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석 달 후.
달포의 시간이면 족할 것으로 보였으나, 어느새 벌써 석 달이나 흘렀다.
준비만 하면 금방 끝날 줄 알았더니,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와 처리할 일들이 속속히 생겨 출발할 수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남송의 사신들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갔고, 금나라는 원하는 답을 듣고 돌아가면서 꼭 답을 들고 오겠다며 약조를 하고 떠났다.
또한 공성 장비와 보급을 준비시키기 위해 서경 유수 조위총에게 전령을 보냈고, 고려 전역에는 치안(治安)을 강화하라는 비상령을 내렸다.
특히 강릉의 군사 3천을 추가로 함경도에 올려보내 여진을 경계하도록 명을 내렸다.
“합하, 북계와 함경도를 둘러 보신다고 하셨는데… 북계는 올라가면서 보신다 쳐도 함경도는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함경도?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보든가 할 거야. 나 없을 때 너나 잘하고 있어.”
“예. 합하.”
“금에서 사신이 오면 내 대신해서 네가 다 처리해. 무슨 일 있으면 보고하고.”
“그리하겠사옵니다.”
“동경유수 평장사는 어디가 그렇게 안 좋아서 못 간다는 거야? 전의감(典醫監)에서 몇 명 뽑아서 동경으로 내려 보내봐.”
“예.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이의방은 거란을 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문하시랑평장사이자, 현(現) 동경유수 이의민에게 올라오라고 전령(傳令)을 보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돌아온 답변은 몸이 좋지 않아 도저히 갈 수가 없다는 말뿐이었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이의방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다가 문뜩 현수에게로 눈길을 돌리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합하.”
“평장사 때문에 그러하냐?”
“아닙니다. 합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잠시 들어서요.”
“그게 아닌 것 같구나. 6위의 군사가 빠지면 군사가 텅 빌 테니… 그 틈을 타서 평장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한 게 아니고?”
“하, 합하…….”
“나도 다 추밀원에서 듣고 있다. 추밀원이 왜 있겠어.”
“하면… 어찌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옵니까?”
“이의민은 평생 내 옆에서 고생하고, 나 대신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잘못하고 있는걸 알아도 그냥 묻게 되더라.”
동경으로 떠나기 전부터 동경에 있던 평장사 이의민의 일을 조용히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던 이의방이었다.
“얼마 전에 세 자식을 동경으로 보내 달라고 청하는 서신(書信)이 당도하여 내가 명을 따로 내렸다.”
툭.
이의방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현수에게 주었다.
“지난번 평장사가 추천했던 인사들이야.”
현수는 종이를 들어 올려 펼치었다.
다름 아니라, 수많은 동경 출신들의 인사 관리표였다.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 식목도감, 이군 육위에 이르기까지 이의민이 천거(薦擧)한 이들이 곳곳에 박혀있었다.
비록 요직은 아니더라도 나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였다.
육위에 군사들이 빠진다면, 충분히 개경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인원들이었다.
“흠…….”
현수는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감시하면 되겠사옵니까?”
“알아서 해. 나는 요동 일에만 전념할 테니.”
“예. 알겠습니다. 합하, 하옵고… 요동에 어찌 합하께서 직접 가려 하십니까.”
현수의 물음에 이의방은 답하였다.
“이럴 때 요동 한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
이의방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양팔을 벌리자, 현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경번갑을 꺼내어 서는 이의방에게 입혀주었다.
이에 이의방은 끈을 스스로 매기 시작하였고, 현수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정강이의 경갑을 이의방에게 채워 주었다.
하나하나씩 착용하더니, 마지막으로 허리에는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착용하였다.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음… 그래. 오랜만에 갑주를 입었더니 아주 무겁구나.”
이의방의 장난 섞인 말에 현수는 피식 웃었다.
“적응되시면 괜찮으실 것입니다.”
“그나저나 너는 쇄자갑이 안 불편하냐?”
