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고구려(5)
196화 고구려(5)
아사나 섭도의 안색은 일그러졌다. 고구려 사신단에 이계찰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자네 지금 나와 뭐 하자는 건가? 아니, 애초에 고구려는 나를 조롱하는 것인가?”
“말씀이 과하십니다. 소인은 엄연히 고구려의 재상입니다.”
“하!”
“내키지 않으면 외교의 결렬을 선언하겠습니다.”
외교라는 영역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계찰은 아사나 섭도의 불쾌함을 가볍게 넘겼다.
“답변이 없으시니 대화를 이어가도 되겠군요.”
섣불리 아사나 섭도를 도발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괜한 행동이 진짜 결렬로 이어지는 건 이계찰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외교에서 때로는 강하게 압박할 필요도 있었으나 이계찰은 전권을 행사하는 사신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국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신속(臣屬)을 청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나의 신하였네. 한데, 상황이 바뀌었다고 모시던 군주를 고구려의 신하가 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 고구려의 요구 사안을 감춰야 합니까? 대카간께서는 소인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고 보십니까?”
“······.”
“오히려 이럴수록 핵심을 빠르게 관철하는 게 나은 것입니다. 소인의 말이 틀렸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의외로 필요한 말만 정확하게 꺼내는 이계찰의 태도에 아사나 섭도는 묘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했다면 대화가 편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아사나 섭도는 뭐에 홀린 듯 말을 꺼냈다.
“내게 서운한 게 많을 것이네.”
“······.”
“늦었지만 참으로 많은 후회를 했네.”
“예. 이미 늦었습니다. 인제 와서 그렇게 말씀해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이계찰은 쓰게 웃었다. 아무리 의연하게 있고자 할지라도 복받치는 감정과 회한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소인이 몇 번을 말했습니까. 고구려와 손을 잡고 수나라를 압박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대카간께서는 수나라의 세폐만 고려하며 모든 귀를 막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 간악한 수나라가 약조를 지키기라도 했습니까?”
“······.”
“소인이 더 원통한 게 뭔지 압니까? 의연을 기억하실 겁니까.”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 그가 고구려의 첩자였습니다.”
“······.”
“요동에서 그를 만나고 말문이 막히더군요. 아시겠습니까? 고구려는 우리가 동맹을 파기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를 갈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데, 돌궐은 어떠했습니까. 수나라만 바라보다가 분열되었습니다. 심지어 가한께서도 대카간을 버리셨지요. 이게 말이나 되는 결과입니까?”
“······.”
어쩌면 천하를 도모할 수도 있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대한 돌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돌궐은 천하에서 가장 비루한 꼴이었다.
강성하던 시절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고구려에 목숨을 구걸하는 대카간을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건 너무나도 분명한 현실이었다. 현재 대카간은 고구려의 도움이 없으면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다 지난 일입니다. 소인은 이미 고구려의 재상입니다. 대카간께서도 과거는 잊으십시오.”
“······그래야지.”
“그러게 지근찰은 왜 가까이 두셨습니까!”
“······”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불쾌함을 보이던 아사나 섭도는 힘없는 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신속하겠네.”
“하.”
“세력과 가문은 지켜야지. 그러니 신속하겠네. 그게 대카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처신이라고 생각하네.”
만나면 모진 말을 쏟아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이계찰은 이 상황이 지독할 정도로 화가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랬다.
“가한의 일도 있습니다.”
“처라후에게도 말을 잘 전해주게. 돌궐의 적법한 계승자는 바뀌지 않았다고.”
“······.”
“하하하. 그래. 사실은 이 수모를 모두 갚아주고 싶었네. 잠시 움츠렸다가 복수하겠노라고 다짐했네. 한데, 자네를 만나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네. 이 모든 일이 나의 어리석음에서 비롯한 것인데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아사나 섭도는 이계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신속하지만, 처라후는 꼭 그리할 필요가 없겠지. 이것만은 꼭 알아주게나.”
“······.”
“부족했으나 돌궐의 대카간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이라고 하지. 이리 해주겠나?”
이계찰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게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를 설득해보겠습니다.”
“본국이 아니라 고구려라. 고맙네.”
이 순간 짧았지만, 이계철은 돌궐인으로서의 피를 보여준 것이었다. 아사나 섭도는 이만하면 만족했다.
-----
만족했던 최상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악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위정은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한 것이었다.
주라후는 외교의 결과로 쉬지 않고 진숙보를 설득했다.
“폐하. 고구려와 군사 동맹을 체결했사옵니다. 어찌 수나라 정벌을 주저하겠사옵니까.”
“장군은 왜 그렇게 전쟁을 좋아하시오? 백성들이 욕하오. 태평성대를 망치려 한다고 말이외다.”
“폐하. 조금만 더 나아가면 천하를 품으실 수 있사옵니다. 하온데 신하된 도리로 어찌 멈출 수 있겠사옵니까.”
지치지도 않는 주라후의 태도에 진숙보는 염증을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다.
“알겠소. 그래서 내가 뭘 어찌하면 되오?”
“폐하. 10만의 대군을 내어주신다면 신이 북벌을 완수할 수 있사옵니다.”
“허. 10만이라니요.”
듣고 있던 공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불편함을 표출했다.
“1만도 아니고 10만을 어디에 쓰려고요? 몰락이 확정적인 수나라를 상대하는 일이라면 1만도 과하거늘.”
