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어인 일로 그러십니까?”
“지난번 서경에서 있을 때 잠시였지만 일들을 잘 처리하였더구나.”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말이다. 요동을 받는다면 네가 요동성으로 가거라.”
“…예?”
경대승은 깜짝 놀랐다.
“요동성을 다섯 번째 북경으로 할까 한다. 북경이 될 요동성의 유수이자, 상장군을 자네가 맡도록 해. 요동 전체에 있는 금나라 군과 금 백성이 이주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니, 천천히 생각해서 어떻게 할지 잘 생각하도록 해.”
“예. 합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의방은 경대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 보라며 손짓했다.
대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 * *
며칠 후.
다시 완안 올출과 이의방의 만남이 다시 주선되었다.
이의방은 먼저 고려에서 가지고 있는 요동지도를 펼치었다.
“답을 주려 하십니까?”
“예. 태원수, 저희 고려는 금나라와 함께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완안 올출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었다.
“하지만 태원수께서도 고려의 사정에 따라서 귀국(貴國)을 도울 수 없을 거란 걸 미리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확고한 동맹이라 할지라도 나라의 사정에 따라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저도 잘 아는 바입니다.”
이의방은 좌복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좌복야 이준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첩을 가지고 완안 올출에게로 다가가 정중하게 서첩을 내밀었다.
완안 올출은 서첩을 받아 들고는 곧장 펼쳐 보았다.
서첩 한쪽에는 고려 황제의 국새가 찍혀있었고, 수결(手決)한 부분에는 이의방 이름과 그의 관인이 찍혀있었다.
완안 올출을 가만히 쭈욱 읽어 보다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첩을 내려놓았다.
“고려와 금나라에도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역관이 완안 올출의 말을 통역하자, 이의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완안 올출은 한쪽에 놓인 붓을 들고서 두 서첩에 자필로 서명하더니, 품속에서 자신의 관인을 꺼내 자필로 서명한 부분에 찍었다.
“저희 황제 폐하께 보여드리고 그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의 황제께서 이 서첩에 국새를 찍으셨으니, 마땅히 금나라 황제께서도 국새를 찍어 보내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그리고 태원수께서 지난번 말씀처럼 보내시는 거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다시 가지고 오도록 하지요.”
“하하하, 태원수께서 직접 말입니까?”
“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만 된다면 금나라는 후방 걱정을 전혀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고려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원수, 제가 지금 이 요동지도를 펼친 이유는 먼저 우리 고려가 거란을 칠까 해서입니다.”
“거란을… 치시겠다고요?”
“예.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는 말이 있지요? 저희는 어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완안 올출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하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고려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십시오.”
“그럼 태원수의 말을 믿고 감행하겠습니다.”
완안 올출은 이의방의 말을 듣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서첩 하나는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예.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리고 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산동 동로 반도에 빠지게 되면 주로 어민들이 될 것입니다. 그 어민들이 바다에 나가 조업을 할 수 있도록 고려군에서 보면 양해를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업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상국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자, 그럼 자리를 이동하실까요?”
“예. 상국.”
이의방과 완안 올출은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이의방은 현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남송 사신에게 금나라와 합의를 하였으니, 때를 보아서 돌아가라고 네가 전하거라.”
“예. 합하.”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남송 사신이 있는 객관으로 향하였다.
* * *
그날 저녁.
“아버지, 고려에게 너무 많이 내어준 게 아닙니까?”
완안형이 완안 올출에게 물었다.
“후방이 든든하면 된 거야.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결정이지.”
“그래도 산동 동로 반도와 요동은…….”
“얘야, 너는 이 고려에 들어와서 무엇을 보았느냐?”
“…예?”
“흥화진에 들어서 이 개경까지 오기까지 무엇을 보았냐고.”
완안형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뭐 느낀 게 없느냐?”
“송구하옵니다. 아버지.”
“내가 본 걸 이야기해주마. 흥화진에서부터 이곳 개경에 있으면서 내가 본건 그저 놀라움 뿐이었다. 곳곳에 어린아이들이 글을 읽고 논어를 읽으며 지나가는 어린아이가 어른을 부여잡고 뜻을 물어오면 그 어른은 피하지 않고 뜻을 가르치는 걸 보았다.”
“그게 뭐가 대단하다는 것입니까?”
“금나라에서도 그러하더냐? 자기 살길 바쁜 이들이 이 고려처럼 글을 읽던 어린아이들을 본 적이 있더냐?”
완안 올출의 물음에 완안형은 고개를 저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금나라와 송나라에는 수많은 걸인들이 있지만, 고려에 와선 걸인 하나를 보지 못하였다.”
“걸인은 저희가 찾아보지 못한 것뿐, 자세하게 알아본다면 있지 않겠습니까.”
“없다고 한다. 나도 믿지 못하여 객관의 관리인에게 물어보았지.”
