것저것 알아봤네.”

“뭐를?”

갑작스러운 말에 백한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백은하가 말했다.

“오빠가 자꾸 돈 벌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내가 이것저것 알아봤지.”

“네가?”

“응. 8년 동안 자고 있던 오빠보다 내가 더 잘 알 테니까.“

“무슨 일을 알아봤는데.”

백한영의 말에 백은하가 손가락을 꼽으며 자신이 알아 온 일을 하나씩 나열했다.

“내가 속해있는 청풍 길드의 일 몇 개랑, 연예인 일 몇 개?”

“연예인 일? 어떤 거.”

“뭐 많지. 매니저 일이라든가, 내가 출연하는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오는 일이라든가.”

“···드라마?”

상상도 못 한 단어에 백한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웬 드라마?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일이 돈이 돼? 안 되지 않아?”

“···돈이야 내가 주면 되잖아.”

“그게 무슨 말이니 은하야.”

“몰라.”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변한 백은하를 보며 백한영이 말했다.

“너 예능도 여러 개 하지 않았어?”

“그치?”

“저번에 보니까 노래도 부르던데. 노래에 예능에 각성자 일까지 하면서 드라마까지 출연해? 너 몸이 무슨 두 개야?”

“안 그래도 이제 줄일 생각이었어. ···것보다 내가 부른 노래는 언제 들은 거야.”

부끄러운 듯 우물거리는 백은하를 보며 백한영이 생각했다.

역시 백은하의 일이 많은 건 자신 탓이 맞았다고.

아직도 백은하에게 갚아야 될 돈이 잔뜩 남았다는 걸 떠올리며 백한영이 말했다.

“내가 드라마에 나가도 되나?”

“왜?”

“연기력이라든가 이것저것 있잖아.”

“뭐 어때. 오빠 얼굴이면 충분히 먹힐 테고, 연기력은 음···. 날 완벽히 속이고 각성자가 된 걸 보면 연기력도 괜찮은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니 은하야.“

백한영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때문에 백한영은 백은하가 아닌 척하지만 자신과 드라마에 같이 출연하고 싶어 한다는 것 또한 알아챌 수 있었다.

드라마라.

백한영은 잠시 고민했다.

빚도 전부 갚았고 여유도 좀 생겼으니.

그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나?

“무슨 배역인데.”

“하게?”

“생각해 보고. 그래서 무슨 배역인데?”

“내 오빠 역할인데, 1화에서 죽을 예정이라 여러 번 촬영할 필요도 없고. 그냥 편하게 하면 돼.”

은하의 오빠 역할이라. 그거면 몰입하긴 쉬울 거 같았다.

“장르는?”

“무협. 할래?”

“···무협?”

백은하의 말에 백한영이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한국에서 무협 드라마라니.

그거 괜찮은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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