“아이고, 저는 벗고 다니고 싶어도 못 벗습니다.”
“크하하하!”
이의방이 크게 웃다가 몸을 돌려 흑의(黑衣)에 금사(金絲)로 현무가 수놓아진 의복을 꺼내어 걸쳐 입었다.
“현수야.”
“예, 합하.”
“사천감에 일러서 자리 하나 좀 봐놓으라고 해라.”
“자리요?”
“관청을 새로 지을까 해. 중서문하성, 상서성, 추밀원, 식목도감을 한곳에 집결시킬까 한다. 진즉에 이 말을 해야 했는데… 말을 꺼낼 시간이 있어야지. 그러니 네가 좀 진행해봐.”
“연유(緣由)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짓고 싶어서 말이다. 답이 되었느냐?”
“중서문하성에서 의논하여 바로 시행하여 공사에 들어가겠사옵니다.”
이의방은 피식 웃으며 현수의 어깨를 툭 쳤다.
“남송을 경계하거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해군이 움직인 걸 틈타서 남송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금나라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대놓고 말해주었으니, 남송이 먼저 산동 동로를 칠 수도 있고… 아니면 해금한다고 하였으니 산동 동로로 들어가는 상선(上船)을 막을 수도 있을 것 같구나.”
“합하의 말씀 명심하겠사옵니다. 하옵고… 금나라와 이야기는 잘 끝났지만, 만약 금나라가 고려의 배후를 공격한다면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너무 성급하게 나아 가는 게 아니신지 염려가 되옵니다.”
“서북면병마사 겸 안북도호부사 조원정에게 이야기를 해놓으면 돼. 조원정이 직접 움직일 거야.”
“하오나, 그자를 어찌 믿을 수 있겠사옵니까.”
현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의방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아라. 서경을 지나서 안주에 들러 조원정에게 명령을 내릴 것이다.”
이의방은 다시 한번 더 명령을 내릴 것이라며 강조를 하였다.
“혹여 내게 변고(變故)가 생긴다면 네가 내 뒤를 이어서 국정을 운영하거라. 물론 중서시랑평장사, 참지정사, 추밀원사, 좌복야, 우복야에게도 이야기를 다 해놓았어. 내 뒤를 잇는 데는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소서.”
이의방은 현수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하,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밖에서 박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나가마!”
“예! 합하!”
“가자.”
“예, 합하.”
이의방은 검을 허리에 패용(佩用)하더니, 투구를 쓰고 월도를 들고 현수와 밖으로 나갔다.
중방문을 나서자, 육위의 상장군들과 휘하 대장군, 장군들이 줄을 선 채로 있었다.
중간중간 장수들은 개경에 남을 이들을 마지막까지 단속하는 듯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특히나 흥위위 대장군 홍중방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곽 또라이, 너 이상한 짓 하지 마.”
“아이고,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제가 무슨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사고는 이 새끼야! 맨날 사고 치는 게 너야, 너. 툭하면 쥐어패지를 않나.”
“어사대(御史臺)는 패는 게 업무 아닙니까.”
“하, 정말… 이 새끼를 죽일 수도 없고.”
홍중방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튼 너 사고 치지 마.”
“아, 예…….”
“가자!”
“예! 합하!”
이의방은 장수들을 이끌고서 북문인 태화문으로 향하였다.
말을 타고서 태화문을 나서자, 태화문 주위로 열을 맞춘 육위의 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력 전투부대인 좌우, 신호, 흥위위의 군사들은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었고, 금오위는 홍의(紅衣), 천우위는 청의(靑衣), 감문위는 자의(紫衣)를 걸치고 있었다.
옷의 색깔이 다른 탓에, 각각 어디 소속인지 알기 쉬웠다.
이에 더불어 이의방의 대규모 사병이 집결해 있었다.
육위의 총집결한 군사는 15만 8천, 사병 5만.
총 이십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합하, 승전(勝戰)을 기원하겠사옵니다!”
