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19화 (19/159)

019화

“네가 이 청년과 함께 개경으로 향하거라.”

“예? 주인어른… 그게 어인 말씀이시온지요.”

“말 그대로다. 위위경께서 이 청년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나와는 가지 않겠다고 하니… 개경에서 만나는 게 나을 듯하다. 아무래도 개경까지 홀로 가기에는 좀 위험하니 네가 함께 가주었으면 좋겠구나.”

“예! 주인어른!”

“그럼 개경에서 보자꾸나.”

막무가내로 진행이 되어가는 상황에 어쩔 줄 모르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기!”

“왜? 아… 돈이 없느냐? 그건 걱정하지 말 거라.”

우학유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꼬여버린 현재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아가야 할지가 문제였다.

고려 시대까지 차원 이동했다는 건 백번 양보해서 이해하겠지만, 판타지 소설처럼 진행은 아니었다.

진짜 군인집단이라 그러한지 무작정 이리 막무가내로 나가는 순간이 제일 무서웠다.

“그럼 나도 이만 가보겠네.”

의원에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제 방 안에 남은 건 나를 개경으로 데려갈 갑이라는 이름의 무사였다.

그런데 얼핏 보면 나와 몇 살 차이 안 나 보였다.

“저…….”

“예. 말씀하시옵소서.”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청년에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혹시 몇 살이에요?”

“올해 열아홉이옵니다.”

“형이네요.”

“예!?”

무사는 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 앞에 곧장 넙죽 엎드렸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이놈을 형이라 하시옵니까? 이놈은 천하디천한 노예 놈이옵니다. 주인어른 덕에 주인어른들을 모시는 몸이 되었지만, 형이라니요… 가당치 않사옵니다.”

“…….”

정말 고려 시대가 맞기는 맞나 보다.

확실한 신분 사회이니까 말이다.

평민까지는 정말 살기가 좋은 고려.

남녀가 평등한 사회에 결혼도 이혼도 자유로운 국가.

누가 뭘 하든 간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

국법에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은 게 바로 이 고려이다.

하지만 평민 이하로는 말이 달랐다.

평민 이하의 계급은 사람 취급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작금의 고려였다.

“자, 일어나요.”

“말도 높이지 마시옵소서. 이놈은 노예이옵니다.”

“…….”

21세기를 살다 온 나는 현재 고려의 신분 사회가 정말 적응이 안 되었다.

그러다 겨우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였다.

“일어… 나라.”

“예!”

갑이는 벌떡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이었다.

“저기… 우리들끼리만 있을 때는 편하게 하면…….”

“아니 되옵니다. 이놈이 경을 칩니다.”

“…….”

확고하다.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천한 이놈에게 이리 말씀 해주시니… 개경까지… 아니, 옆에서 모시는 그날까지 목숨을 바칠 것이옵니다. 주인어른께서 아니 계시니 이놈의 목숨은 나리 것이옵니다.”

“…….”

의지에 가득 찬 갑이의 말에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쉬세요…….”

“아… 예!”

존대 받는 것도 굉장히 불편해하는 갑이였다.

* * *

며칠 후.

“예. 위위경. 이쪽이 군영과 훈련장이옵니다.”

이의방은 곽주에 있었을 때보다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초병부터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모습부터 보았으니 말이다.

군기 바짝 잡힌 모습은 말을 다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곽주에서와 비슷하게 병기 창고 군량 등 모든 것을 꼼꼼하게 살피어 보았다.

다만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도 고득시와 돈장이 자리를 비워 불가능하였다.

유일하게 글을 알고 있는 돈장은 곽주성에 두고 왔고, 고득시는 다른 곳으로 보내었으니, 알 길이 없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 이의방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내 듣기로는… 자네가 국경의 일을 잘 안다고 하지?”

“예. 위위경. 지난날에 흥화진에서 별감으로 지낸 적이 있사옵니다.”

“오, 그러한가? 그럼 거란족의 동태가 어떠한지 잘 알겠구먼.”

“물론입니다. 거란족은 지금 금나라에 숙이는 척하고 있지만, 힘을 어느 정도 기르면 금나라 국경에 쳐들어가 약탈할 것입니다. 하지만 또 분노한 금나라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하염없이 숙이는 존재들이지요.”

“…….”

“또한 금나라의 영역 안에 있는 여진족과, 거란족 사이에 물물교환이 왕성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특히나 여진이 위치한 곳에는 광물이 많이 나고 가죽과 희귀한 약초들이 많이 자라고 나는 곳이지요.”

“아… 그래. 나도 들어본 이야기지. 광물이 얼마나 많이 나오길래 그래?”

“정말 수도 없이 나옵니다. 천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쓴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이라고 광부들이 그러더군요. 대부분의 광부들이 우리 고려사람 아니옵니까.”

“그렇지.”

“여진족들은 광물을 캐 준 저희 고려에 감사해하면서 은이나 옥, 철광의 대부분들을 값싸게 팔아주었죠. 이는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것보다 더 질이 좋습니다.”

“하하하하하!”

이의방은 크게 웃어보였다.

흥화진에 있었던 탓인지, 북방에 오래 있던 탓인지는 몰라도 거란과 여진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통주 방어사의 말에 굉장히 흡족해하면서 이의방은 재차 물어보았다.