“폐하와 논의하고 있소. 어찌 불경하게 끼어드는 것이오?”
“폐하. 10만은 말도 안 되는 일이옵니다.”
공범은 주라후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진숙보를 설득했다.
“하. 10만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사옵니다. 민심이 크게 동요할 것이옵니다.”
“음. 나도 10만은 과한 것 같소.”
“그렇사옵니다. 애초에 본국은 10만을 동원하기도 어렵사옵니다.”
“음? 말을 왜 그렇게 하시오?”
갑작스러운 반론에 공범은 멈칫했다. 그러나 불쾌함이 담긴 진숙보의 눈을 보자 곧장 말을 바꿨다.
“신은 10만이나 동원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사옵니다.”
“아아. 아니지요. 나는 분명 본국이 10만의 대군을 동원할 능력이 없다고 들었소.”
“그렇사옵니다. 신도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주라후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개입하자 공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시 변명했다.
“아무래도 신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옵소서.”
“음. 그래요. 앞으로는 말을 조심하세요. 천하를 지배하는 본국이 고작 10만도 동원하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불쾌하오.”
“신이 깊게 새길 것이옵니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고 느낀 주라후는 다시 강력하게 청했다.
“폐하. 황명을 내려주신다면 신이 단번에 북상할 것이옵니다.”
“음.”
“폐하.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천하를 폐하께 안겨드리겠사옵니다.”
그때였다.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니까 수나라의 사신단이 당도한 것이다.
-----
주라후는 실소를 머금었다. 표정은 불편함이 가득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려. 수나라에서 우호의 사절단을 보내다니요?”
“하하하. 장군. 말 그대로 우호를 꾀하고자 온 것이오. 곡해하지 마시오.”
소위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주라후의 경계를 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한두 마디의 말로 개선될 관계는 아니었다.
“호시탐탐 본국을 노리던 수나라에서 우호라는 말을 꺼내니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소.”
“장군. 말은 바로 해야지요. 그동안 전쟁을 꾀한 건 진나라가 아니오? 꾸준하게 북벌을 준비한 건 천하가 다 알고 있소. 한데, 본국은 아니지요. 안 그렇소?”
“그걸 말이라고 하오? 수나라는 그럴 여력이 없었을 뿐이오.”
“그렇소. 우리는 남진을 시도할 여력이 없었소. 그래서 하지 않았소. 하면, 내 말이 맞지 않소?”
주라후가 명장이긴 하지만 언변으로는 소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말려 들어가고만 있었다.
“본국은 다른 뜻이 없소. 분열이라고 하지만 벌써 수백 년이 아니오? 그렇다면 이미 이게 역사이자 현실이라고 생각하오. 이대로 공존하며 지내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지 않겠소?”
“하······.”
“우호를 증진하며 교류하고 지낼 수 있는데 굳이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있소? 나는 분명 이렇게 생각하오.”
“어림도 없소. 수나라는 돌궐과 고구려의 압박에 국세가 흔들려 본국과 우호를 위장하려는 것이오. 내가 이를 간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장군의 말이 또 맞소. 본국은 고구려와 돌궐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여 국세가 크게 흔들렸소. 그래서 귀국과 싸울 여력이 없소.”
주라후는 또 말문이 막혔다. 반면, 소위는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목소리나 행동은 참으로 여유로웠다.
“힘이 부족하여 우호를 청하는 게 대체 왜 문제라는 것이오?”
“그게 진심이라면 본국에 신속해야 할 것이오.”
“음. 그러면 달리 묻지요. 이대로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진나라는 본국을 진정으로 감당하실 수 있소?”
“내가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최선을 다해서 양국의 국력이 벌어지는 걸 막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본국의 힘이 소진했을 때를 노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내가 묻는 것이외다. 서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소?”
소위는 공격적이었고 노골적이었으며 솔직했다. 주라후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본국의 힘이 빠졌을 때 어떻게든 도모하려는 마음은 잘 알겠소. 그런데 굳이 그리하려는 이유가 본국의 공격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소? 내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공격을 걷어내는 우호를 체결하기 위함이오. 하면, 굳이 싸울 이유가 없지 않소?”
“······.”
“물론, 본국이 국력을 회복하면 전쟁을 선포한다고 예상할 것이오. 한데, 이건 모든 나라가 그러한 게 아니오? 외교가 필요한 건 상대를 힘으로 굴복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오. 우리도 그렇고 귀국도 그렇소. 한데, 왜 우호를 피하려는 것이오?”
주라후는 탄식하듯 한숨을 쉬었다. 소위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으나 언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진숙보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폐하께서는 소위를 사실상 수나라의 항복 사절로 인지하고 모든 군사 행위를 중단하실 것이다.’
이보다 한스러울 수는 없었다. 위정이 수모와 굴욕을 감당하면서 확보한 외교적 성과가 이대로 무너진다는 게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어······?’
그 순간 주라후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구려. 귀공에게 현실을 알려줘야겠소.”
“현실이라고 하셨소?”
“그렇소. 본국은 고구려와 군사 동맹을 체결했소. 조만간 합을 맞춰 대군을 일으키기로 했소. 한데, 인제 와서 수나라와 무슨 우호를 체결하오?”
소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국서를 보여드릴 수 있소만?”