중서시랑평장사 윤인첨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이다. 내 반드시 대승을 거두어 돌아올 것이니, 그때까지 조정(朝廷)을 잘 이끌어 주기를 바라오.”
“예, 합하!”
문신들이 자신 있게 대답하자, 이의방은 말 위에 올라타 허리에 패용하고 있던 검을 안장에 채우고 월도를 아래로 내렸다.
각 상장군과 장수들 역시 말 위에 올라탔고, 이에 이의방은 앞으로 먼저 나서며 군사들의 사이를 벗어났다.
장수들 뒤로 기병, 팽배수, 장창수, 궁수들이 뒤를 따르었고, 당장 필요한 보급 부대, 전투기록을 할 병부에서 차출한 녹사(錄事)들이 뒤를 이어 따라갔다.
“자, 저희는 이만 들어가서 일들을 보도록 하지요.”
참지정사 조영인의 말에 신료들이 태화문 안으로 들어가 관청으로 향하였다.
“중방으로 가시겠나?”
문극겸이 현수에게 물었다.
“저는 군기감과 병부에 들렀다가 중방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우리 두 사람은 상서성으로 가겠네.”
“예. 그렇게 하십시오.”
문극겸과 이준의는 태화문 안으로 들어가더니, 상서성으로 향하였다.
“정 장군.”
“예, 위위경.”
현수는 이의방에게 받은 것을 건네주었다.
“조용히 시찰(視察)하고 감시하게.”
“이게… 무엇입니까?”
“그냥 대비하는 거야.”
“악 장군.”
“예. 위위경.”
“정 장군과 함께 움직이고, 천 장군은 계속 견룡, 순검군의 지휘를 맡도록 해. 양소 자네는 나와 함께 군기감으로 가자고.”
“예. 위위경.”
정균, 악정, 천시호는 위위시로 향하였고, 현수는 양소와 함께 군기감으로 향하였다.
* * *
군기감에 들어선 현수는 군기감장과 군기감정을 만났다.
“어서 오십시오.”
“철책준비는 어찌 되어가는가?”
“함경도에 보낼 철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병기들과 갑옷은 문제없이 준비할 수 있겠는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남경에서도 철책을 만들고 있으니, 함경도에 보낼 철책은 천천히 하고… 병기와 갑주 생산 더불어 화살을 많이 생산하게. 화살이 제일 많이 필요할 것일세.”
“그리하겠습니다. 위위경.”
“화포는 아직 진전이 없지?”
현수가 양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 아직은 그대로입니다.”
“화약은?”
“화약의 재료인 초석과 염초는 전국에서 수집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들어낸 화약은 약 사백 근 정도 됩니다.”
“사백 근이라고?”
“예, 위위경.”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 넘도록 군기감에는 신경을 거의 쓰지 않고, 화약과 화포를 관장하는 관청에만 신경을 썼었다.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음에도 일이 척척 진행되는 것 같아 뿌듯한 현수였다.
“관청의 일은 잘 진행되어 가고 있어. 양 장군, 한번 다녀와 봤나?”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 번씩 가보고는 있습니다.”
“어차피 금나라랑 이야기 다 끝난 거 대놓고 한번 개발해보자고. 남송이든 금나라든…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철제 화포를 만들 거니까.”
“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잘 안 되는 거 알아. 조급하게 개발하지도 말고 하나하나 다 뜯어 가면서 해봐. 주물이 틀렸다면 다시 주물을 짜고 해봐.”
“예. 위위경.”
“그리고 군기감장.”
“예, 위위경.”
“군기감에 기술자를 더 영입하게. 필요하면 금나라든 남송에서든 손기술 좋은 사람들을 대거 데려와도 돼.”
“하오나, 일반적인 야장간(冶匠間)도 아니고… 군기감에 들이는 것은…….”
군기감정 김봉모가 말하자, 현수는 양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남송에 손기술 좋은 사람 아나?”
“병기 쪽으로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