“아버지, 그게 뭐가 대수라는 겁니까? 우리 금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걸인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굶어 죽는 이요? 그건 나라에서 구휼(救恤)하면…….”
“그건 임시적이지. 고려에서는 그들에게 땅을 주었고, 그 땅을 개간하기까지 살 수 있도록 쌀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지금의 고려는 개인의 땅이 아닌 국가의 영토란 말이다. 그 누구도 백성이 일군 땅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고려라는 나라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금나라 남송의 백성이 글을 알면 뭐하냐고 하겠지?”
완안형은 자신 아버지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었다.
“허면…….”
“이 고려라는 나라는 금나라와 남송을 뛰어넘을 나라가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금나라와 남송이 우러러보는 국가가 될 것이다. 어느 나라든 이 고려에 머물러서 고려인들을 본다면 이런 생각을 하겠지.”
“…….”
“왜 내 자식은 이런 걸 누리지 못할까? 왜 내 자식은 어린 나이에 일해야 하나? 왜 우리는 남의 농지를 일구어야 하는가? 그런 생각들이 빗발치게 되고, 그 생각이 터지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
“…설마 민란입니까?”
완안 올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남송에 배울 건 다 배웠으니, 이제 고려에게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고려에게… 배워요?”
“그래. 좋은 건 배워야 하는 법이다. 다는 바꿀 수 없겠지.”
“어떻게 하려 하십니까?”
“간단한 방법이지 않으냐. 고려로 사람을 보내어 고려를 배우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금나라는 고려 못지않은 나라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보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완안형은 곧 답하였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그때, 객관 밖에서 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원수, 위위시 소경 악정 장군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악정이 왔다는 소리에 완안 올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셔라.”
덜컹.
방문이 열리며 악정이 들어서며 완안 올출에게 고개를 숙이었다.
“어서 오게. 악 장군.”
“다시 뵙습니다. 태원수.”
“자, 앉으시게.”
악정은 자리에 앉았다.
“하하, 정말이지 이목구비가 딱 닮았어. 남송 황제가 칼 뽑을 만했네.”
완안 올출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피식 웃었다.
“아, 예…….”
“자네 아버지 본 적 있나?”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구먼. 자네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해줄까?”
악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아버지는 한결같은 사람이야. 키도 크고, 사내답고… 참으로 늠름한 사람이었지. 그가 전쟁터를 휩쓸 땐 정말 장수 같았지. 자네 같은 아버지가 또 있을까 싶었네. 내가 존경을 했거든. 적장이지만 적으로 안 만났다면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야.”
“성격은 어떠셨나요?”
“성격? 너무 올곧아 탈이야. 그냥 이게 옳다 싶으면 그 생각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었거든. 타협도 볼 줄 모르고. 그러다 보니 적도 많았지. 조정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는데 악비는 그 말도 듣지 않고서 감행했어. 그러다 보니 따르는 이들이 많았고 그걸 염려하던 현 남송의 상황제는 못마땅해하였고, 결국 사이가 틀어져 자네 아버지를 역모죄를 씌어 죽였어.”
“제가 듣기에는 태원수와 진회가 거래를 하였던…….”
“그래, 거래도 했지. 악비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게 되었거든. 우리도 전쟁을 많이 치렀고. 남송의 재정도 말이 아닌 상황이었거든 그런 상황에서 악비는 무리하게 북진을 하려고 하였어. 솔직히 내가 마음먹고 백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남진하였다면 남송은 끝났어. 악비와 한세충이 있어도 막지 못할 거야. 그런데 내가 왜 남송을 내려가지 않았는지 아나? 희생자가 너무 많았거든. 태종 황제께서 돌아가신 후 금나라의 내부 사정도 좋지 못하였기 때문이야.”
완안 올출의 말을 들은 악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자네를 아는 자들을 통해 들어보니 여진 부족에게서 컸다고?”
“예, 그렇습니다.”
“참 험난하게 살아왔군. 그래도 자네를 알아보고 옆에 데리고 있는 위위경에게 감사해하며 살게나. 내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만나다 보니, 관상을 잘 보게 됐거든.”
“아, 예…….”
악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모시고 있는 위위경 말이야. 그 사람 눈 밖에 날 짓 하지 마. 무서운 사람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건 자네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그 사람 옆에 있으면서 못 볼 거 볼 거 다 봤을 거 아니야. 사람 죽이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눈빛이야. 물론 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만. 위위경은 달라. 그러니까 눈 밖에 나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거야. 악비의 아들이니까. 핏줄은 어디 변하지 않아. 부디 자네 아버지처럼 살지 말게.”
“예, 알겠습니다.”
악정은 태원수 완안 올출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자, 그럼 자리를 이동해서 술이나 한잔하세. 곧 나도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완안 올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정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