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하지만… 요동 연안 일대는 고려가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요동을 내어주실 겁니까?”
“물론이지요. 그리고 산동의 반도도 내어드리겠습니다.”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지금 하는 말 자체는 남송의 말보다는 더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이의방은 완안 올출이 쓸개까지 내어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완안 올출에게 곧장 물었다.
“산둥반도를 내어주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확고한 동맹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지요. 산둥반도를 내어드린다면 남송은 금나라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도를 내어준다는 것은 요동을 내어 드린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의미이지 않겠습니까.”
완안 올출의 이야기를 들은 현수는 살며시 끄덕였다.
그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후계자분은 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하군요.”
이의방은 살며시 현수를 쳐다보자 완안 올출은 곧 답하였다.
“해군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산둥반도를 내어드린다면 고려는 모든 해상권에서 영향력이 거대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저희 금나라가 도움을 청한다면 바닷길을 통해서 들어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가 막힌 생각이다,
금나라는 확고한 동맹을 통해서 고려를 든든한 후방으로 두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럼 그 조건은 어떻게 이행하면 되겠습니까?”
이의방의 물음에 완안 올출을 말하였다.
“본국으로 돌아가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의 문건, 각 부의 수장들의 문건을 자필로 서명하여 문을 고려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고려에서 군을 산동과 요동지역으로 보낸다면 금나라는 고려군에게 성을 양도할 것입니다.”
“금나라에서는 고려에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확고한 동맹은 이렇게 한다 치더라도 자세하게 고려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저도 알아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첫 번째는 화약과 화포입니다.”
화약과 화포라는 말에 이의방과 현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약과 화포를 내어드린다면… 남송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하하, 고려가 남송 따위에 겁을 낼 나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해상무역을 통제한다고 할지라도 산동에서 거래를 튼다면 시간은 걸리지만,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하하,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이의방은 이야기하였다.
“저희 고려에서 화포와 화약의 제작법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화약을 이제 만들기 시작한 터라, 지금 화약을 내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완안 올출이 이의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의방의 말에도 거짓이 없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기 때문이다.
“화약을 만드는데 까다로운가요?”
“알고 있는 대로 답변 드리거라.”
“예. 합하.”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완안 올출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화약은 염초, 유황, 목탄을 혼합해서 만드는데 그중에서 제일 구하기 어려운 게 염초입니다. 남송에서는 염초 대신 초석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초석을 구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초석? 자네 지금 초석이라 하였나?”
“예. 초석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초석 광산은 우리도 있네, 그것도 아주 큰 초석 광산이지. 초석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구먼. 화약과 화포의 제작법을 주면 초석 광산은 금나라와 고려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걸로 하겠네. 초석 광산에서 얼마나 채광을 하든지 상관없네.”
현수는 완안 올출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었다.
초석을 완전히 구할 수 있다면 화약을 대량생산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저기… 금나라에 화포와 화약을 만드는 데 있어서 기술자가 필요한데.”
“저희도 기술자가 부족합니다. 그 부분에서는 금나라가 알아서 하셔야 할 듯합니다.”
“그럼 화약과 화포는 확실히 금나라에 넘겨주는 건가?”
완안 올출의 물음에 현수 대신 이의방이 답하였다.
“태원수, 그 부분은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하하, 제가 너무 들떴습니다.”
“화약과 화포의 제작법은 드릴 겁니다. 먼저 금나라에서 약조를 지키신다면요.”
“옳으신 말입니다. 저희가 먼저 약조를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으로는… 금나라가 급하게 도움을 청한다면 금나라를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거면 무엇입니까?”
“고려가 든든하게 금나라의 후방을 지원해주는 겁니다.”
“금나라가 도와 달라면 도와 달라… 이 말씀으로 해석해도 됩니까?”
이의방의 물음에 완안 올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가 금나라의 청을 거부하면 어찌할 것입니까?”
“거부한다라…….”
완안 올출은 말문이 막히었다.
고려가 금의 요청을 거절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죽은 후 어떤 일이 생길지 그리고 그 후에 일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어려운 청은 아무리 고려라 하더라도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한 겁니다. 태원수, 저희가 의논을 한 후에 답을 내어 드릴 테니 객관에 가셔서 좀 쉬고 계시지요.”
이의방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자, 완안 올출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의방은 깊은 한숨을 내리 쉬었다.
“어찌하면 좋겠냐?”
“합하께서 결정하실 문제이십니다. 신료들이 반대하고 찬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합하께서 최종결정을 내리시는 게 아니옵니까.”
“너는 금나라를 어찌 보느냐?”
“잘하면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잘못하면 철천지원수가 될 수도 있다고 보옵니다.”
현수의 말에 이의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좋던 고려와 송나라였다.
그러나 한순간에 양국의 사이가 틀어져 버렸고, 외교 관계까지 모두 틀어졌다.
물론 송나라의 잘못도 있지만, 고려의 사정을 보았을 때 송나라를 도울 수 있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확고한 동맹에 금나라가 원하는 대로 도와줄 수는 없어도 합의점만 찾는다면 도와줄 수는 있겠지?”