“통주에 필요한 것은 없는가? 필요한 게 있다면 개경으로 돌아가는 대로 지원해주겠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백성들이 입고 먹을 것이 부족하옵니다. 계속해서 개경으로 물자를 보내려고 하다 보니, 이미 보낼 것은 다 보내었고… 군사들의 군량마저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또한…….”

이의방은 애써 통주 방어사의 시선을 피하였다.

“그래. 알겠네. 가세나.”

“예… 위위경.”

북방으로 와서 차마 못 볼 거, 못 들을 소리 다 들어본 이의방은 차마 통주 방어사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위위경, 통주의 군사 훈련도 보실 것이옵니까?”

곽주의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통주 방어사가 이의방에게 물어오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

“예. 위위경. 부장들은 들어라. 속히 군사를 연병장에 집결시켜라.”

“예!”

그의 말에 부장들이 속속히 움직였다.

통주 방어사는 이의방을 계속 안내하였다.

* * *

얼마 후.

이의방은 통주성 밖을 나와 진지를 살피었다.

관내에 있는 1차, 2차 진지 방어선을 두루 살피어 보면서 통주 방어사의 설명을 들었다.

“지도를 통해 보시다시피 서문 밖으로는 바다인지라… 그 인근에서 두루 사는 어민들이 있어 경계초소를 몇 군데 세워두기는 하였사옵고… 여차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민들 중 남정네들만 서문 1차 방어선으로 옮기게 두었사옵니다. 나머지는 모두 성으로 들어오라 명했습니다.”

“음… 이곳에도 역시 진지구축이 되어 있는가?”

이의방은 해안가에 대해 물었다.

“일단 해안선 쪽에는 목책들을 두루두루 설치를 해 놓았으나, 목책도 계절마다 바꿔 줘야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게다가 쉽게 썩어서 문제가 많습니다… 말씀하신 진지 또한 구축이 되어있기는 한데…….”

“목책 하나 세우는데 얼마나 든다고 그래… 더군다나 진지는 또 왜?”

“…….”

이의방의 말에 통주 방어사의 표정은 굳어졌다.

마치 ‘네가 다 가져갔잖아.’라는 표정이었다.

이의방을 바라보니, 역시나 이의방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비용은 얼마나 드는가.”

“예. 위위경 일단 진지부터 시작해서 목책까지 갖춘다는 과정 하에…….”

“아, 그냥! 개경으로 돌아간 후에 사람을 시켜 견적을 내 볼 테니, 걱정하지 말게.”

“고맙사옵니다. 위위경.”

이곳에 조금이라도 오래 있으면 더 많은 문제들이 나올 거 같으니, 관리들이라도 보내 살피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을 돌렸다.

“다른 곳으로 가보세.”

“예. 그럼 북문 쪽으로 가시지요.”

* * *

통주 방어사의 안내에 따라, 가는 곳마다 쩔쩔매는 이의방이었다.

어딜 가든지 예산 부족이라는 소리만 해대는 통주 방어사에 이제는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건 다 좋다.

하지만 고치고 만들고 하는 데 있어서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덜한 곽주도 이미 그러한데, 더 이상 둘러보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잠깐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정중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이의방은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아, 내가 개경에서 사람을 보낼 게 아니라… 자네가 정리해서 나에게 보내 주는 게 어떠한가?”

문득 옆에 있던 서북면병마사 우학유를 잊고 있던 이의방이었다.

설명에 워낙 집중하며 들어보다 보니, 우학유를 잠시 잊고 있었다.

“하하하! 제게 왜 말을 안 하시나 했는데… 저를 잊고 계신 모양이었군요.”

“허허허, 맞아. 통주 방어사가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집중해서 듣느라 자네 생각을 전혀 못 하였네. 하하하하하! ”

“하하하하하!”

모든 장수들이 이의방을 따라 크게 한바탕 웃기 시작했다.

“진심이야. 매제가 좀 해주었으면 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학유는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그나저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자네가 여기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인 듯싶어.”

“…예?”

“안심이 된다는 그런 소리야. 옛날에 난을 일으키려 하였을 때 그 선두주자를 자네로 하려고 하지 않았나. 그때 자네가 이런 소리를 하였지. 무관이 문관에게 멸시를 받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래되었는데. 왜 분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칼로 흥하면 칼로 망한다고 자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지?”

“아하하… 위위경…….”

“아니야. 듣고 보니 자네 부친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칼로써 문신을 제거하는 것은 썩은 것을 뽑아내듯이 쉬웠네. 황실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했지만, 결국 나도, 무신들도 문신들과 똑같이 되어버렸어. 되돌려 바로 잡기도 이제는 무섭네.”

이의방의 말에 이의민, 이영령, 우학유는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숙이었다.

이의방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제에게 모든 권한과 권력을 쥐여 주거나, 돌려주게 된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태자비가 된 딸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태자비를 폐하는 일이 일어날 뿐만이 아니라, 태자비인 딸의 목숨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의방은 심적으로 불안감을 토해내었다.

“권력을 휘둘러 정권을 잡았는데… 정작 정치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고… 마음에 안 들면 다 부수고, 패고, 죽이고, 불 질러 버리고! 해볼 건 다해봤네. 하하하하하!”

이의방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놓고 싶어도 더 이상 놓을 수 없는 상황이 온 이의방이었다.

뒤를 돌아보며 북방으로 오면서 여태까지의 일을 계속 생각해보았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만든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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