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3)
요즘 기세가 좋은 케이블 드라마를 견제하기 위해 VBS에서 기획된 <여름에 피는 꽃>의 스토리는 간단했다.
무림이 실제로 존재하는 평행세계의 대한민국.
그곳에서 무림과 별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던 남자 주인공이 일인전승 문파를 계승하고, 그로 인해 다양한 일을 겪는 내용을 담은 드라마가 바로 <여름에 피는 꽃>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백한영은 팔짱을 끼고 배우들의 연기를 살펴봤다.
현재 촬영 중인 씬은 <여름에 피는 꽃>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과거에 접점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한 장면으로.
당연하지만 과거인만큼 아역 배우들이 연기했다.
“오빠가 말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한대.”
“왜?”
“나도 몰라.”
두 아역 배우의 연기를 보며 백한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하네. 이게 요즘 애들인가.’
아이답지 않은 능숙한 연기에 백한영이 감탄하고 있자, 이상준 감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컷! 바로 다음 씬으로 넘어갑시다!”
이상준 감독의 말에 촬영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백한영 또한 마지막으로 옷차림과 분장을 점검했다.
이번 씬에 드디어 백한영이 등장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백한영이 맡은 배역은 여자 주인공의 친오빠로, 쉽게 말하자면 여자 주인공의 과거 설정에 MSG를 넣어주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백한영은 꾸벅 허리를 숙이는 아역배우에게 인사하고는 자신을 따라온 조감독을 바라봤다.
조감독이 말했다.
“자연스럽게 연기하시면 됩니다.”
“자연스럽게요?”
“백한영 씨는 실제로 여동생이 있잖아요? 그 경험을 살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자연스럽게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입력한 백한영은 아역배우와 함께 세트장에 들어갔다.
마치 한옥의 한 부분만 케이크 칼로 잘라 온 것 같은 느낌의 세트장에 입성한 백한영은 아역배우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니.”
“한채아예요.”
“배역이랑 성씨가 똑같네?”
“히히.”
백한영이 맡은 배역의 이름은 한백호. 그러니 작중 여동생의 성도 한 씨였다.
저러면 몰입하긴 더 좋겠구나, 라고 백한영이 생각할 때쯤.
“씬 7, 숏 들어갈게요!”
조감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는 촬영장 안에서 백한영은 어떻게 연기를 해야 될지 고민했다.
여동생. 여동생이라.
은하를 돌봤던 경험을 살리면 된다 그건가?
“오빠.”
아역배우 한채아, 작중 이름으론 한여름이 백한영에게 말을 걸었다.
백한영은 바로 외웠던 대사를 입에 담았다.
“왜 여름아.”
“나 오늘 이상한 애를 만났다? 막 울 것 같은 표정이라 가서 달래줬어.”
“우리 여름이 마음씨도 곱네?”
“히히.”
저기서 웃는 건 대본엔 없던데.
애드리브 같은 건가.
백한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한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옛날 경험을 살리라던 조감독의 말에 몰입한 탓이었다.
“컷! 아주 좋았어요! 그겁니다!”
이상준 감독이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끝난 건가? 백한영은 세트장을 벗어나 이상준 감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걸로 된 거예요?”
“네. 완벽했습니다. 어디서 연기 교습 같은 거 받아본 적 있으세요?”
“아뇨. 그런 적 없어요.”
방금 연기를 잘한 건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잘 됐다면 누군가의 오빠 역할을 맡는 것이 익숙해서 그런 거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백한영은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을 바라봤다.
은하가 있었다.
“은하야?”
“왜?”
“왜냐니. 볼이 튀어나왔으니까 그러지. 무슨 일이야.”
“안 튀어나왔어.”
누가 봐도 튀어나와 있었다.
방금 백한영의 연기를 보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너무 못했어?”
“그런 거 아니야. 잘하더라. 응.”
“잘했어? 그럼 다행이네. 예전 생각하면서 연기하니까 잘 됐나 봐.”
백한영이 대본을 집어 들었다.
대본엔 포스트잇 플래그로 백한영이 연기해야 되는 씬들이 표시돼 있었는데.
그 분량이, 조금 많았다.
일단 하기로 했으니 외우고 있긴 한데, 진짜 이게 왜 단역인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당장 다음에 촬영할 씬의 대사를 재차 살펴보던 백한영은 문득 떠올랐다는 톤으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네 오빠 역할인데, 정작 너랑 연기하는 씬은 하나도 없네?”
“···오빠가 맡은 배역이 여주인공이 어렸을 때 죽으니까 어쩔 수 없지.”
거기까지는 나도 생각을 못 했어, 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백은하는 백한영을 따라 대본을 들었다.
이제 곧 그녀도 연기를 할 차례였다.
*
백한영은 그 뒤로도 이런저런 씬을 촬영했다.
대부분이 한백호가 여주인공과 얼마나 친한지, 어느 정도의 감정교류가 있는지 알려주기 위한 씬들로.
그렇게 서사를 쌓은 다음 마지막에 죽게 해 감정을 펑 터트리려는 의도인 건데.
그런 중요한 역할을 자신이 해도 되나 계속 의문이 드는 백한영이었다.
거듭된 촬영 끝에 이제 백한영에게 남은 건 하이라이트 씬뿐인 상황에서 이상준 감독이 말했다.
“각성자시라고요?”
“네.”
“실례지만 어떤 종류의 각성자시죠?”
“검을 씁니다.”
“와. 진짜 어떻게 이리 딱 맞을 수 있지? 하늘이 돕나?”
참고로 이상준 감독은 앞의 촬영을 통해 백한영을 굉장히 신뢰하게 됐다.
