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20화 (20/159)

020화

“형님, 정치 한번 해보시지요.”

우학유가 말하였다.

“권력이라는 것도 잘만하면 백 년을 갑니다. 지금 이 고려를 보세요. 왕이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왕이 정치를 잘해서 수백 년을 이어온 겁니다. 물론 정치뿐만이 아니지요. 그 능력이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력으로… 정치를 하라?”

“예. 그렇습니다.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치를 하면… 자연스럽게 고려의 금상 폐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시게 될 것이며, 형님이야말로 고려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시는 것이지요.”

우학유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는 이의방이었다.

고려의 실질적인 주인.

그건 지금까지 감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권력을 쥠에 따라 계속해서 권력을 휘둘렀지만, 본인이 고려의 주인이 된다니.

거기까지는 상상해보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았다.

“형님,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를 하십시오. 권력을 가졌으면 휘두르기 보다는 정치를 하는 게 낫습니다. 권력을 쓸 때는 쓰시고, 정치하실 때는 정치만 하십시오.”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우학유의 말에 이의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서북면병마사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위위경.”

이의민과 이영령 역시 뒤에서 보채었다.

“저희들이 위위경을 잘 보필할 것이옵니다. 무엇이 걱정이시옵니까?”

이의민의 말에 이의방은 내심 이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지난 난 때, 백여 명이나 되는 문신들을 때려죽여 버린 탓에 낙향할 사람은 이미 모두 낙향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답이라는 게 이의방에게는 나오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자감, 한림원 등의 학자들이나 학생들 역시나 자신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고 있는 터라, 선뜻 과거를 연다고 하더라도 나올 사람이 얼마나 될지도 걱정이 되었다.

“정치라… 정치… 나라를 다스린다.”

구미가 당기기는 하지만, 쉽게 정치에 발을 못들이겠는지 이의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치는 문관들이 하면 되는 거지.”

“그게 되겠습니까?”

우학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거병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아… 자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거병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냐니. 문신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무신들을 사람 취급을 하지도 않았어!”

“그것입니다. 황제를 제대로 보필치 못하고, 백성들을 갈취한 게 문신입니다! 무신들이 일어선 이유는 그런 문신들 때문에 나라가 도탄에 빠졌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학유 또한 감정이 북받쳐 크게 소리쳤다.

“저도 사람입니다. 저도 화가 납니다. 형님의 거병에 동참하지 못한 건 정말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병을 한 지금 와서 다시 무얼, 어떻게 바꾸려 하십니까! 지금의 황제에게 권력을 쥐여 준다면 황제가 황권을 다시 강화하기 위하여 어찌하겠습니까? 대신들이 피를 볼 것이 뻔한 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오히려 화를 내면서 이의방에게 강력하게 주장하는 우학유였다.

“형님의 이런 참된 모습으로 정치와 백성을 살핀다면 백성은 누구나 형님을 따를 것입니다. 만백성이 믿고 의지를 할 것입니다. 황실은 그저 고려의 상징이 되는 것이고, 모든 정치는 형님이 하는 것입니다. 황제 밑에 최고의 권신… 아니, 이 고려 천하의 주인 말입니다.”

“천하의 주인이라… 이 고려의 권신… 하하하하하…….”

이의방은 웃으며 우화유에게 말하였다.

“일자무식(一字無識)인 내가 하면 얼마나 할 줄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배우면 되지요.”

“그래… 안 그래도 배우려고 생각은 하고 있기는 하네. 하지만 정치 문제는 다시 생각해보자고…….”

“형님…….”

“다시 이야기하자고!”

이의방이 화를 내며 일방적으로 우학유의 말을 끊었다.

“방어사. 안내하시게. 잡소리가 길었어.”

“예! 위위경!”

이의방은 말을 몰자, 장수들은 이의방을 따랐다.

통주 방어사는 길을 잡아 다시 안내하기 시작하였다.

“그나저나… 그 아이는?”

이의방은 혼자 왔던 우학유에게 왜 혼자 왔냐고 쉽게 물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바빴었기 때문이었다.

“개경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가노(家奴)인 갑이를 붙였으니, 별일 없을 것입니다.”

“그래… 개경이라… 개경…….”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버님, 찾아 계셨사옵니까.”

“그래. 앉아라.”

“예…….”

경대승은 자리에 앉았다.

“그래. 응양군 일은 할 만 하느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응양군과 상장군 덕에 어려운 점이 없사옵니다.”

“음… 그래. 그렇겠지.”

경대승의 아버지 경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요즘 우리 둘 사이가 너무 소홀한 듯싶어 불렀다.”

“예. 아버님.”

경대승은 아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진은 자기 아들인 경대승을 잠시 보며 머뭇거리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아버님.”

“어? 아, 아니다. 마시거라.”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경대승이었지만, 입을 무겁게 하며 경진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을 삼갔다.

“저… 대승아.”

“예. 아버님.”

잠시 뜸을 들이는 경진은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무슨 일 있으시옵니까?”

