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이 힘을 숨김(3)
김태식은 긴급 지원 요청을 확인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쾅!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김태식이 초조함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긴급 지원 요청에도 등급이 있었다.
방금 들어온 긴급 지원 요청의 등급은 무려 1급.
그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S급 게이트, 혹은 그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
김태식은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지금 이게 며칠 전의 S급 게이트 사태와 동급의 사건이라면,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굳을 거 같았지만, 김태식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게 중요하냐.’
지금 생각해야 할 건 두 가지밖에 없었다.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자신이 C급, 실질적으로는 B급의 각성자라는 것.
그 외의 요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원 요청이 있었던 하임 초등학교 부지에 들어선 김태식은 눈을 크게 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몬스터를 한 개만 소환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각성자는 아무리 경력이 길어도 다수의 몬스터가 뭉쳐있는 꼴을 보는 경우가 드물었다.
있어 봤자 두세 마리가 뭉쳐있는 걸 보는 정도? 그게 일반인 각성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자 상식이었는데.
지금, 그 상식이 깨져버렸다.
김태식은 하임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봤다.
그곳엔 수많은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수십? 아니. 적어도 백은 넘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심지어 그렇게 모인 몬스터들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가장 약해 보이는 몬스터도 C급이었고, 대부분이 B. 심지어 A급 몬스터도 다수 섞여 있었다.
S급 몬스터가 없는 건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말 그대로 천만다행일 뿐이지 지금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콰앙!
거대한 얼음의 창이 몬스터 무리에 떨어지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걸 본 김태식은 누가 지원 요청을 보낸 것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지아였구나.’
S급 각성자를 목전에 둔 유지아가 전력에 포함돼 있다는 건 희소식이었지만, 김태식은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어찌 됐건 긴급 지원 요청을 했다는 건 그 유지아조차 감당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으니까.
김태식이 마검을 소환했다.
화륵.
불꽃이 타오르며 김태식에게 달려들던 몬스터를 태워버렸다.
‘밖으로 나가게 해선 안 돼.’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몬스터의 통제였다.
8년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안정된 사회는 게이트가 나타났다고 해서 무작정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다.
게이트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긴 하지만, 그 인근을 싹 비우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갑작스럽게 대규모 몬스터 소환 사태가 발생한 하림 초등학교 주변은 현재 일반인으로 가득 차 있다는 소리였다.
김태식이 마나를 더욱 끌어모았다.
평소에는 쓸 일이 없었지만, 이런 대규모 몬스터 소환 사태가 발생하자 쓸모가 생긴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김태식이 마검, 적련의 검날에 불꽃을 모았다.
불꽃이 최대로 응축된 순간, 김태식은 검을 좌에서 우로 그으며 불꽃을 해방했다.
화르르르륵!
불꽃의 해일이 몬스터 군단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하임 초등학교 입구 근처의 몬스터들을 증발시킨 김태식은 숨을 몰아쉬며 운동장을 바라봤다.
‘아직도 너무 많아.’
지금도 유지아와 그녀의 팀원들이 몬스터를 꾸준히 줄이고 있긴 했지만, 안 그래도 상대적으로 숫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A급 몬스터까지 합류하니 점점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됐다. 지원이 필요했다.
‘대체 추가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설마 근처에 각성자가 나밖에 없었나? 라는 생각을 하며 김태식이 재차 불꽃의 해일을 사용해 몬스터 군단을 쓸어버렸다.
연달아 큰 기술을 쓰느라 지쳐버린 김태식이 숨을 몰아쉬며 잠깐 휴식을 취했다.
동시에.
콰앙!
김태식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검이 꽂혔다.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한 김태식이 자신을 공격한 녀석을 바라봤다.
A급 몬스터. 데스나이트였다.
자신에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김태식이 적련을 꽉 쥐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김태식이었지만, 자신이 있었기에 더욱 스스로가 A급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도망쳐야 되는 국면이었다.
김태식의 공격으로는 데스나이트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주기도 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원이 올 때까지 발 정도는 묶을 수 있지.’
김태식이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몸 구석구석에 퍼트리며 검을 들었다.
지금부터 김태식은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강력한 공격 같은 게 아니었다.
필요한 건 하나.
마나를 최대한 적게 써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극도로 효율적인 움직임이었다.
땅에 꽂힌 대검을 뽑아 든 데스나이트가 김태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김태식을 향해 대검을 내리긋는 데스나이트.
김태식이 발로 땅을 툭 밀었다.
몸을 사선으로 이동시키며 데스나이트의 대검을 피하는 김태식.
그리고 그런 김태식의 목덜미를, 누가 뒤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마지막은 좀 괜찮았다. 태식아.”
후웅!
조금 전 김태식이 있던 자리를 데스나이트의 대검이 훑고 지나갔다.
내려베기는 페이크고 진짜는 수평베기였던 것이다.
땅에 엉덩방아를 찢은 김태식이 다급히 외쳤다.
“형이 여길 대체—.”
왜 왔냐고 말하려던 김태식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스륵. 쿵.
조금 전까지 김태식과 싸우던 데스나이트가 반으로 갈라지며 땅에 쓰러졌다.
“어···. 어?“
당황한 목소리를 내는 김태식에게 백한영이 말했다.
“태식아.”