그의 오빠 연기가 굉장히 마음에 든 것이다.
“그러면 진짜 액션 연기를 직접 하셔도 되겠네요?”
“그게 더 편할 거 같아서요. 괜찮죠?”
“그럼 저희야 환영이죠.”
이상준 감독의 말에 백한영은 <여름에 피는 꽃>의 1화 하이라이트 씬을 떠올렸다.
혈교가 준동하는 상황에서 동생인 한여름을 지키기 위해 홀로 수많은 혈교도와 전투를 하는 한백호.
그 과정에서 남자 주인공을 만난 한백호가 남자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 전투를 하다가 끝내 사망하는 게 바로 1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는데.
백한영에겐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건 백한영에겐 한없이 익숙한 일이었지만, 그 끝에 사망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테니 당연하긴 했다.
‘전투라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지.’
경험적으로도 그렇고, 디테일 적으로도 그렇고, 전투에 관해 백한영을 따라올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백한영이 감독에게 요청을 한 것이다. 액션 씬도 본인이 직접 연기하고 싶다고.
자기가 잘할 수 있는데 굳이 남에게 시킬 이유가 없는 거다.
백한영은 의복과 분장을 새로 세팅한 다음에 지급받은 모조검을 들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 전에 어린 한여름을 안전한 곳에 숨겨놓는 씬을 찍었으니 이제 진짜 마지막이었다.
백한영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남자 주인공, 김신의 아역배우에게 말했다.
“잘 부탁할게.”
“네. 형.”
띠동갑을 훌쩍 넘는 나이 차이에도 형이라고 불러주는 아역배우의 사회성에 감탄한 백한영은 이내 자세를 잡으며 연기할 준비를 했다.
“씬 24. 숏 들어갈게요!”
조감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한영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꼬마야 이름이 뭐라고?”
“···김신이요.”
“그래 신아. 형이 마지막으로 하나 말해 줄 게 있어. 중요한 거니까 새겨들어라.”
잠시 숨을 고른 백한영이 천천히 대사를 뱉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웃어. 결국 남는 건 그거뿐이니까. ···그리고 눈 감고 있어라. 금방 끝낼 테니.”
백한영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백한영은 혈교도 역할을 맡은 단역배우들을 보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비록 연기에 불과했지만, 익숙한 복장을 입고 익숙한 상황에 놓이니 강제로 추억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도 이랬지.
심지어 그때도 백한영의 뒤엔 어린아이가 있었고, 상대하는 적 또한 혈교도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 있지, 라고 생각하며 백한영은.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백한영이 기세를 세웠다.
물론 일반인이 모여 있는 곳에서 진심으로 기세를 세우면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 문외한이 봤을 때 저 녀석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라는 느낌만 들도록 심혈을 기울여서 조절하긴 했다.
그걸 신호라고 느꼈는지 단역배우들이 차례대로 백한영에게 달려들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전에 맞춘 대로 검을 휘두르라고 했는데, 다행히 백한영의 말이 잘 전달됐는지 모든 단역배우가 미리 말한 대로 움직여 줬다.
이러면 연기하기 편하지.
백한영의 검이 움직였다.
백한영의 검과 단역배우의 검이 만나며 화려하게 움직였다.
단역배우가 뭔가 한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두른 게 다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합이 나왔냐?
간단했다.
전부 백한영의 짓이었다.
상대의 검로를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거?
농담이 아니라 백한영의 경지면 그런 건 생각만으로도 가능했다.
두 검이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았다.
두 검에 담긴 검의니 의념이니 심상이니 하는 것들은 싹 다 형편없었지만, 어차피 보여주기 위한 검술. 화려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너무 여유로워 보이면 안 되니 그거까지 신경 써서 백한영이 검을 휘둘렀다.
단역배우들을 하나 둘 씩 쓰러트린 백한영은 이내 최후의 남은 단역배우와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쓰러졌다.
마지막인 만큼 검술도 살짝 신경을 썼건만.
어째서인지 감독의 컷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스팔트 모형에 잠시 누워있던 백한영은 이상함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뭔가 잘못됐나요?”
“···컷.”
백한영의 말에 이상준 감독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진짜 연기 교습 받아보신 적 없으세요?”
“네. 뭔가 잘못됐나요?”
“잘못됐냐고요? 잘못되긴 했죠. 백한영 씨가 이제 이 드라마에 더는 못 나온다는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네요.”
칭찬인가.
칭찬 맞겠지.
잘한 거 같으니 다행이네.
백한영은 고개를 돌려 백은하를 바라봤다.
백은하가 백한영을 쳐다보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역시 잘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
“1화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1화 촬영을 마무리 지은 기념으로 회식이 열렸다.
이상준 감독은 가볍게 선창을 한 후 백한영의 옆에 와 앉았다.
“백한영 씨, 진짜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까지 있나요. 제가 뭘 했다고.”
“아뇨. 진짜 감사합니다. 그냥 백한영 씨 마지막 연기 보고 소름이 돋았다니까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 뒤로도 이상준 감독은 백한영 옆에 불어 이런저런 말을 떠들었다.
얘기가 길었지만, 요약하면 결국 나중에라도 배우에 관심이 생기면 자신의 작품에 출연해달라는 거였다.
배우라. 재미있긴 했는데, 이걸 직업으로 삼는 건 좀.
일단 이번 일로 한 몇 년은 생각이 안 날 거 같았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백한영은 바람을 쐬기 위해 고깃집 밖으로 나왔다.
‘좀 마음이 놓이네.’
백은하가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서 그런가, 조금 마음이 놓이는 백한영이었다.
‘슬슬 돌아갈···음?’
가게로 돌아가 백은하에게 슬슬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백한영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한유림이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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