“아니야… 자, 오늘 우리 부자 술 한잔하자.”

“예. 아버님.”

15세의 나이로 견룡군 교위가 되어, 용호군에 속해 있었다.

현재 20세에 응양군 장군이 되어 있는 경대승을 경진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경진은 대승처럼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경진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남들의 땅을 많이 빼앗았고, 고리로 자산을 늘려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아들은 그렇지가 않아, 사람들은 견부호자(犬父虎子)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개요, 아들은 호랑이라는 말이었다.

“저기 대승아.”

“예. 아버지. 말씀하시옵소서.”

“청주로 좀… 내려가 있거라.”

“…예?”

뜬금없이 청주로 내려가 있으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는 경대승이 물었다.

“어인 일로 청주로 내려가라는 말씀이신지요.”

“그냥 내려가 있어라.”

“아버님, 소자는 황제 폐하를 모시며 황실을 보위하는 응양군 장군이옵니다. 황제 폐하의 명 없이는 물러나지도 못하옵니다. 그런 소자에게 청주로 가 있으라니요.”

“문하시중 눈 밖에 나지 않으려거든… 가거라.”

“아버님… 언제는 또 위위경…….”

“지금은 달라! 이것아!!!”

경진이 크게 소리쳤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는 여우가 왕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지금 꼴이 딱 그 꼴이야! 아무리 위위경이 너와 두경승을 믿고 북방을 시찰 나갔다고 하지만… 지금은 문하시중의 말이 곧 법이다. 내 알기로는 두경승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구나.”

“…….”

경대승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문하시중, 제까짓 게 무엇이라고 이래라저래라한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이의방은 황제를 지키라고, 자신을 응양군 장군직에 직접 앉혀 놓았다.

그러한 지금 상황에 아버지는 청주로 가 있으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아무튼 나는 할 이야기를 다 했다. 저녁에나 다시 보자꾸나.”

한마디로 술은 이별주였던 것이었다.

아들을 청주로 보내니, 한잔 먹자는 거였고.

경대승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자… 한동안 응양군 숙소에서 지낼 것이오니, 그리 아시옵소서!”

“뭐, 뭐야!? 뭐라고!?”

경대승은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가자, 경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놈아! 안 돼! 당장 청주로 가!”

쾅!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버린 경대승.

그리고 경진은 털썩 주저앉아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이고… 문하시중께 뭐라 말씀을 드리나…….”

아들이 거부하며 밖으로 나가자, 경진은 정중부에게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매우 난처하였다.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며 아들을 청주로 보내라고 하던 정중부.

그리고 그런 정중부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경진이었다.

정중부가 있어서 자신이 지금 이 자리와 권세를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들 경대승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 자신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것이다.

* * *

“하하하!”

“진 상장군! 자, 마시게.”

“예! 문하시중!”

상장군들 중에서 가장 젊은 진준은 정중부가 따라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잔을 내려놓았다.

“자네가 내 옆에 있어서 천만다행이야.”

“하하하하!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문하시중.”

“자네가 내 옆에 있어서 정말 든든하다네. 상장군 중에서도 자네가 제일 젊어. 그러하니 내가 가장 든든하지. 아니 그런가?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정중부와 진준은 크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 * *

이의방이 개경을 비운 지 어느덧 한 달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정중부는 그동안 착실하게 자신의 편으로 이의방의 수하를 끌어들였고, 6위군 또한 포섭하여 자신의 손에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좀 내키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응양군이었다.

응양군, 상장군, 두경승을 어떻게든 변방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그 비어있는 자리에 조원정을 거기에 앉힐 수만 있다면 친위군, 2군 6위를 정중부의 손에 다 가지는 것이다.

흥위위를 제외한 수만의 군사가 자신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은 자명하였다.

덜컹.

술을 마시던 찰나 문이 열리며 아들이 들어왔다.

“어서 오거라. 어찌 되었느냐?”

“예. 아버지. 아버지 말씀처럼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종군한 승려들은 종참 관리하에, 계속하여 이의방의 친인척 모두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극겸의 집사가 혼자 돌아왔다는 수문장의 보고이옵니다.”

“뭐, 뭐라?”

집사가 혼자 돌아왔다니.

예상을 깨는 행동이었다.

이 정도면 집사를 대동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는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한 정중부였으나, 예상이 빗나가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집사가 이렇게 말을 했다 합니다.”

“어찌 이야기했다더냐.”

“주인어른의 급한 용무로 서북면으로 가 있는 위위경을 만나 뵙고 왔다고 말이옵니다.”

“뭐라고?”

문극겸이 끝내 이의방의 끄나풀이 되려는 것인가 싶었다.

정중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문극겸… 이놈이… 보아하니 완전히 이의방의 편으로 돌아서려는 싶은데…….”

어떠한 상황에도 항시 중립을 지켜오던 문극겸이었다.

아무리 이의방과 사돈지간이라 하여도 쉽게 이의방에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편에 서서 옹호하지도 않던 문극겸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이의방을 돕고자 하는 것인지, 정중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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