“···네 형.”
“원래 게이트라는 게 저러냐?”
“아뇨 형. 이게 평범한 사태였으면 진작 나라 망했어요.”
“그래?”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건만, 김태식은 홀린 듯이 백한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흠.“
백한영이 전장을 살펴봤다.
몬스터가 하나 둘···아무튼 엄청나게 많았다.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상황이었지만, 백한영은 딱히 긴장을 하지도, 다급하지도 않았다.
단지 생각할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김태식의 그 끔찍한 검술을 교정할 수 있을까를 말이다.
그게 좋겠다.
속으로 방법을 결정한 백한영이 김태식에게 말했다.
“태식아 검 좀 빌려 간다.”
“···네?”
김태식의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손에 있던 적련이 허공을 날아 백한영의 손에 잡혔다.
그걸 본 김태식이 다급히 소리쳤다.
“형 안 돼요! 그거 다른 사람이 들면···. 어···.”
김태식이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예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지?’
김태식이 당황했다.
김태식이 소환한 적련은 오직 그를 위한 마검이었다.
그랬기에 김태식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면 큰 화상을 입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백한영은 아무렇지 않게 적련을 사용하고 있었다.
김태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게 형의 각성 능력인가?'
그게 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김태식의 예상대로 백한영이 남의 마검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각성한 건 아니었다. 그는 미각성자였으니까.
단지.
검이, 자신이 신앙하는 신을 만나 경외심을 바쳤다.
그런 이야기였다.
백한영이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지잉—!
검 끝에서 시작된 압축된 불꽃의 선이, 몬스터 군단을 훑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몬스터 군단의 3분의 1이 증발한 걸 보며 백한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성능이 좋긴 하네.’
과연 실질적 B급 취급을 받는 각성자의 능력다운 성능이었다.
근데 내 취향은 아니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백한영이 검을 가볍게 툭툭 때렸다.
검에게 지금부터 마음대로 까불면 분질러 버리겠다는 경고를 한 것이다.
백한영이 김태식에게 말했다.
“태식아. 딱 한 번만 보여줄 테니 잘 봐야 된다.”
백한영이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김태식이 멍하니 백한영의 행동을 눈에 담았다.
직후.
백한영이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
가장 먼저 소리가 사라졌다.
이후 거센 바람이 김태식의 등을 밀었다.
순간 진공 상태가 됐던 하임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공기가 빨려 들어온 것이다.
고개를 들어 조금 전까지 몬스터 군단이었던 잿더미들을 확인한 김태식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방금 그게···대체 뭐예요?”
“태산압정.”
백한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보다 완벽한 가르침은 없다고.
“태산압정?”
“그래. 태산압정.”
저것 보라지. 방금 사용한 기술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태산압정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있잖···.
“그게 뭐예요?”
자신의 상념을 끊는 김태식의 말에 백한영이 눈을 끔뻑였다.
백한영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태산압정이 뭔지 모르니?”
“네. 그게 뭐지. 검술 이름인가.”
“일단 물어보겠는데, 소설 같은 건 읽니? 무협지 이런 거.”
“그런 걸 요즘 누가 읽어요. 형.”
김태식의 말에 백한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태식이 너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요즘 애들이구나?
이 형 실망이 크다.
“근데. 어···. 형 맞죠?”
잠깐 사이 점수를 크게 깎아 먹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식이 백한영을 훑어보며 말했다.
백한영이 말했다.
“내가 그럼 나지 누구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뇨. 그···. 진짜 F급 각성자가 맞냐는 얘기였어요. 당황스러우니까 말도 꼬이네.”
“오늘 막 각성자 등록을 한 거 맞아.”
“그래요? 저는 또 검신이 몰래 폐관수련을 깨고 암행어사 놀이라도 하나 싶었죠. 근데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은 형처럼 젊지 않네.”
검신이라는 단어에 움찔했던 백한영은 김태식이 말한 검신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진정했다.
아무래도 이곳에도 검신이라고 불리는 각성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백한영과 김태식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유지아가 둘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유지아의 말에 김태식이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긴급 지원 요청에 응답하는 건 각성자의 의무인데요 뭐. 게다가 전 별로 한 것도 없고요.”
“한 게 없다니, 그렇지 않아요. 김태식 씨가 아니었다면 몬스터가 외부로 빠져나갔을지도 몰라요.”
“···저를 아세요?”
“유명하시잖아요.”
라고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각성자 유지아가 말했다.
유지아의 말에 김태식이 볼을 긁적였다. 괜히 뻘쭘한 것이다.
유지아가 이번엔 김태식의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지아예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백한영입니다.”
“···백한영?”
백한영의 말에 유지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왜 저러지?’
유지아의 이상 행동에 백한영이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김태식이 백한영의 옆에 와서 작게 물어봤다.
“근데 형.”
“어 왜.”
“태산압정이 진짜 뭐예요?”
그 말에 백한영은 고개를 바로 하고 김태식을 흘겨봤다.
진짜 너는 안 되겠다.
구 무협부터 싹 다 읽을 준비해라.
*
백한영?
유지아는 오랜 기억을 뒤적였다.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유지아는 이내 백한영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는지 떠올렸다.
백한영.
그녀의 절친한 친구의 가족이, 그런 느낌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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