“합하, 하오시면?”
“음, 신료들과 의논하여 태원수에게 답을 주어야겠지.”
이의방은 결정을 내린듯한 말투로 대답하였다.
“이번 일이 정리가 되는 대로 개경을 떠나 북계와 함경도를 돌아보고 올 테니, 네가 나 대신해서 사신 오면 맞이하고 잘하고 있어 봐.”
“예. 합하.”
이의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 *
중서문하성에서 결론을 짓고서 새벽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주 긴 하루였다.
신료들 중 반대하는 자가 여럿 있었지만, 찬성하는 자들은 더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딱 하나, 금나라의 요구 조건이었다.
확고한 동맹을 하더라도 나중에 금나라가 무슨 요구를 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부할 의사권은 있었지만, 반드시 도와줘야만 할 것 같았다.
끼이익.
현수가 조용히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곧 해가 뜰 시간이라 그런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노비들은 현수를 보며 놀라 인사를 했다.
현수는 천천히 발길을 움직여 몸채로 향하였다.
몸채에 들어서자, 아침 일찍 일어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일찍 일어났구나!”
수아가 후다닥 뛰어와서는 품에 덥석 안기자, 현수는 수아를 번쩍 들어 올려주었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
“복이랑 바닥에 그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현수는 수아의 말을 듣고서는 천천히 아이들이 있던 곳으로 가서는 바닥을 보았다.
아직 어두워서 그런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역시 바닥에 그린 그림은 개발새발 그림이었다.
“잘 그렸네.”
“정말요!?”
“음, 지난번에 그렸던 그림보다 훨씬 더 잘 그렸구나. 창고에 수아 네가 말하였던 안료를 구해왔는데 확인해보았느냐?”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앞으로 필요하면 더 이야기하거라.”
“예!”
현수는 수아를 안고 또 한 손으로는 복이의 손을 잡으며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밟지 않고서 돌아서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부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아야!”
또 뭐라고 하려고 하는 김씨의 행동을 현수가 제지하였다.
“되었어요.”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음, 피곤하기는요. 아이들 보니까 피곤이 싹 가십니다. 하하하!”
기분 좋게 웃으며 수아를 내려놓고서 요람이 있는 곳으로 가 곤히 자는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금나라와 남송의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연희 궁주 왕씨가 물었다.
“잘 되었어요, 금나라와 손을 잡을 겁니다.”
“그럼 남송과는요?”
“전처럼 서먹한 관계가 되겠지요.”
현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집게손가락으로 한쪽 볼들을 쿡쿡 찔러 보다가 몸을 돌아섰다.
“식사 올리겠사옵니다.”
“들이게.”
연희 궁주 왕씨가 답하자, 문이 열리며 비(婢)들이 들어오더니 상위에 음식들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먹고 씻을 테니, 탕에 물을 좀 받아놓거라.”
“예. 위위경.”
비(婢)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고는 상위에 음식들을 가지런히 다 올려놓은 뒤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자리에 앉아 가족들과 식사를 이어 나갔다.
* * *
한편, 중방에 이군 육위의 상장군들을 소집시킨 이의방은 그 자리에서 상장군들에게 공표(公表)하였다.
“금 사신이 돌아가는 대로 우리 고려는 거란을 칠 것이다.”
“예?!”
상장군들은 깜짝 놀라 물었다.
“육위의 군사들을 달포 안으로 출전준비를 하게.”
“하오나, 합하… 보름이면 시간이 촉박합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시지요.”
“그럼 내달 보름이면 되겠나?”
“예. 합하. 그때까지 준비를 시킬 수 있습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급은 어찌합니까?”
“요동 남부 일대 들어가는데 보급은 천천히 조달해도 되지 않나. 우리 군사는 서경을 거쳐 흥화진에서 며칠 쉬다가 압록강을 넘을 것이다. 대군을 이끌고 흥화진까지 들어가는 시간이 걸리니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들어간다면 대충 보급은 문제없을 거야.”
“하면… 해군은…….”
“해군도 움직여야지.”
이의방이 요동지도를 펼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해군을 비사성과 목양성, 건안성에 상륙시킬까 하는데… 물론 바닷길 잘 아는 해군 대장군이랑 의논을 해봐야 알겠지만 내 생각은 그래.”
상장군들은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그러던 중, 좌우위 상장군 이영령이 말하였다.
“합하, 해군이 건안성에 상륙을 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건안성은 거란족의 본거지입니다. 여기 표기된 산성들을 사용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피해가 더 커질 수 있사옵니다. 하옵고 공성 장비는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제가 듣기로도 그렇습니다. 군기감은 지금 철책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공성 장비를 준비한다면…….”
“철책은 북계와 함경도에서 함께 생산될 거고, 공성 장비는 서경에서 만들든지 하면 될 거야.”
“합하, 합하께서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시옵니까?”
“일단 준비만 단단히 하도록 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예. 합하.”
“응양군 상장군만 남고 다들 나가서 일들 봐.”
“예. 합하.”
장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응양군 상장군 경대승만이 자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