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고구려(6)
197화 고구려(6)
소위는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애써 태연한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그렇소? 하면, 이제 천하가 태평하겠구려. 본국도 고구려와 화친을 체결했으니 말이외다.”
“하하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소? 본국과 고구려는 수나라를 공격할 것이외다. 그리고 수나라가 고구려와 화친을 체결한 것이오? 전쟁에 패배하여 머리를 조아린 게 아니었소?”
주라후는 노골적으로 도발하며 소위를 압박했다. 그로서는 수나라와 화친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소. 들을 말도 없소. 어떻소? 이대로 돌아가는 걸 권하오만.”
축객령이 아니라 선전포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위는 수치심이 밀려왔으나 꾹 참았다. 원래 그는 대군을 일으켜서 진나라를 취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양견의 뜻이 너무나도 완강했다.
‘폐하께서는 어떠한 분쟁도 원하지 않으신다. 눈앞의 화를 피하기 위한 방책일 수도 있고, 천하를 품는 걸 멈추셨을 수도 있다. 내 뜻과는 다를지라도 어찌 거역하겠는가.’
그리고 양견의 말이 무조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돌궐의 분쟁은 아파가한의 승리로 귀결되고 있었다. 하면, 돌궐은 대군을 일으켜 다시 남진을 감행할 것이다. 이때 진나라까지 북진한다면 수나라는 곤란한 처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간교한 고구려까지 그 틈을 노릴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수모도 감내하며 진나라와 화친을 체결해야 했다. 황제의 국사가 내려질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귀국의 황제께서도 같은 의견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돌아갈 것이오.”
“이보시오.”
“나는 엄연히 사신단의 정사요. 어찌 황제의 국서가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내칠 수 있소? 혹시 황명이라도 내려진 것이오?”
“······그건 아니오.”
“하면, 이 대화는 지나치게 소모적이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나는 장군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판단하오. 어떻소? 우리 허심탄회하게 최선의 협상해볼 생각은 없소?”
주라후 역시 소위가 진숙보를 만나면 화친이 체결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의 주변에 있는 여러 간신도 적극적으로 나설 게 뻔했다.
그래서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이렇게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소위가 막후에서 협상을 제안한 것 역시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진나라 내에 존재하는 강경파를 최대한 달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음. 솔직히 말하면 내어줄 수 있는 건 없소.”
“······.”
“그러나 장군의 동의가 양국의 우호를 확실하게 확보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소.”
“피를 볼 사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오?”
“어찌 섣불리 장담할 수 있겠소?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의 나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오. 장군이 어떤 생각을 해도 좋소. 본국이 흉계를 꾀한다고 여겨도 좋고, 힘이 부족해서 손을 내민다고 판단해도 좋소. 그러나 지금의 우호는 확실히 담보되는 것이오.”
주라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소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찬성하지 않아도 좋소. 반대만 하지 않아도 양국의 우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오.”
“······.”
“하면, 나는 황제 폐하를 알현하리다.”
“······.”
주라후는 마지막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밖에 흘러갈 수 없는 진나라의 처지가 서글펐고, 선대 황제가 너무나도 그리웠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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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카간 아사나 섭도가 고구려의 신하를 청하면서 협상은 말끔하게 마무리됐다. 차기 대카간인 처라후는 썩 내켜 하는 모습은 아니었으나 어차피 당대에 그치는 일이었기에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처라후 역시 고구려의 지원이 절실한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음. 남은 건 아파가한이군요.”
“그런데 탈이 있겠나?”
의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가 생각보다 과격합니다.”
“아니, 자네가 개인적으로 느낀 목숨의 위협을 말하는 게 아닐세.”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소승이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말입니다.”
“이런. 자네 요즘 악몽을 꾼다고 했지?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바일세.”
“관세음보살께서 말리지 않으셨으면 벌써 칼을 뽑았습니다.”
“하하하.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네.”
너털웃음을 지으며 의연의 분노를 피했다.
“그래. 하면, 자네 생각으로는 아파가한이 공세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건가?”
“음. 욱하는 마음으로 그리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냉정을 되찾겠지요. 본국과 대카간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과격한 게 아니지 않나? 자네 말을 대체 왜 이렇게 하는 건가?”
“왜 이러십니까? 소승이 하나씩 따져봐야 합니까.”
“하하하! 내가 농이 과했네.”
나는 이번에도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의연을 달랬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으나 금방 평정심을 되찾을 것이다.
“정확하게 다시 묻지. 따로 사신단을 파견하지 않아도 괜찮겠나?”
“보내야지요. 한데, 소승만 아니면 됩니다.”
“이런. 자네가 안면도 있는데 어렵겠나?”
“소승의 수급과 만나고 싶습니까?”
“음. 그건 아니지.”
대라편이 고구려의 개입을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돌궐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중요했다. 대라편을 이대로 방치하면 언제라도 수나라와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북방의 근심은 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라편을 설득할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쉽사리 떠오르는 건 없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의연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대인. 아파가한을 적대세력을 만들지 않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한데, 본국에 그럴 여력이 있습니까?”
“없지. 금방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 무슨 수로 아파가한에게 물자를 보내겠나?”
“그러면 미래를 약조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휴. 미래라.”
입맛을 다셨다.
의연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았으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미래를 약조한다는 건 결국 차후 대라편이 원할 때 대대적인 수나라 정벌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였으면 모르겠으나 이미 고구려가 팽창을 중단하고 내실을 다지기로 정리가 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과 달리 지금은 대대로 고정의가 있기에 내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상당히 축소되어 있기도 했다.
“대인? 답을 내리기 어려우면 그냥 아파가한과 시원하게 겨뤄봐도 됩니다.”
“자네는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나?”
“일국의 명운이 걸린 결정이지요. 한데, 대인께서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며 머뭇거리니 소승이 어찌 말을 좋게 하겠습니까.”
“끙.”
의연은 아주 신나서 나를 몰아쳤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으나 역시 확실하게 정리하는 게 옳았다. 미루다가는 정말 대라편과 관계가 험악해질 수도 있었다.
“아파가한이 수나라와 손을 잡게 둘지 우리의 손을 잡고 수나라를 공격할지를 결정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후자일세.”
“오. 자신 있습니까?”
“아파가한을 설득할 방법이나 찾게. 수나라 정벌은 내가 알아서 해보겠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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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은 흐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얼마 전에 모질게 말해놓고 싱글벙글 웃으며 찾아온 내가 정상적으로 보이기는 어렵다는 건 너무 잘 알아서 그냥 넘겼다.
“어찌 오셨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왔지요.”
“경고한 대로 몸을 사리고 있는데 더 할 말이 있소? 바닥에 붙어서 기어 다니기라도 해야 하오?”
“하하하. 왜 이렇게 불편한 게 많아지셨소?”
“내가 그렇게 아둔해 보이시오?”
오늘따라 양광이 까칠했다. 그런데 양광은 까칠해야 제맛이었다. 피식 웃으면서 쳐다봤다.
“나를 이용해서 돌궐 협상을 제법 유리하게 끌어냈다는 걸 알고 있소.”
“음. 부정하지는 않겠소. 덕분에 저들을 교란할 수 있었으니 말이오. 한데, 이 또한 우리의 전술이지요. 전하가 한 건 아니외다.”
“하. 그래요. 다만, 나도 어느 정도는 공이 있었으니 조금은 편히 움직였소. 한데, 그 일로 사람을 그토록 면박주니 숨을 쉴 수나 있겠소?”
“이런. 마음이 상하셨군요. 그래서 내가 이번에는 제법 괜찮은 제안을 해보려고 하오.”
“또 어디에 나를 이용하려고 하오? 듣자니 아파가한의 공세가 예사롭지 않던데 나를 방패로 이용이라도 하려는 것이오?”
“비슷한데 방패까지는 아니지요. 전하가 그 정도의 힘은 없습니다.”
“······.”
“그런데 수나라를 흔들 창은 될 수 있지요.”
“뭐요······?”
양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서 말해보라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금의환향을 하고 싶다고 하셨소. 내가 그 힘이 되어주려고 하오만.”
“말을 왜 그렇게 돌려서 하오? 정확하게 말씀하시오.”
“기주를 드리겠소.”
“······.”
“훗날 본국의 대군을 내어줄 테니 수나라의 기주까지‘만’ 도모하여 통치할 생각이 있소?”
“······.”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말에 담긴 뜻을 알 수밖에 없다. 역시나 양광의 눈은 가늘어졌다. 씰룩거리는 볼을 보아하니 상당히 언짢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더러 본국을 분열시키라는 것이오?”
“정확하오. 풍요로운 기주를 통치하는 나라의 군주가 되는 것이외다. 어떻소? 나는 나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오만.”
“하. 되었소. 나는 그럴 수 없소.”
“하면, 평생 고구려의 인질로 살아야 하오.”
“흥! 언젠가는 본국으로 돌아가겠지요. 그게 관례요.”
“가봤자 뭐하오? 평생 의심을 받으면서 감시나 받을 건데. 인질로 살았던 황자의 삶이란 그런 게 아니겠소? 그러느니 차라리 기주를 통치하는 군주가 되는 게 나은 것이오.”
양광은 입술을 깨물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지 말고 힘을 더 보태줄 생각은 없소? 내가 황제가 되면 크게 보답할 것이오.”
“아.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전하를 어찌 믿소? 우리 조정에서도 전하를 그냥 죽이자는 의견이 상당히 많소. 그런데 내가 이를 막은 것이외다.”
“······.”
“제대로 살아볼 방법은 기주를 점령하는 것밖에 없소.”
“하. 그러면 고구려가 점령해서 통치하면 될 게 아니오.”
“하하하. 그러기에는 국력의 소모가 크지요.”
외세인 고구려가 기주를 통치하는 것과 수나라 황자인 양광이 고구려군을 이끌고 기주를 통치하는 건 다르다. 실제로 우리는 북평을 소화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나 양광을 앞세워 기주를 정벌하여 쓱 넘기는 건 해볼 만했다.
양광이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할지라도 고작 기주를 들고 고구려와 전쟁을 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힘이 있으면 중국의 통일을 시도하고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우리가 이건 또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수나라는 분열될 것이니 우리의 변방은 안정될 수밖에 없다.
“어떻소?”
“그때가 언제요?”
“언젠가는 올 것이오.”
“가능하오?”
“물론이오.”
양광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좋소.”
나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 우리 고구려의 제후가 될 것이오.”
“감내하겠소.”
“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